세상에 정의는 있는가?
조선 최고의 천재 김시습의 절규
“난신(亂臣) 성삼문의 아내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 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주고...”
- 실록 세조 2년 1456년 9월 7일-
성삼문은 사육신(死六臣) 중에 한 명이다.
이들은 초선 초기에 수양대군이 피의 계유정난을 일으켜서 어린 조카 단종의 왕권을 찬탈한 일을 불의하게 여긴 학식과 청렴함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종 복위를 시도하다 잡혀 죽임까지 당하였기에 사육신(死六臣)이라 칭한다.
사육신들은 분노한 세조에 의하여 모진 고문을 당하고 형장에 끌려가 사지를 찢어 죽이는 끔찍한 형을 당하고 잘린 시체들은 내 던져졌다. 그들의 집안은 남자들은 다 잡혀가 죽임을 당하고, 부인과 딸들은 노비로 팔리며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서두에서 언급한 실록 내용은 성산문의 부인과 딸이 노비로 팔려간 것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에 대한 확인이다.
불의한 세상 속에서 인생의 절규적인 질문
인간 세상에는 예나 지금이나 정도나 양상의 차이는 있지만 이처럼 불의한 일들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악화가 양화를 잡아먹고, 불의한 사람들이 의로운 사람들을 이기고, 오히려 악인들이 의기양양하여 득세하는 참으로 모순되고 참담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세상의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고, 알아도 적당이 눈감고 사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 동조하며 기꺼이 동참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피해 은거하며 살고, 불의한 세상에 대하여 분노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론 악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있다.
불의에 항거한 사육신(死六臣)들에게 가해진 처형은 거열형(車裂刑)이었다.
거열형은 사람의 사지와 목을 오거(五車)에 따로따로 매달고 말을 달리게 하여 몸을 찢어서 토막 내는 끔찍한 형이다. 사육신들의 동각 난 시체들이 노량진 강변에 비참히 던져졌고, 세조의 서슬 퍼런 공포의 시국에 감히 시체를 거들 떠 보는 사람이 없었다.
삼일 째 되던 밤중에 벙거지 모자를 쓴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몇 명의 사람들과 소달구지를 끌고 와서 흩어진 시체 조각들을 주섬주섬 담는다. 시신들을 노량진 언덕에 묻어 주고 이윽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 사람이 바로 조선 최고의 천재, 생육신(生六臣) 중에 한 사람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다.
생육신은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세조의 불의함을 보고 분노와 슬픔으로 세상사에 몸담고 살 수가 없어 평생을 운둔자로 살며, 선과 악, 인생과 세상에 대한 의문과 고뇌 속에 살다 간 사람이다. 이런 김시습이 마지막에 쓴 절규적인 시(時)가 있다.
"미친 듯이 옛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나에게 대답해주지 않는가?
미친 듯이 옛사람들에게 물어본다.
나는 소학을 읽고 대학을 읽고 논어를 읽고 공자를 읽고
맹자를 읽고 노자를 읽고 장자를 읽고 불경 모두 다 보았는데...
소학도 대학도 논어도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장자도 불경도 그들은 왜
아무도 내가 찾는 인생에 대해 답해 주지 않는가"
성경 속에 담긴 김시습의 절규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김시습의 질문은 악인들이 득세하는 이 세상, 악이 선을 이겨먹는 불의한 세상, 정의나 공의 같은 것이 없는 것 같은 세상! 이처럼 부조리하고 모순된 것이 인생이라면, 인생 자체가 도대체 무엇인가? 정의의 존재 여부에 대한 질문이 인간 존재의 근원적 질문으로 이어져 간다.
이러한 질문은 사람 속에 내재된 것으로 인간이 가진 독특성이다. 인간은 어떻게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을 소유하고 있고, 왜 선악에 대한 번민과 고뇌, 고민과 의문을 하는 존재로 살아가는가? 또한 이런 선과 악의 의문과 질문이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이어지게 되는가? 나는 이러한 질문의 길고 긴 터널 끝에서 성경에서 해답을 찾아가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선이 악에게 무참히 짓밟히고, 불의가 득세하는 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의문과 질문이 성경 속에도 많이 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이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며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이들은 악인들일지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시편 73:3,12,16)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 도다.”(시편 12:1, 8) 시편은 이러한 탄식들이 가득하다.
전도서는 이러한 세상에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인생은 헛되고 헛된 것” 임을 말하고 있다. 선지서들은 정의가 사라진 국가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섭리, 심판에 관한 말씀들이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모순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도 공의로운 심판자가 계신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아니 공의로운 하나님이 살아계시면서도 불의한 일이 계속될 수 있다고요?” 반문이 일어날 수도 있다.
악인이 자주 승리하는 요인들
악인들은 의인들이 차마 할 수 없는 사악한 수단들(거짓, 술수, 계략, 회유, 협박)을 서슴없이 다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은 누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인지 잘 알지를 못한다. 고대로부터 중우 청치가 가능하고, 현시대에도 북한처럼 선전 선동으로 국민의 속이듯, 소위 민주국가 속에서도 언론을 통하여 기만을 당할 수 있다.
성경에서 "사나운 이리들도 순한 양의 탈을 쓰고 온다고 하듯이" 불의한 세력들에 은밀하고 다양한 수단과 방법들에 의하여 사람들이 기만을 당할 수 있다. 또한 악인들의 힘과 권세에 눌려 바람보다 먼저 누워버리며 편승하고 추종하는 인생들이 적지가 않다. 그래서 세상에서 악의 세력과의 싸움은 항상 벅차고 힘이 든다.
역사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심판
그럼에도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섭리는 반드시 있어 왔다. 인류사회가 그래도 조금씩은 진보하고 있는 원인이 된다. 물론 때때로 역사가 실재 퇴보하기도 하고, 역사의 진보가 나선형 모습으로 이루어져 가므로 사회가 퇴보하는 듯한 혼란스러움도 있다.
하지만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공의와 정의의 역사도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간다고 나는 믿고 있다. 정의로운 흐름의 역사의 강물 속에는 의로운 길을 가려는 그 시대의 사람들의 고독과 몸부림, 땀과 눈물과 피가 썩여 함께 흐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악이 득세하는 세상에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의로운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들이다. 악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도 끝내 절망하지 않고, 삶을 결코 포기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좁고 협착한 길”(마 7:13)을 가며, 하나님의 공의의 도도한 역사를 이루어 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고, 안타깝고 슬프게도 그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