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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Aug 24. 2020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혼자서 가다

영화 "암수살인"













  2018년 9월 21일. 개봉을 단 2주 앞두고 있던 한 영화에 대해서 서울 중앙지법에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접수되었습니다.  그해 10월 3일 개봉을 목표로 한참 프로모션이 진행되고 있던 작품, '암수살인' 이었죠.  이 작품은 이미 홍보 단계에서부터 부산에서 일어났던 실화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강조했었어요.  그중 가처분의 발단이 된 사건은 2007년 11월 부산 중구 부평동 밤길에서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만으로 노상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했던 고시생 박 모 씨의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하는 경우에는 관련 피해자들이나 유가족들에게 사전 동의 및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제작사는 이 사실을 간과한 채 개봉 전 마케팅을 진행했던 거죠.  각색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피해자의 나이, 범인의 범행 수법, 범행 장소까지 그대로 재연되는 바람에 박 모 씨의 유가족 측에서 상영금지 가처분을 신청했던 거예요.


  개봉을 코 앞에 둔 상황에서의 상영금지 신청이라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겠지만 사건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전 동의와 협의가 없었던 건 분명 제작사 측의 도의적 과실이었습니다. 뉴스가 전해지면서 이 작품 '암수살인'은 단숨에 실시간 검색 1위에 올랐고 예고편과 시놉시스만 알려진 상태에서 이 작품에 대한 비난 여론이 일기 시작했었죠.  '김광석', '미투-숨겨진 진실', '곤지암'등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건들이 모두 기각된 사례가 있긴 했지만 유가족들의 2차 피해에 제작사가 소홀했다는 비난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어요.  뒤늦긴 했지만, 제작사 측에선 유가족들을 찾아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고 그 사과에 유가족들은 '조건 없이' 가처분 신청을 취하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의 제작 의도와 취지에 관한 제작사 측의 설명에 깊이 공감한다는 의견을 덧붙이기도 했었죠.  더욱이 이 작품을 미리 관람했던 다른 피해자의 유가족은 자신의 트위터에 "이 작품은 세상에 꼭 나와야 한다"라는 소감과 응원의 글을 남기기도 했어요.  상영금지 가처분 취하, 유가족들의 응원글이 개봉일인 10월 3일을 하루 이틀 앞두고 이루어졌으니 상황은 꽤 급박하게 돌아간 셈이었습니다.    


  이렇게 개봉 전 2주간 동안 이런저런 뉴스에 오르내리면서 이 작품은 '흔한' 형사물에서 어느새 사회적 관심과 논란의 대상이 되는 '화제작'이 되어 버렸어요.  많은 사람들이 처음 들어보는 용어인 '암수살인'이 대체 무슨 뜻인지 찾아보게 되었죠.  왜 이 작품이 상영금지 신청의 대상이 되었는지, 어떻게 개봉 직전에 극적으로 유가족으로부터 동의를 얻어낼 수 있었는지도 말이에요.  오히려 더 나아가 그 유가족들로부터 응원의 메시지를 받게 된 사실도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범죄 실화, 살인범, 그리고 그를 뒤쫓는 형사라는 이 익숙한 설정으로 이 작품은 대체 무얼 말하고자 이 급박한 일련의 개봉 전 해프닝들을 거쳐야만 했던 걸까요.





       








                 " 일곱,  총 일곱 명입니다.

                   제가 죽인 사람들예.

                   인제 좀, 관심이 생깁니까. "




  

  이 작품 '암수살인'은 2012년 11월 20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869회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에피소드의 부제는 '감옥에서 온 퍼즐-살인 리스트의 진실은?'이었어요.  2010년 9월 부산에서 유흥주점 여종업원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던 한 살인범이 22년 차 베테랑 강력계 김 모 형사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가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편지를 받고 교도소로 찾아간 김 모 형사에게 살인범은 직접 A4 두장 분량의 자술서를 건네줬었죠.  그 속엔 살인범이 직접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총 11건의 밝혀지지 않은 다른 살인사건의 리스트들과 단서가 될듯한 짤막한 개요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다른 형사나 검사와의 접견도 거부한 채 감옥 속 범인은 유독 김 모 형사에게만 마치 퍼즐을 풀게 하듯, 편지나 접견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를 조금씩 제공했다고 해요.  


  해당 TV 방송은 범인의 잇따른 자백과 번복, 허위 진술의 과정들을 다 감내하면서 어딘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들을 홀로 찾아 나선 김 모 형사의 모습을 조명하고 있었죠.  이 에피소드를 시청했던 김태균 감독이 직접 부산으로 내려가 해당 김 모 형사를 만났고, 이후 1년여간의 자료조사를 거쳐 시나리오로 완성시킨 작품이 바로 이 작품 '암수살인'이었습니다.  

피해자들이 실종되었거나 스스로 행적을 감추었다고 판단되어서 살해당했다는 사실 자체도 알려지지 못하는 사건을 일컫는 '암수살인'은 당연히 사건 자체가 수사기관에 인지조차 될 수 없죠.  전적으로 범인의 '자백'이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인지, 아니면 범인의 단순한 장난이나 거짓말일지 전혀 장담할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사건 수사에 매달렸던 실제 김 모 형사의 그 열정과 집념이 바로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되었던 겁니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물이란 굉장히 익숙한 설정을 가진 듯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적지 않은 부분에서 전통적인 클리셰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요.  영화가 시작된 지 5분이 지나자마자 살인범 강태오(주지훈)는 경찰에 곧바로 붙잡힙니다.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미 감옥에서 복역 중인 상태로 영화는 시작되죠.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던 '그것이 알고 싶다' 869회 에피소드도 맘만 먹는다면 어렵지 않게 인터넷에서 따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봉 전후 이 작품에 관한 뉴스들이 이미 적잖이 화제가 되었던지라 줄거리 자체가 이미 스포일러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쉽게 파악되죠.  심지어는 영화 속 강태오의 실제 모델이 되었던 살인범의 결말이 어땠는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그래서 빗대 보자면 이 영화는 모든 패를 이미 다 뒤집어 보여주고 시작하는 카드게임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범인을 추적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의 액션이나 서스펜스에 주안점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골목길을 누비는 추격씬, 혹은 도로를 뒤집을듯한 액션씬, 강대강으로 맞붙는 폭발적 에너지의 격투씬... 같은 눈에 익은 장면들이 없어요.  살인범 강태오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말투의 사투리 대사들이 꽤 인상적이지만 영화는 사실 의아할 정도로 극히 담담하고 느리며 절제된 템포로 진행되죠.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살인 고백들의 조각난 단서들로 형사를 가지고 노는 살인범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말의 작은 단서들이라도 얻고자 불리한 수 싸움을 벌이는 형사가 벌이는 여섯 번의 접견실 대화 장면들이 오히려 이 작품의 '서스펜스' 그 자체예요.  자신을 가지고 놀려는 살인범과 마주 앉아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른 채 실낱같은 단서라도 얻고자 열중하고 있는 평범한 한 형사의 인간적 집념이 더 도드라집니다.  사건을 수사하고, 추적하고, 검거하는 순차적 과정에서의 카타르시스보다 오히려 이 작품은...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음에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그 이름 모를 피해자들을 거꾸로 찾아가는 과정에서 차오르는 먹먹한 감정들이 더 짙게 다가올 거에요.


  따지고 보면 극 중 김형민 형사(김윤석)는 어쩌면 자신이 농락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죠.  같은 동료들로부터도 지난 일을 들쑤시며 민폐를 준다고 손가락질 받기도 해요.  일이 꼬여서 좌천과 강등의 불이익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돈으로 살인범의 요구대로 영치금을 직접 바쳐가면서까지 단서를 얻으려 하죠.  왜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걸까요.  

이 작품이 보여주고 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 점에 있었습니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혼자 상처 받을 수도 있는 이 싸움을 이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한 번쯤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죠.  '어떻게 사람들을 죽였느냐' 혹은 '어떻게 잡았느냐'를 보여주려 했다기 보단 '왜 이런 일들이 묻히고 잊히는가'를 결국 말하고자 했던 작품인 겁니다.




      











  연쇄살인, 그리고 실화에 바탕을 둔 범죄 영화.  개봉 전부터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라는 굵직한 이슈가 따랐던 작품이라 '당연히' 개성파 배우 김윤석, 주지훈의 강렬한 에너지 충돌이 작품 전반을 이끌거라 예상했었습니다.  특히 김윤석이 이전작들에서 보여주었던 강하고 쎈 캐릭터 이미지들을 떠올린다면 더욱 그러할 테죠.  그러나 이 작품 '암수살인' 자체가 이런 장르의 작품들이 가진 고질적 신파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하려 애쓴 것처럼 주인공 김 형사를 연기한 배우 김윤석도 한결 절제된 연기톤으로 오히려 더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어요.

주지훈이 연기했던 살인범 강태오가 활활 타오르는 '불'이라면, 마주 앉은 김 형사는 마치 잔잔하지만 깊은 '물'과 같습니다.  섣불리 그 깊은 분노를 드러내진 않아요.  관객들은 그런 그의 눈을 통해서 세상과 그 속의 인간들을 눈 아래로 깔고 조롱하는 살인범 강태오를 마주 보게 만들죠.  그리곤 서서히 끓어오르는 연민의 감정으로 누군가의 엄마이자 아들, 혹은 딸이나 손녀였을 채 알려지지 않은 희생자들을 우리와 같았던 한 '인간'으로 함께 바라보게 해요.  바로 그 '인간'을 바라보고 불리한 싸움을 계속하려는 김형사의 모습처럼 이 영화는... 화려한 기교와 테크닉을 내려두고 뚝심 있는 정공법으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그렇게 걸어가려 합니다.  


  만약 이 작품이 쉽게 예상했던 대로 그저 이 '암수살인'이란 소재를 또 하나의 눈요깃거리, 단순한 재밋거리로만 소비하고 말았다면 그 상영금지 가처분이 기각되었다고 해도 그와는 별개로 꽤 오랫동안 비난과 구설수에 시달렸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많은 부분에서 그 전형적인 클리셰들을 배제시킨 채 의외로 허술한 사법체계, 사회 시스템, 그리고 무관심, 방관, 이기주의와 같은 이 사회의 깊은 그늘을 담담하지만 차갑게 조명하고 있죠.  

그래서일까요, 제작사의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이 작품을 관람했던 한 유가족은 개봉 직전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응원의 소감을 남겼었습니다.  "이 영화가 세상에 나와야 하는 이유는, 누구도 눈길 주지 않은 사건에 주목해 그것을 결국 밝혀내셨던 형사님과 같은 분들이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서입니다."라고 말이에요.  따지고 보면 결국 세상은 이런 이들로 인해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하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바라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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