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내게 이렇게 묻지 않았더라면, 여느 때처럼 그냥 돌아섰을 겁니다. 상대방에게 지독한 환멸을 계속 쌓아갈 바엔 그냥 각자 서로를 포기하고 무시하며 지내는 게 가장 나은 길이었으니까요. 최선의 길이 없다면 그저 최악의 파국만 피해 가는 것. 특히 그 사람과 나, 그리고 그 사람과 직원들 전체의 관계처럼 명백한 상하관계에선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끝내 각자의 입장만 내세우며 상대를 은연중에 비난해온 지도 근 십몇년이 지났고, 그런 식으로 그는 나머지 모두에게 따로 뚝 떨어진 '섬'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죠. 우리들이 힘들었던 만큼 그도 분명히 쉽지 않았을 겁니다. 꽤 오랫동안.
하지만 어쩌겠어요,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를 잔뜩 세운 채로 자신에게 다가와달라 갈구하는 사람을 안아줄 방법은 없었습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며 섣부른 '공명심'에 나섰다가 그 뾰족한 가시에 수없이 생채기를 입고 나서야 완전히 감정적인 '단절'을 할 수 있었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차라리 그 어색함들이 한결 편안하게 느껴진 시점에서 그 사람이 어느 날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내게 넌지시 물어왔습니다. 자신이 혹시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괴물 같은 존재로 보이고 있냐고 말이죠. 그냥 여느 때처럼 '난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하면 될 일인데 그 후로 며칠간을 또 고민하며 보냈습니다. 어쩌면 절박해진 그 사람이 이젠 무심해져 버린 내게 보내는 완곡한 SOS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어서 그런 완곡한 의사표현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으로 와 닿았던 거죠. 만일 그런 거라면, 어떻게 서로 다치지 않고 깊은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내내 고심했던 듯합니다. 혼자서 며칠 밤 설쳐가며.
하지만, 그런 연유로 오랜만에 따로 밖에서 만나 마주 보게 되었던 그 자리에서 그의 싸한 눈초리와 굳은 표정을 보자마자 바로 직감할 수 있었어요. 총대 메고 나올 자리가 아니었다는 때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죠. 잘 걸려들었다는 듯, 여전히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그의 독설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결국 이런 식으로 또 바보같이훅 낚여버린 거라고, 나 자신을 내내 책망해야만 했었습니다.입에도 대지 않고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던 머그잔속의 그 따뜻한 커피는... 점점 더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어요.
1998년 제70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구스 반 산트감독이 연출했던 드라마 영화 한 편이 작품상을 비롯해 총 9개 부문의 후보로 노미네이트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최우수 남우조연상과 각본상이 이 작품에 주어졌죠. 뛰어난 연기력에도 불구하고 희극적 이미지 때문에 번번이 연기 부문에서 고배를 마셨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의 남우조연상 수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릅니다. 한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부기 나이트', '풀 몬티'등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최우수 각본상의 영예가 이 당시 20대 중후반의 신인들에게 주어진 건 쉽게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어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공동수상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은 특이하게도 영화 속에서 나란히 친구로 출연했던 배우맷 데이먼, 그리고벤 애플렉이었습니다. 맷 데이먼이 하버드 대학 영어영문학 전공으로 재학 당시 문예창작과목 리포트로 썼던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오랜 고향 친구인벤 애플렉과 함께 이후 세심히 다듬어 완성시킨 시나리오가 바로 이 '굿 윌 헌팅'이었던 거죠. 자신도 후보로 올랐던 남우주연상 트로피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잭 니콜슨에게 돌아갔지만 맷 데이먼은 오히려 밴 애플렉과 공동수상한 이 최우수 각본상에 더 큰 기쁨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진 이것이 그의 유일한 아카데미 수상 경력이기도 하죠)
돌이켜보면, 제작비 1,000만 달러의 이 '소박한' 이야기가 전 세계 흥행수입 2억 달러의 최종 수입을 거둬내며 지금까지도 수많은 관객들의 대표적인 '인생영화'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상처, 이해, 공감, 기다림, 경청, 그리고 인생의 멘토... 영화를 지켜보며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이 모두 정답이기도 하지만 모든 훌륭한 영화들이 그러하듯이 이 작품 역시도 인생의 시점에서마다 미묘하게 그 느낌이 달라집니다. 오래 숙성된 와인에서 더 깊은 맛이 느껴지듯이 사람도,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도, 그들을 그려내는 이야기들도 다 마찬가지인 것이죠.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더 깊은 향취가 전해져 오는 작품, 이 '굿 윌 헌팅'이 제겐 그러했습니다.
라떼는 말이야
눼눼
남부 보스턴의 한 명문 대학교 건물 청소부 윌 헌팅(맷 데이먼).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는 천애고아출신에다 사고뭉치지만 타고난 두뇌와 방대한 독서량으로 인해 수학, 과학, 역사,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천재에 가까운 지식과 기억력을 가진 청년이죠. 하지만 타인과의 소통, 관계의 공감능력에 있어서는 백치에 가깝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호의로 다가서는 사람들에게조차 윌은 그 '영리한 머리'로 그들의 가장 아픈 곳들을 꼬집고 헤집으며 비아냥대기 일쑤예요. 이 영화는 잘못된 환경들과 그로 인해 비뚤어져버린 가치관으로 인해 그저 머리 좋은 범법자로 인생을 썩힐지도 모르는 한 청년이 진정한 멘토를 만나 자아를 찾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로 축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중간중간에, 주인공 윌 헌팅이 그 천재적 두뇌로 주위를 놀라게 하는 장면들은 마치 양념처럼 은근히 통쾌함을 느끼게도 만들죠. 그 천재성을 살려 모두가 권유했던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이 작품의 '진 엔딩' 그 자체라 생각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이 작품에서 청소부 윌 헌팅이 천재적 두뇌를 가졌다는 설정은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라고 말이죠. 물론 그 재능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고, 그래서 그런 그를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가 되고 있습니다만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모든 등장인물들을 함께 들여다보면 어떨까요. 실상 이야기의 모든 초점이 오직 윌을 중심으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게 새삼 느껴집니다. 윌 헌팅이 보여주는 그 '천재성'은 세상 사람들이 가진 자신만의 고유한 특질, 성향, 정체성들을 상징하는 하나의 '대표적 표본'으로 여겨지거든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렇게 제각각 서로 다른 정체성들을 지닌 타인들과 지지고 볶고 뒤엉키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생이었으니까요. 윌이 자신보다 못하다고 여겨져 다른 사람들을 깔아뭉개는 이유가 되는 그 '천재적 두뇌'가 오히려 지금 그를 점점 더 다가서기 힘든 '또라이'로 보이게끔 합니다. 근데 자신은 모르고 있어요. 타인을 비난하고 있는 그 이유가, 동시에 나도 모르게 타인들로부터 지금 비난받고 있는 이유가 되고 있는 겁니다. 그건그저 주인공을 위한 부수적 장치들로만 보였던 주변 인물들 각각에게도 다 마찬가지일 거예요.
나를 잘 모르는 타인들에게서, 또 내가 잘 모르는 타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주고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면 이 영화는 과연 그 안에서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를 묵직한 가슴의 울림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예전엔 일방적으로 주고 또 일방적으로 받는 관계로만 비쳤던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와 삐딱청년 윌 헌팅이 어떻게 서로를 통해 상처를 보듬어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죠. 이 작품을 거의 몇 년 만에 다시 꺼내보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그랬습니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전에, 혹은 누군가에게 손가락질받기 전에 사실 어쩌면 우리들이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간절히 듣고 싶었던 그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니 잘못이 아니야
알겠니?
" 네 잘못이 아니야. "
올가미에 제 발로 걸려든 먹잇감을 내려다보듯이 나와 그 자리에 없는 다른 이들을 싸잡아 신랄하게 쏟아내는, 참 한결같은 그 사람의 비난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문득 생각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궁극적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얼까. 그리고 어렵사리 이 자리에 나오려고 결심한 나 자신이 그에게 최종적으로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라고 말이죠. 그래도 어찌 되었든 갑의 관계에 있으니, 어떤 뉘앙스로 그간의 진심들을 전해야 할지 간신히 빙빙 돌려 말하고 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 차가운 눈빛에서 애당초 눈치채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어요.
아직 그는 용기가 들지 않나 봅니다. 나만 모르고 사실은 남들은 다 알고 있는 불완전하고 미숙하며 때로는 표리 부동한 스스로와 대면할 진짜 용기 말이에요. 오랜 세월의 숱한 부침들을 통해 내가 이제야 가까스로 그 사실을 인정해가듯 그도 그 사실을 인정해 서로 이 불편한 자리에 마주했던 거라면 그리 긴 말들이 필요하지도 않았을 테죠.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짓이니까요.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서로 따뜻이 안고 싶었습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따뜻하게 서로의 등을 토닥이면서 서로들 다 힘든 거 이미 알고 있다고 그렇게 말해줄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진정으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봐 주는 이를 만나기 전 영화 '굿 윌 헌팅'속 주인공 윌(맷 데이먼)의 모습은 어쩌면 현실 속 우리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상처 받으면 받은 만큼 타인에게 돌려주고 때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먼저 상처를 입히기도 하죠. 그 와중에서 정말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작 잃어가고 있다는 걸 그도, 우리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 영화가 주인공 윌 헌팅에게 해피엔딩이라면 그건 그 천재적 두뇌로 삐까번쩍한 일자리를 얻게 되는 것, 그것만을 의미하는 건 분명 아니에요. 그가 스스로 가려놓은 장막들을 통해 그동안 보지 못했던 타인의 감정들에 공감하고, 누구나 자신만큼의 상처를 제각각 안고 살아간다는 걸 인정하며 매 순간을 살아가게 될 거라는 그 사실이... 진짜 해피엔딩이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