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남자와
차,
매년 6월 열리는 자동차 내구 레이스 '르망 24'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우리에게 안겼던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에 이름을 올리고 그중 편집상과 음향편집상 두개의 트로피를 최종 수상했던 '포드 V 페라리'는 '르망24시'(프랑스어 명칭: 24 Heures du Mans)라는 국제 레이싱 대회를 주요 이벤트로 다루고 있습니다. 1966년 실제 대회와 실제 인물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때의 레이스 결과까지도 그대로 작품 속에서 재현되고 있죠. 차알못인 저에게 레이싱 대회란건... 실은 다 같은 걸로 보였습니다. 똑같이 출발해서 가장 빨리 달려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는 것.
한데 이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르망 24시'는 성격이 좀 다릅니다. 이른바 자동차 '내구 레이스' 경기예요. 규칙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한바퀴에 13.48km인 경기 코스를 시작부터 하루 24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주파하는 거죠. 그 24시간 동안 총 합산 거리가 가장 긴 차량이 우승하는 규칙이다 보니 순간주행속도 만큼이나 차가 퍼지거나 망가지지 않는 내구력이 따라줘야 하는 거예요. 쉬지 않고 차를 몰아야 하는 드라이버에겐 초인에 가까운 체력과 정신력도 요구될 테죠. 운전자는 3명까지 서로 교체가 가능하지만 이렇게 원칙적으로 차는 24시간을 풀로 돌아야 합니다. 이러한 형태로 자동차의 내구성이 그 결과로 여지없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에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조사들이 이 대회에 적극적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죠. 이 대회에서의 우승이야말로 해당 자동차 메이커의 품질과 기술력의 바로미터가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에요.
<아이덴티티>, <3:10 투 유마>, <로건>등의 작품들로 알려진 제임스 맨골드 작품이 2019년에 내놓았던 이 <포드 V 페라리>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르망24시', 그중에서도 1966년 대회를 중심축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저리주저리 제가 설명했던 이 대회의 상세한 룰, 그리고 알아듣기도 힘든 극 중 자동차 전문 용어들을 꼭 줄줄 꿰고 있어야만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일까요?
멋진 자동차들의 질주가 아드레날린을 내뿜게 만드는 스포츠 드라마, 물론 그렇게만 봐도 굉장히 뛰어난 작품이기도 합니다. 한데 가만히 보면 이 작품은 그 레이싱 자체를 상세히 그려내는데 의외로 큰 공을 들이진 않아요. 따져보면 152분의 러닝타임 동안 그 레이스 장면들조차도 그리 많진 않습니다. 제목에서부터 포스터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레이싱'과 '자동차'들로만 꽉꽉 채워졌을 듯 하지만, 이 영화가 비슷한 구성과 소재의 여타 작품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깊은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건 바로 그 속의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죠. 결국 제각각 치열하게 생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당신네들이 우리를 이겨보겠다고?
포드가 감히 페라리를 이겨보겠다고? 10개월 만에?
그러니까 니가 날, 도와줘
1960년대 중반. 매출 부진으로 고심하던 포드사는 당시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던 이탈리아 회사 페라리를 인수하려고 시도합니다. 공산품 이미지가 강했던 포드로서는 고급 자동차 이미지의 페라리 인수가 여러모로 득이 될 상황이었죠. 한데 여차여차해서 그 인수 계약은 엎어지고 그 과정에서 페라리의 회장 엔초 페라리로부터 인신모독성 비난까지 들어야 했던 CEO 헨리 포드 2세는 전격적으로 전용 레이싱 팀 창단을 지시하게 됩니다. 목적은 딱 하나, 저 시건방진 페라리의 콧대를 팍 꺾으라는 거였죠.
한데 세상살이가 열 받는다고 전부 욱하며 덤빌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원래 페라리라는 회사 자체가 레이싱에 모든 가치를 두고 목숨 걸다시피 매진하는 회사예요. 대량생산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포드와는 달리 장인이 예술품을 빗어내듯 자동차를 만드는 페라리가 르망24시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가히 독보적이었습니다. 1949년에 첫 우승, 1954년과 1958년에 각 우승을 차지한 후 아예 1960년부터 1965년까지는 6년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있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포드의 차량이 르망24시에서 우승한다는 건 영화 속 표현을 빌리자면... 최소한 300년은 걸려야 가능한 일이었어요.
이 '어림도 없는 짓'을 단 10개월 만에 해치우기 위해서, 르망 24시 우승 경력자지만 지금은 건강상 이유로 운전대를 놓은 자동차 튜닝 판매업자 캐롤 셀비(맷 데이먼)가 레이싱 팀 책임자로 고용되죠. 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 채워져야 할 또다른 빈자리는 뛰어난 레이싱 실력의 소유자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였습니다. 실력이나 열정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지만 누구와도 타협하지 못하는 그 지랄맞은 싸움닭 같은 성격이 문제라면 문제였어요. 영화는 이 두사람을 주축으로 했던 1960년대 중반 포드사의 '르망24시 레이싱 팀 도전기'란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리 낯설고 이색적인 스토리 구조는 아닌 듯해요. 굳이 자동차 레이싱 팀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런 설정으로 출발하는 영화들은 쌔고 쌨었죠. 미친 듯이 연구하고 매달리다 몇번의 실패를 거듭할 테고 극적인 계기로 협력하고 화해해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뤄내는 이야기.
그럼 이 작품은 어떨까요. 맞습니다, 거의 그 노선을 따라간다고 봐야겠군요. 두세줄쯤으로만 요약하면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한데 자세히 보면 볼수록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승리' 그 자체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편'으로 보이는 포드의 승리? '상대편' 빌런으로 보이는 페라리의 패배? 그걸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가 아니었다는 거죠. 특이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만 쭉 지켜보다 어느새... 다양한 선택과 결정들의 기로에 서곤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 속에서 똑같이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저 양복쟁이들의 탁상 위에서, 그게 가능할까
때론 이성으로 치장한 '악감정'과도 맞서야 할 테고
지긋지긋한 정치질도 필요하고
다 잃을 각오로 배팅도 해야 할 테지
포드 V 페라리.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이 작품이 콧대 높은 유럽 자동차 메이커와 미국 토종 자동차 메이커 간의 자존심 대결 그 자체에만 집중했다면 사실 전형적인 아메리칸 국뽕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을 테죠. 포드사와 헨리 포드 2세를 싸구려 취급하며 독설을 퍼붓는 극 초반부 엔초 페라리의 모습은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여전히 부심에 쩔어있는 '옹고집쟁이 꼰대' 딱 그대로입니다. 실용적 스타일의 미국인들과 물건 하나에도 예술과 낭만을 부르짖는 유럽인들의 대륙간 자존심 대결의 양상으로도 비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보자면 '적'과 '내편'의 구분이 명확해 보였습니다. 흑과 백의 명확한 경계처럼 포드 진영의 시점으로 콧대 높은 페라리를 눌러 버리는 그런 전형적인 '감동 드라마'를 지켜보기만 하면 될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극이 진행될수록 작품 속에서 보이는 이 '대결'의 양상은 그리 단편적이지 않습니다. 좀 더 복합적이고 또한 상징적이죠. 이해타산이 지상 최대의 과제일 수밖에 없는 자본가와, 목적으로서의 순수한 이상을 좇는 장인정신과의 맞대결로도 보입니다. 또한 경직된 관료주의와 개개인의 자유의지들이 서로 충돌하는 낭비적이며 소모적인 갈등들이 극히 '현실적'인 형태로 투영되기도 하죠. 능률의 탈을 뒤집어쓴 듯 하지만 결국엔 인간적 '감정'이 이면에 깔려 공과 사의 영역이 무너지는 상황들도 작품 속에 덧대어 겹쳐집니다. 비효율적인 행정과 숨 가쁜 현장의 실무를 아슬아슬하게 조율해야 하는 관리자 캐롤 셀비(맷 데이먼)의 입장과,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목숨 걸고 기술 그 자체에 집중해야 하는 전문가 켄 마일스(크리스찬 베일) 두 주인공의 입장 또한 서로 교차점을 찾아야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상황들이 예측을 모두 벗어나 속된 말로 정말 '드럽게' 꼬여갈 때, 가끔씩 품게 되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인간적 회의와 의문들을 그려내고 있기도 해요. 폼나는 자동차들, 박진감 넘치는 레이싱에 쏠리던 관객들의 시선이 마치 물 흘러가듯 유려한 서사와 능수능란한 편집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땀내 나는 '사람들'의 드라마로 집중됩니다. 이분법적인 선과 악, 승리와 패배, 옳고 그름을 말하려는 영화가 아니었죠. 매번 서로 다른 장르의 외피를 차용하면서도 이렇게 꾸준히 인간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온 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스타일은 평범해 보이는 이 레이싱 영화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어요. 늙고 쇠약해진 울버린의 마지막 모습을 그려낸 히어로 무비 '로건'(2017년)을 통해 '살아간다는 것'의 짙은 페이소스를 묵직이 전했던 것처럼 말이죠.
친구, 미친 듯이 내달리라고
'속도' 만큼 중요한 건,
어쩌면 '끈질김' 인지 모르지.
아들아, 르망 24시 레이싱은 말이다...
"한 트랩을 미친 듯이 퍼펙트하게 완주해서
돌아오는데 3분 30초가 걸린단다.
그게,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려야 할 24시간 중에서 첫번째 3분 30초지."
열정, 혹은 고집, 아니면 광기나 집착.
어떤 의미로든간에 서로 다른 형태로 '자동차'와 '레이싱'에 미쳐 있는 두 사람 캐롤 셀비와 켄 마일스는 정해진 수순처럼 '300년은 걸려야 해낼 수 있는' 그 엄청난 일을 기어이 목전에 두게 됩니다. 천신만고 끝에 결승선을 통과하고, 모든 관계자들이 환호하고, 그 영광의 순간이 슬로모션처럼 그려지면서... 갈등과 화해를 거듭했던 두 사람이 부둥켜안으며 박수갈채를 받아야 마땅한 그림일 테죠. 그러나 이 작품이 끝까지 매력적인 이유는 역시 승부의 결과 그 자체에만 오롯이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하진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오히려 엄밀히 따진다면 누려야 할 대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묘한 허탈함을 넘어서 살짝 분노가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승 통과 직전에 내려진 그 어이없고 부당한 요구에... 두 사람이 고심 끝에 제각각 내렸던 그 정반대의 '선택'을 통해 이 작품은 사실 한 차원 더 높은 인간의 '신념'이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느끼게 만들어요. 영화 내내 두 사람이 정작 '아군'인 포드사와 벌였던 치사했던 파워 게임들을 생각한다면 원래 각자의 고집대로 캐롤은 타협을 종용했어야 하고 싸움닭인 켄은 회사의 그 요구를 개무시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테죠. 자신의 스타일을 굽히지 않고 결국 '쟁취하는 것', 그게 우리가 흔히 봐왔던 인간 승리 드라마의 전형적인 공식이잖아요.
그러나 그 결정적인 순간에 같은 목적 하에서도 서로 달랐던 스타일로 부딪쳤던 두 사람이 제각각 역전되어 상대의 입장과 처지를 결국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과격하게 내지르는 것만큼 때론 단호하게 거둬들일 줄 알고, 뜨거운 열정으로 부딪치면서도 때론 차갑게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 주인공의 교차하는 모습을 통해 묵묵히 그려내고 있는 것이죠.
자, 그 순간 두 주인공에게만 집중해왔던 시선들에서 뒤로 확 물러나 한결같이 다 '또라이' 들로만 보였던 다른 인물들도 다시 들여다본다면 어떨까요. 실은 말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을, 각자의 스타일로 충실히 해내고 있을 뿐인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어요. 심지어 내도록 켄 마일스를 못마땅히 여겨 지독히도 갈궈대던 이 영화 최고의 빌런(?) 레오 비브 부사장도 그 사사로운 감정과는 별개로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갖고 있겠죠. 경기 시작하자마자 전용헬기 타고 고급 레스토랑에 밥 먹으러 갔던 포드사의 CEO와는 달리 끝까지 그 승부를 그 자리서 지켜보고 '적'의 승리에 오히려 경의를 표해 온건 정작 그 옹고집쟁이 꼰대, 엔초 페라리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매달리는 고집쟁이들을 위한 이 작품의 헌사가...
비단 두 주인공 캐롤 셀비와 켄 마일스만을 위한 게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죠. 실은 지금도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 낮은 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그 모든 이들을 위한 무한한 '존경'을 담고 있는 그런 영화예요.
오늘도 열과 성의를 다해 3분 30초의 한 트랙을 무사히 완주하고 돌아와
언젠가 24시간의 이 긴 레이싱을 충실히 채워낼 바로 '당신'에게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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