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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Jun 29. 2020

혹시 서핑 좋아하세요?

영화 "폭풍속으로".(Point Break)












    "좋아하는 걸 하다 죽는 건, 비극일 수 없어."  





  마치 몸에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았던 신출내기 FBI요원 조니(키아누 리브스)에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보디(패트릭 스웨이지)는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리고 씩 웃으며 집채만 한 파도를 향해 서핑보드를 끼고 걸어 들어가던 그 뒷모습.  느닷없이 왜 그 순간에, 거의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와 그리고 고인이 된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의 그 대사가 툭하고 떠올랐는지 모르겠어요.


  매년 이 맘 때쯤 비슷한 시기에 이른바 '상급기관'에서 날짜 잡아서 친히 나오시는 특정업무 점검.  

  작년까진 그래도 '예의'가 좀 몸에 밴듯한 젊은 직원이 직접 노트북을 들고 와 준비해놓은 자료들을 스스로 열심히 대조하며 일을 처리하더군요.  저도 깍듯하게 예우하며 서로 깔끔히 마무리 짓곤 했었습니다.  근데 올핸 사정이 생겼다며 저보다 나이가 몇 살 정도 더 많은 다른 담당자가 나왔어요.  씩 웃으며 알아서 잘했을 테니 대충 보고 가겠다고 덕담(?)을 건네 옵니다.  그 말이 정작 저를 위한 거라기보단 스스로 잠시 쉬어가는 느낌으로 있다 가겠다는 뉘앙스로 들렸지만... 뭔 상관일까요.  그 사람이나 저나 그냥 언제나 보내는 루틴한 일상의 연장일 뿐이니 말이죠.  하지만 영혼 없는 공손함도 잠시,  노트북도 없이 덜렁덜렁 '쉬러' 왔다는 제 또래의 그 담당자는 아마 노안이 있는지,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그 보고서 들여다보는 게 힘들다고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형태로든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그 '일'이란 것이 말입니다,  사실 진짜 '일' 자체의 뒤치다거리도 있지만 이런 형태로 누군가의 '감정적' 뒤치다거리를 받아내는 게 더 중요한 경우가 많은 거죠.  '상급기관'에서 나온 분을 불편하게 만든 것에 대해 연신 어깨를 낮추고 허리를 굽혀가며 일을 진행시켰지만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에 짜증이 가득하다 못해 어느 순간부터 슬쩍 제게 반말을 시전 합니다.  물론 그것도 그들의 암묵적 매뉴얼이겠지만 말이에요.   


  근데 정말 우습게도 그 와중에, 개봉한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 '폭풍속으로'와 페트릭 스웨이지의 그 대사가 머릿속에 떠올랐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다 죽는 건, 비극일 수 없어'.  노안이 와서 잘 안 보인다며 제게 툭툭 던지는 그  진상짓  짜증을 잠시 끊고 갑자기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저기 혹시,  스카이다이빙이나 서핑해보셨어요?"

물론 그건 제 머릿속 상상으로 끝났고, 각자 그렇게 주어진 하루의 '밥값'을 어쨌든 마무리하긴 했습니다.  아마 어쩌면 내년 이맘때도 그와 나는 이렇게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어요.

아. 그럼 저는 그 스카이다이빙이나 서핑을 해봤냐고요?

물론 당연히, 한 번도 해보지 못했죠.

















  1991년 영화 '폭풍속으로'(원제" Point Break)는 지금 기준으론 거의 개봉한 지 30여 년이 다 되어가는 '고전작'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익스트림 스포츠'를 제대로 담아낸 원조이자 바이블 같은 그런 작품으로 추앙받고 있기도 하죠.   총격전이나 추격전등의 액션씬, 세련된 화면 구도, 빠르고 경쾌한 편집, 무엇보다 실황중계처럼 생생했던 서핑이나 스카이다이빙 장면들은 지금의 기준으로도 그리 '예스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란하게 CG로 후보정이 되는 시대가 아니었던지라 거칠지만, 날 것 같은 생생함이 더 묻어나죠.


  영화의 투톱은 '더티댄싱', '사랑과 영혼'의 전 세계적인 흥행으로 절정기에 있었던 배우 패트릭 스웨이지와 당시 얼굴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던 리즈 시절의 키아누 리브스였어요.  두 캐릭터가 극 중 대립하는 위치에서 서서히 서로 동화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낸 감각적인 버디 무비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갓 FBI 신입요원이 된 조니(키아누 리브스)가 4인조 은행털이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만난 강도단 두목 보디(패트릭 스웨이지)에게 본능적인 '동질감'을 느껴가다 결국엔 서로 '파국'을 맞는 이야기죠.  그 '파국'의 라스트씬이 너무나 비장하면서도 다른 의미로는 지극히 낭만적이었던지라... 이 작품을 추억하는 올드팬들에겐 일종의 '레전드'로 남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냉정히 들여다본다면 두 주인공이 서로에게 유대감을 나누는 과정에서의 드라마가 좀 헐겁게 느껴지기도 해요.  익스트림 스포츠를 매개로 한 두 남자의 샤방한 브로맨스를 떼놓고 본다면, 결국 각자의 영역에서 제대로 동화되지 못했던 '부적응자'들의 안타까운 일탈기일수도 있습니다.  본분을 심각하게 망각한 FBI 수사관과, 스스로를 마치 '의적' 인양 착각하고 있는 바닷가 양아치가 각자의 동료들에게 치명적 민폐를 안기는 스토리로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요.  두 주인공 캐릭터가 이렇듯 확실한 선과 악의 경계로 나뉘지 않는다는 점도 당시로선 꽤 이례적이었죠.  하지만 영화는, 두 주인공의 그 정체성 고민(?)을 그리 심각하고 무겁게 끌어가진 않습니다.  그 선에서 그렇게 적당히 뭉뚱그려 흐릿하게 만들어버린 게 오히려 이 작품의 미덕이자 매력으로 보이죠.  


  억눌러져 있다는 사실도 어느새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당신은 과연 언제 다시 피가 끓어오르는가라고 툭 던지는 듯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수많은 일들에 파묻혀 지내다가도 문득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볼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들을 슬쩍 미소 짓게 하는 그것이 과연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거죠.  그게 꼭 굳이 이 영화 속에서 정말 놀랍도록 생생히 담아낸 그 화려한 익스트림 스포츠 장면들이어야 하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높은 파도 속으로 사라져 갔던 '자유로운 영혼' 보디(패트릭 스웨이지)의 대사처럼 우리 대다수는 어쩌면 이미 세상의 노예, 영혼 없는 껍데기와 같은 일상을 혹시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또 반면에 말입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제각각 가슴속에 늘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일 테죠.  우린 단지 그걸 꽁꽁 '봉인'하며 지내오는 게 이렇게 굉장히, 익숙해져 버린 것뿐이에요.





  











      "좋아하는 걸 하다 죽는 건, 비극일 수 없어."





  도전, 모험, 자유, 열정 그리고 환희.

  신입사원 연수나 정신교육 같은 시간들에 단골로 등장하는 구호들.  보편적으로 꿈꾸며 이야기하는 가치지만 적어도 지금의 일상과 그리 가까이 닿아있단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아니, 사실은 이렇게 떠올리며 입으로 말해본지도 오래된 그런 느낌이네요.  

이 영화 '폭풍속으로'를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했던 그 까마득한 시절엔 모든 것들이 명확히 보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옳고 그름, 좋은 것들과 싫은 것들, 하고 싶은 일들과 하고 싶지 않은 일들... 그렇게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들을 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거라 봤을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 펼쳐진 날들엔 가슴을 벅차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그런 일들이 훨씬 더 많을 거라 생각했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그때 바라본 세상과 삶은 푸른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보였지만... 글쎄요,  지금은 회색빛 세상 속에서 간혹 찾아오며 환한 빛깔들로 스쳐가는 행복의 '찰나'를 찾는 그런 느낌?  그 까까머리 시절의 제가 '순진' 했던 건지, 아니면 지금의 제가 좀 적잖이 닳고 닳은 '속물'이 되어버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쪽일까요.


  달리 생각해보면, 폼나게 파도를 가르며 서핑을 하거나 창공을 가르며 스카이 다이빙을 해보진 못했어도 처음 경험하고 겪으면서 깨치고 부딪쳐 왔던 인생의 매 순간들이 그 자체로 '익스트림 스포츠' 였던 거 같아요.  버티고 살아남기 위해서 마치 정글과 같은 인간관계, 세상살이를 '정신줄' 잡고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고 있죠.  그렇게 보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이미 거칠고 험한 파도 위에서 제각각의 방식으로 위태로운 파도타기를 하고 있는 존재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이렇게 '익스트림' 했어요.  어떨 땐, 낙하산도 없이 창공에 휙 혼자 내던져지는 그런 느낌도 들었던 거 같습니다.  아주 그냥 피가 끓고 심장이 쿵쾅쿵쾅 해지죠.  매달 뺑이치고 월급통장에 들어와 찍히는 그 쥐꼬리 같은 '숫자'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휘리릭 이리저리 순삭 되는 그 순간 역시도 정말 심장이 터지도록 짜릿한 경험 아닌가요?


  내년 이맘때, 상급기관의 그 노안 있는 '높으신' 분께서 다시 왕림하셔서 상큼하게 또 진상을 부려주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아드레날린 솟구치는 '갑을 놀이' 역시도 흥미진진한 '익스트림 스포츠'로 여겨 볼게요.  아니면 아예 그 골치 아픈 서류들을 옆으로 확 제쳐두고 함께 옷 갈아입고 광안리 앞바다로 달려가 진짜 서핑이나 같이 해보면 어떨지, 꼭 물어봐야겠습니다 내년엔.

혹시, 서핑해보셨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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