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긴 어게인'중 애덤 리바인의 'Lost Stars'
관중이 꽉 들어찬 어두운 콘서트장 환한 무대 위.
수수한 차림의 한 남자가 이제 막 노래를 부르려 하고 있어요. 잔잔한 기타 반주와 감미로운 허밍으로 시작되는 그 노래의 제목은 'Lost Stars'. 그 노래는, 무대 아래에서 그 남자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가 작곡해 건넸던 오래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 서로 가장 사랑했던 대학 시절, 오직 두 사람만의 곡이었죠. 어두운 밤하늘에서 길을 잃은 별들로 비유된 청춘의 이야기들을 담은 그 감미로운 멜로디에... 관중들 모두가 서서히 그에게 빠져드는 듯했어요. 몇 번쯤 옆을 돌아보는 무대 위 남자와 눈이 마주친 '그녀'도 환한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객석의 모든 사람들이 눈을 감고 자연스레 몸을 흔들게 될 때쯤, 나지막이 읊조리듯 시작되었던 이 노래도 서서히 화려하게 바뀌어 갑니다. 그녀가 처음 선물했던 이곡의 잔잔함이 빠른 비트와 현란한 기교, 덧붙여진 세션들로 인해 더 '풍성'해지는 듯했어요. 감미로우면서도 열정적인 그 남자의 목소리로 듣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 부분은 살짝 소름이 끼칠 정도로 뭉클하기도 하죠.
하지만 막상 환한 미소로 그 노래를 듣고 있던 '그녀'의 표정에선 그때쯤부터 웃음끼가 점점 사라져 갑니다. 화려하게 뒤바꾼 그 '둘만의 곡'을 신들린 듯 부르는 남자의 모습과, 그 무대 밑에서 그와 함께 노래에 흠뻑 빠져 있는 관객들의 모습을 한동안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윽고 한줄기 눈물과 함께 살짝 고개를 끄덕거려요. 그리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나고 맙니다. 그녀가 가고 없는 빈자리를 얼핏 돌아보는 남자의 씁쓸한 표정과, 공연장을 나선 후 자전거로 밤거리를 달리는 '그녀'가 살짝 미소 짓는 장면이 함께 이 노래 'Lost Stras'와 함께, 그렇게 오버랩되죠.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었습니다. 처음 그 엔딩을 봤을 때.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엔딩의 공연장 씬만을 먼저 봤었어요. 꽤 여러 번. 애초에 극장 관람을 놓쳤었고 Maroon5의 보컬인 애덤 리바인이 직접 출연해 영화 속에서 불렀다는 그 곡, 'Lost Stars' 부분만을 미리 찾아본 거죠. 앞에서 묘사한 것과 같이 둘만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자작곡을 부르는 남자와 그 모습을 무대 아래서 환한 미소로 지켜보는 여자의 이후 장면은... 당연히 전형적인 음악영화, 그리고 로맨스 영화의 공식을 따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노래를 마친 남자가 여자에게 걸어 내려와 뜨겁게 그녀를 안아주거나, 아니면 그녀가 수줍게 무대에 올라 함께 멋진 듀엣을 완성시키는 그런 로맨틱한 장면.
그러나 영화의 이 결말은 그런 당연한 '로맨틱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콘서트장 가득 울려 퍼지는 그 '둘만의' 노래가 절정에 이르고 뜨거운 환호로 그 남자와 수많은 관객들이 하나가 되는 그 화려한 순간에, 여자는 무표정하게 그곳을 떠나죠. 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뭘까, 저 장면의 의미는 대체 뭘지 엄청 궁금했었어요. 어젯밤 퇴근길 차 안 라디오에서 이 노래 'Lost Stars'를 우연히 다시 듣고 이 장면이 오랜만에 다시 떠올랐습니다. 다시 처음부터 차분히 감상해보고 싶었어요. 늦은 밤 어두운 거실에서 다시 지켜본 이 작품은 그렇게, 왠지 예전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넌 홀로 지하철을 기다리지. 네 인생을 옆에 놓인 가방에 담고서
어떤 음악을 듣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되거든
2014년 8월. 천칠백만 관객수를 향해 달려가던 한국영화 <명량>과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 그해 여름 극장가를 독식하고 있을 무렵, 막상 수입사조차도 홍보를 많이 하지 않았던 작은 음악영화 하나가 있었습니다. 마블의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이 시기에 함께 개봉된 두 쌍끌이 한국영화의 극장 독점에 빌빌대고 있던 상황이었으니 그 틈새에 낀 이 음악영화는 오죽했을까요. 상영시간대도 평일 오전 한두어 번, 아니면 거의 자정에 가까운 시간대뿐이었습니다. 개봉 초기 미미했던 관람객 수 때문에 곧 산소 호흡기를 떼리라 생각했던 이 작품은...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상영관과 관람객이 늘어났어요. 감상한 이들의 입소문과 감상평들로 인해 9월 들어 전국 관객 200만명, 10월엔 300만명을 훌쩍 넘어섰죠. 급기야 가을까지 상영이 꾸준히 이어져 국내에서만 최종 342만의 흥행집계를 이뤄냈습니다. 흥행수입으로만 보면 오히려 미국을 제치고 우리나라에서 더 많은 수익이 난 작품이에요.
유독 한국에서 더 사랑받았던 이 영화 <비긴 어게인>(Begin Again)의 감독은 아일랜드 출신의 존 카니였습니다. 2006년, 아일랜드 영화위원회에서 지원받은 단돈 1억5천만원으로 인디 음악영화 <원스>(Once)를 만들어내 세상에 내보였던 그 사람이죠. 황량한 초겨울의 아일랜드 더블린 시내 길거리, 그곳에서 노래를 부르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와 힘든 이민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의 만남과 헤어짐을 담담하지만 깊이 있는 영상과 음악으로 담아냈던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두 남녀 주인공이 불렀던 듀엣곡 'Falling Slowly'는 지금도 손꼽히는 불후의 명곡이기도 해요. 그 화제의 영화 <원스>의 뒤를 잇는 존 카니 감독의 새로운 음악영화라는 점에서 이 작품 <비긴 어게인>은 의외로 국내에서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그 관심들이, 열악한 개봉 조건에도 불구하고 극장을 찾는 발길로 꾸준히 이어졌고 무성해지는 입소문들이 더해져 '의외의' 흥행 결과로 귀결된 거였죠.
스토리 라인 자체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대중성보다는 음악의 '진정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가 미국 메이저 음반사와 계약을 맺은 잘나가는 연인 데이브(애덤 리바인)를 따라 뉴욕으로 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담고 있어요. 서로 환경이 달라져버린 연인의 배신, 그리고 비슷한 상처를 가진 구세주의 등장, 홀로서기, 그 과정에서 보이는 알듯말듯한 '썸', 그리고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라는 흐름으로 정리해보면 살짝 전형적이기까지 하죠. 물론 초반부 라이브 선술집에서 그레타와 댄(마크 러팔로)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공연 장면, 두 사람이 뉴욕 거리 곳곳에서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자신들만의 음반을 만들어가던 장면들에선 '음악영화'만이 주는 카타르시스를 맘껏 느껴볼 수 있습니다. 존 카니 감독의 음악적 감각과 배우들의 재능이 합쳐져 빛을 발하는 그런 순간들이 분명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의 감상들에선 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원스>만큼의 감흥을 주지 못한다고 느꼈던 건지 궁금했습니다. 거칠고 투박했던 <원스>가 이름 모를 국도변 시골 식당에서 우연히 발견한 눈물 날 정도로 맛있는 한정식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 <비긴 어게인>은 마치 고급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에서 큰 감흥 없이 무난히 골라 먹는 세트 메뉴와 같단 느낌이었죠.
하지만 지금의 느낌은 예전과 좀 다르군요. 아니, 확연히 달라요. 우연히 다시 듣게 된 그 곡 'Lost Stars' 덕분에 몇 년 만에 홀로 우두커니 앉아 지켜본 이 영화 <비긴 어게인>은 그저 한 여성의 사랑과 헤어짐, 그 자체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었던 거죠. 물론 그 '로맨스' 코드만으로도 이미 썩 괜찮은 작품임에는 이견이 없습니다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이 작품은 좀 더 폭넓은 영역의 감정들을 아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평범한 로맨스 영화로만 바라보고 그치기에는 그 콘서트장 엔딩씬의 여운이 정말 매력적인 그런 작품인 겁니다.
음악이 좋은 건 말입니다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하는 거니까요
평범한 것들을 빛나게 만드는 것,
그게 음악인 거죠
주인공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스스로 충분히 재능 있고 매력적인 싱어송라이터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인기 대중가수로 커가는 연인의 부수적 존재에 그치고 있었죠. 오로지 그의 그늘 안에서만. 그 연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뒤에도 뛰어난 재능을 대중 앞에 드러내기를 꺼린 채 그냥 쓸쓸히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음악'으로 교감을 나눈 연인을 잃었으니 그 '음악'도 자신에겐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걸까요. 그러던 와중에 자신의 숨은 진가를 알아보고 끈질기게 러브콜을 해오는 한때 꽤 잘 나가던 퇴물 음반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을 만나게 되는 스토리였던 거죠. 이후의 내용들은 쉽게 예상되는 바와 같습니다. 딱 그대로예요. 상처 받은 두 남녀가 '음악'을 매개체로 서로를 치유해 가는 과정.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소, 의외의 누군가로부터 느끼게 되는 교감으로 왠지 모를 묘한 기류가 관객에게도 전해질 때쯤 떠나간 옛 연인이 다시 둘 사이에 나타나 형성되는 삼각구도. 이 작품의 이후 흐름이 만약 이렇게 흔히 예상되는 스토리로만 마무리 되었다면... 이 영화의 갈등 구조가 통속적으로는 좀 더 흥미롭고 드라마틱해졌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하고 담백하게 세 남녀의 미세한 감정선을 마치 스며들듯 넘나들어요. 혹시 서로 덥석 끌어안고 키스하게 될까 봐 조마조마했던 그레타의 댄의 관계 묘사도, 넌지시 미소 지으며 서로의 선을 지켰던 <원스>의 그와 그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훌륭한 음악적 파트너이기도 했던 옛 연인 데이브(애덤 리바인)와의 재회, 그리고 이어진 엔딩의 공연장 씬도 그런 면에서 결코 도식적이지 않죠. 왜 헤어졌는가, 왜 다시 끌리는가, 왜 결국 다시 맺어질 순 없는가라는 그 '로맨스'적 코드들이 이 작품에선 의외로 그다지 중요하진 않아 보이거든요.
주인공 그레타는 대체 왜, 둘만의 노래를 다시 부르던 옛 연인의 무대에서 그렇게 뛰쳐나왔던 걸까요. 자신이 줬던 원곡을 끝내 싫어하는 스타일로 편곡해 부르는 모습에 완전한 끝을 직감하고 뛰쳐나왔다는 해석이 일반적으로 보이지만... 그건 여전히 그녀를 부수적인 존재로만 국한시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저 썸이 다시 타지느냐 아니냐'에 따른 그런 차원의 문제라기보단 어쩌면 그녀 안의 더 큰 '관점의 변화'를 의미한다고 봤어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음악에 대한 선택의 주체로서. 그런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자면 결국 그 공연장 엔딩 장면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건 실연의 아픔이나 슬픔이 아니라 진정한 '홀로서기'를 결심하는 한 여성의 내면적 자각이었습니다. 끝이 난 것에 결코 뒤돌아보지 않고 오롯이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만 바라보고 걸어가기. 그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돌아올 그 남자'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직접 만들어갈 '음악'이라는 그 사실을 말이에요. 맞습니다. 그녀 스스로만 내도록 모르고 있었어요.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란 걸.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가득히 그 곡 'Lost Stars'가 흐릅니다. 항상 지나치던 똑같은 그 밤길 풍경이 왠지 어딘가 달라 보여서 가슴이 좀 들떴었죠. 분명히 이 영화, 가슴을 설레게 하는 몇 곡의 음악들, 특히 데이브 역의 애덤 리바인이 직접 부르는 그 노래를 빼면 특별히 각인될만한 감흥이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홀로 된 이들의 모습으로 시작해 어쩌면 다시 그들이 혼자가 되는 모습으로 끝나는 영화. 근데 이젠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이 더 각별하게 느껴져요. 그 노래를 빼면 아무것도 없는 영화가 아니라 그 노래로 인해 직접 보여주지 않은 미세한 감정들의 여백을 더 빽빽이 채워주는 느낌.
한동안은 말입니다, 쭉, 어두운 밤바다 대교 위를 혼자서 차를 몰아오며 매일 이 노래를 들을 거 같아요.
이렇게 계속 반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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