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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프 Sep 20. 2020

우리 모두와 똑 닮은 그녀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내가 젊었을 땐 아무도 필요 없었지

                     사랑을 한다는 건

                 그저 재미있는 놀이였어

                      그 시절은 갔네

                  혼자 외롭게 되긴 싫어

               더 이상은 혼자이고 싶지 않아



                                 - 'All By Myself' 가사 중에서


 

 

 빨리 시집이나 가라며 들볶아대는 엄마의 잔소리도 가뜩이나 지겨운데, 만나보라며 소개받은 무뚝뚝해 보이는 그 이혼남은 골초에 술주정뱅이, 거기다 아줌마처럼 옷 입는 여자라고 브리짓을 욕했어요.  그러는 자기는 고리타분한 녹색 루돌프 사슴 스웨터나 입고 있는 주제에.




  변변한 애인 하나 없이 나날이 늘어가는 주량과 몸무게에... 일에 대한 자신감도, 몸매도, 사랑과 자존감마저도 바닥을 치고 있는 서른두 살의 노처녀 브리짓 존스는 오늘 밤도 셀린 디온의 명곡 '오빠 만세'(All BY Mtself)의 애절한 가사에 이렇게 또 빠져 듭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빨간 수면 잠옷과 회색 수면 양말을 신은 채로 홀로 청승맞게 말이죠.  이렇게 감정을 실어 처절하게 그 노래를 온몸으로 불러보면, 내일은 오늘과 달리 뭔가 좀 특별한 일이 생길까요?   


  평범한 외모에다 평범한 직장, 평범한 일상들.  

  그 속에서 멋진 자신의 모습과 멋진 사랑을 꿈꾸던 브리짓이 두 남자 사이에서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는 웰메이드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특히 주인공 브리짓 존스와 비슷한 연령대였던 20대, 30대 싱글 여성들의 속마음들을 대변해주는 재치 있고 노골적이기까지 한 대사들, 그리고 깨알 같은 에피소드들로 전 세계적으로 2억 8000만 달러의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작품이죠.

심지어 그 여세를 몰아 2004년도엔 2편 '브리짓 존스의 일기-열정과 애정'이,  2016년도엔 3편 '브리짓 존스의 베이비'까지 제작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시리즈 중 역시 마스터피스는 2001년도 작품인 이 1편이었습니다.  살짝 '푼수'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 '푼수'끼로 더 사랑스럽고 귀여웠던 브리짓 존스의 모습으로 본다면 더욱 그러했었죠.





         

  

  








  로맨틱 코미디 명가 '워킹 타이틀'의 2001년 개봉작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영국 요크셔 출신의 작가 헬렌 필딩이 런던 인디펜던트 신문에 30대 독신여성의 일상을 주제로 썼던 일기 형식의 소설을 그 원작으로 하고 있어요.  동시대 여성들의 일상, 고민, 욕망, 자의식들을 진솔하게 담아냈던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영국 내에서만 1년 이상 베스트셀러에 올랐습니다.  주인공이었던 브리짓 존스는 그로 인해 영화 제작 이전부터 이미 당시 독신 여성의 대표적 상징이자 아이콘이 되어 있던 상태였죠.  


  더욱 주목을 끌었던 사실은 이 원작 소설이 기본적으로 줄거리, 등장인물들의 설정, 심지어 캐릭터 이름에 이르기까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을 현대적으로 오마쥬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BBC 드라마 판 '오만과 편견'에서 남자 주인공 마크 다아시 역을 맡아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 콜린 퍼스를 이 영화 속에서 같은 극 중 이름으로 연기하게 한건 굉장히 유명한 일화이기도 해요.

'오만과 편견'에서는 19세기, 이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는 21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노처녀이자 독신여성의 삶을 대표하는 각각의 두 여주인공이 삶, 사랑, 결혼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 어떤 차이점을 보이는지에 대해 관찰해보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아, 물론 처음엔 비호감의 포쓰를 강력히 내뿜고 있는 캐릭터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츤데레의 속 깊은 매력을 보여주며 극호감형으로 거듭나는 각 소설 속의 두 남자 주인공 캐릭터 '마크 다아시'를 비교해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는 감상법이 될 거예요.






       








  원작자 헬렌 필딩과 공동으로 각색에 참여했던 로맨틱 코미디의 귀재 리처드 커티스, 그리고 원작자의 절친이자 극 중 브리짓 존스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던 여성 감독 샤론 맥과이어의 연출이 이 작품의 성공에 큰 몫을 차지했지만... 뭐니뭐니해도 주요 캐릭터들을 연기했던 배우 3인방의 앙상블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주인공 브리짓 존스(르네 젤위거)와 그녀를 둘러싼 두 남자 다니엘 클리버(휴 그랜트)와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


  재수 없는 직장 상사이지만 유능하고 매력적인 '나쁜 남자' 다니엘 역할은 당시 주로 살짝 꺼벙(?)한 듯 순수한 캐릭터들을 연기했던 휴 그랜트가 훌륭한 이미지 변신을 보여줬습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면 여성들이 심쿵하는지를 잘 아는 '선수'지만 거의 병적일 정도의 여성 편력으로 인해 살짝 섹스 중독에 가까운 그런 캐릭터였죠.  반면에 거지 같았던 첫 만남의 나쁜 인상과는 달리 극이 진행될수록 속 깊은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 '착한 남자' 마크 다아시 역할은 콜린 퍼스가 맡았었습니다.  여심을 순간 매혹시키는 현란한 언변이나 테크닉은 거의 없는 무뚝뚝한 성격이지만 언제나 한결같이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지켜주는 그 모습에 극 중 브리짓 존스뿐 아니라 당시 영화를 감상했던 많은 여성들이 심장을 부여잡아야 하기도 했어요.


  자, 주인공 브리짓 존스 캐릭터만큼이나 그 자체로 이제 이 시리즈의 상징이 되어버린 배우 르네 젤위거를 빼놓고 이 작품을 얘기할 순 없겠죠.  영국인이 아니면서도 정말 능청스럽게 영국인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녀는 사실 미국 텍사스 출신입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전형적인 블론드 미녀의 요건을 갖춘듯하지만 내로라하는 미모의 할리우드 여배우들 사이에선 살아남기 힘들겠단 얘기를 들을 정도로 좀 예쁘장한 '일반인' 같은... 그런 느낌이었죠.  

하지만 자신의 원래 몸무게에서 무려 12킬로를 더 찌우고, 기존 로맨틱 코미디 속 여주인공들의 전형적 이미지와는 많이 동떨어진 털털하고 직선적인 캐릭터 '브리짓 존스' 역할을 실로 200% 완성해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몸매와 관심사들을 가지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 그 자체였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이 잘 안 가는 특유의 매력적인 표정 연기와 허스키하면서도 속삭이는듯한 신비한(?) 목소리, 그리고 여배우로서의 망가짐도 개의치 않는 이 작품 속 연기로 인해 그녀는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2002년)에서 당당히 여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죠.  아쉽게도 그 해엔 '몬스터 볼'에 출연했던 할리 베리에게 수상의 영광을 양보해야 했지만 2년 뒤 2004년 제76회 아카데미에서 '콜드 마운틴'으로 기어이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습니다.  






개싸움인가

             








  사실 오래전 이 영화를 처음 감상했을 때는 정말 솔직히 말해서 잘 공감이 되지 않았답니다.  배우 르네 젤위거의 후광효과를 걷어내고 그 캐릭터로만 놓고 생각해본다면 왜 매력적인 출판사 사장과 파워 있는 인권 변호사 두 훈남들이 동시에 저렇게 목을 매다는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브리짓이 남몰래 일기로 적으며 고민하고 있던 몸무게, 주량, 연애와 성, 그리고 잡다한 뒷담화들과는 별개로 '감정'이란 건, 특히 '사랑' 이란 건 정말 도저히 알 수 없는 거잖아요.  모두가 겪어 보듯이.  

'그래서'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게 일반적이지만, 엉뚱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한 두 눈에 콩깍지가 씌어지듯 사랑에 덜컥 빠지기도 하는게 사실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그 사람의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만 보이는 그것, 내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그것을... 서로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들. 


  늘씬하고 예쁘고 세련되고 청순하기까지 해야 하는, 일반적인 대중매체에서 보여주는 정형화된 '여성'의 이미지로 본다면 영화 속 노처녀 브리짓 존스는 어떤가요.  눈치 없는 민폐에다 덜렁대는 사고뭉치, 거기다 '브라질 영토만한' 엉덩이를 가진 주책바가지로도 보일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우리 '남성'들도 그런 시선들에서 그리 자유로울 수만은 없잖아요?  

생각해보면 세상 어느 곳에서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는 모두, 보이고 싶은 스스로의 이상적인 모습과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현실적 실체와의 현격한 괴리로 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계평화, 인류공영과 같은 숭고한 가치들이나 철학적 고민들로도 '간혹' 사유에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가 남몰래 빠져 있는 고민과 관심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브리짓 존스의 그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극히 '세속적인' 차원의 것들이니까요.  그녀가 집요하게 칼로리를 따지며 다이어트에 열중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남성들 또한 비슷한(어쩌면 같은) 이유들 때문에 역기와 아령을 들고 팥죽 같은 땀을 매일 흘리고, 때론... 종종 목욕탕에서 다른 남자들의 '그것'을 슬쩍 아래로 훔쳐보며 알 수 없는 패배감(?)이나 우월감(?)에 젖기도 하지 않나요.


  영화 속 브리짓 존스는 우리(특히 남성들)와 전혀 다르지도, 유별나지도 않았습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이런저런 것들에 치이며 살아가고 그 속에서 소소하게 결심하고 매번 후회하고 또다시 결심하며 서서히 무뎌지기도 하는 그런 삶.  그 속에서, 그런 그대로의 내 모습마저도 '사랑'해주는 누군가를 서로 찾아가는 과정 속에 쭉 있어왔던 거죠.  독신 여성과 노처녀만을 대표하는 이야기?  아니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그래서 평범한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와 똑 닮은, 그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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