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작은 여행

걷기

by 별들의강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새로운 시작 앞에서는 언제나 낯섦과 불안, 기대와 희망이 뒤섞인다. 그 미묘한 떨림이 마음을 스치면, 평범했던 하루도 특별하게 빛난다. 여행을 준비할 때가 꼭 그렇다. 나는 거창한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지도, 먼 나라를 찾지도 않는다. 그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하루짜리 여행으로도 충분하다. 작은 여행일지라도 낯선 길에 발을 딛는 순간, 일상의 풍경이 다르게 보이고 그 낯섦 속에서 나는 조금 다른 내가 된다.


그래서일 것이다. 여행이야말로 행복에 가장 가까운 활동이라 믿는다.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만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잠시 방향을 바꾸어 걷기만 해도, 삶의 무게가 달라지고 마음의 리듬이 달라진다. 그 믿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번엔 강과 호수와 숲길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서해랑길 53코스. 일상의 가장자리를 걷듯 그 길 위에서, 나는 바람이 이끄는 쪽으로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길이 19.7km, 약 여섯 시간 반의 평지길. 군산 대야면에서 옥산면으로 이어지는 이 길은 걷는 이의 리듬에 따라 하루의 길이도 달라진다. 이번 여정에는 작은 임무가 하나 더해졌다. 코리아 둘레길 지킴이. 풍경을 감상하며 사색에 젖던 여행과 달리, 이번엔 길의 표지와 리본, 안내판, 그리고 사람들의 발자취에 집중했다. 그렇게 여행은 단순한 ‘이동’에서 ‘지킴’으로, 나 하나의 행복에서 ‘함께 걷는 행복’으로 변해갔다. 그 마음을 품고 길을 나섰다.


벌써부터 따가워진 5월의 초입, 햇살 아래 40분을 기다리니 36번 버스가 들어온다. 결코 서두르지 않겠다는 듯 엉금엉금 다가서는 버스에 올라서니 기사님이 ‘널 사랑하겠어’라는 곡을 들으며 흥얼거린다. 나도 속으로 따라 한다. 나도 널 사랑하겠어 언제까지나… 지금 이 순간처럼…. 노래가 창문을 타고 햇살 속으로 번졌다. 그러자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이 노래가 하나의 신호처럼 읽힌다. 그래, 사랑하자. 사람도, 삶도, 무거운 운명도.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고통까지.


버스는 어느새 도시의 경계를 벗어났다. 과속방지턱에서 몇 번을 튀어 오르던 버스가 무사히 신촌마을에 도착했다. 색깔과 냄새부터 달랐다. 도시 밖으로 조금만 나와도 공기가 달라진다. 눈은 부드러운 초록에 잠기고, 코끝엔 한가로운 흙냄새가 스며든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멘트로 세워진 새창이 다리가 53코스의 시점이다. 이 다리를 건너가면 서해랑길 52코스로 이어진다. 다리를 건너갔다 올까 잠시 망설였지만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오늘 중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오늘의 임무는 이곳, 53코스다. 길지킴이로서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바람이 이끄는 쪽으로, 조용히.


시점 안내판을 원거리와 근거리에서 찍고, 지킴이 활동을 인증하는 샷도 추가했다. 이제 본격적인 활동이다. 그런데 그만 일이 터졌다. 앞으로 뻥 뚫린 시원한 길에 매혹되어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빨려들 듯 걸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가도 길 안내 리본이 보이지 않았다. 화살표 안내사인은 있지만 리본이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참을 더 걸었다. 약 7km, 두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나아가서는 안 된다. 이제 그만, 돌아서야 한다.


사인(sign). 길을 안내하는 신호. 나는 그것을 놓쳤다. 한참을 걸은 뒤에야 그 사실을 알아차렸고, 결국 멈춰야 했다. 왔던 길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내 시선을 붙잡으려 애썼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들. 그로부터 시작된 다른 길, 다른 여행, 그리고 뜻밖의 만남. 인생에서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중요한 시점마다 내게 길을 제시하며 무언가를 말하려는 사인들이 있었다. <연금술사>에서 산티아고가 찾아 나선 보물을 가리키던 사인, 읽어내야 할 바로 그 표지처럼 말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표지(標識)를 따라가야 한다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사인을 찾기 위해 시점으로 돌아왔다. 찬찬히 살펴보니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그 리본을 따라 걸었다. 아까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진다. 거의 아이 레벨(eye level) 높이에서 잔잔히 일렁이는 만경강의 물길, 주변을 꽉 채워 나가는 초록의 풀과 나무들, 그리고 거침없이 솟구치는 듯 앞으로 뻥 뚫린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좋은 길이 선물하는 특별한 순간들이다. 이 길에서만큼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리본을 새로 다는 대신, 색이 바랜 것과 나무에 조여든 리본만 새것으로 바꿔 주었다. 새 리본은 이제 도보 여행자를 위한 응원의 깃발, 그리고 이 길로 들어서라 손짓하는 초대의 춤사위가 될 것이다.


만경강 코스가 끝나자 회현면의 논길이 이어진다. 청보리가 푸르게 익어가고, 논길은 양옆으로 넓게 펼쳐지며 여행자의 가슴을 열어준다. “자유로움이란 이런 거야.” 들판이 그렇게 속삭인다.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한치의 굴레나 억압도 없이, 이 우주 한가운데 그저 있는 그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시간. 쓸쓸하면서도 고요한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어느덧 오후 네 시가 한참을 지났다. 그런데 코스의 절반 밖에 가지 못했다. 리본을 교체하고 풍경을 감상하며 걷다 보니 간식 먹을 여유도 없었다. 배가 슬슬 고파질 무렵, 하나로 마트 간판이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눈에 들어왔다. 시원함이 간절했다. 사이다 하나, 보름달빵 하나, 생수 하나. 마트 옆 공터에 서서 후다닥 먹어 치웠다. 그리고 곧장 후회했다. 마트를 빠져나오니 바로 앞에 중화요릿집이 있었던 것이다. (근처에는 꽤 유명한 백반집도 있다.)


아담하고 산뜻한 회현초등학교를 벗어나자 곧 청암산 주차장이 나타났다. 드디어 청암산 수변로 코스의 시작이다. 오늘 가장 기대한 구간이다. 그런데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막상 수변로에 접어드니 리본도, 화살표도, 그 어떤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갈림길마다 멈칫거렸고, 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초조와 불안, 그리고 “아~”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숲길을 헤매었다. 걸어야 할 길이 한참 남았는데,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했다. 조용한 숲 속에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자 높다란 대나무와 커다란 왕버드나무가 괜스레 더 사납게 느껴졌다. 그래서 몇 군데 지점에만 리본을 달고, 서둘러 호수를 빠져나왔다.


결국 하루가 지난 뒤, 다시 군산호수를 찾았다. 이번에는 우회로를 따라 걸으며 호수가 주는 아름다움과 청암산이 주는 맑음을 천천히 느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입구 이외에 어떤 표식도 없던 이유를. 아마 이곳은, 잠시 길을 잃어도 좋다는 무언의 사인이 아니었을까. 그저 이곳에 잠시 머물라는 — 조용한 사인.


청암산을 빠져나와 다시 길게 이어진 논길을 걸었다. 차들의 왕래가 잦아지고, 아파트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외당마을 버스정류장. 53코스의 종점이다. 이곳에 이르기까지 길 위에서 보낸 아홉 시간이 오늘 여행의 고단함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마음은 묘하게 가벼웠다. 강변길, 숲길, 논길, 호수길을 한꺼번에 거닐며 새로운 길을 걸었다는 만족, 다른 여행자를 위해 길 위에 작은 표식을 남겼다는 뿌듯함, 신호를 놓쳐 헤맨 시간의 의미까지.


오늘 하루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보고, 느끼고, 배운 날이었다. 길을 걷는다는 건, 바로 그것을 읽는 일이다.



2024.05.04 기록.png 서해랑길 53코스의 기본 개요는 "길이 19.7km, 소요 시간 6시간 30분" 이다.





*이 글은 2장의 첫 번째 꼭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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