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 머무르기와 벗어나기 사이에서

낭만

by 별들의강


5월 11일 토요일, 서해랑길 지킴이 두 번째 활동날이다. 화창하던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저녁무렵에는 비까지 내렸다. 이번 활동은 서해랑길 54코스에서 정방향(외동마을 버스정류장 → 진포해양공원)으로 진행했다. 걸으며 안내사인(리본/화살표)을 정비하고, 길에 이상은 없는지 점검한다. 길의 안전성과 편의성, 쾌적성을 정기적으로 살피는 것이 지킴이의 일이다.


여행 가이드에는 54코스가 ‘11.6km에 4시간 소요, 난이도 보통’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코스만을 훑는 일은 이 길의 진짜 아름다움을 놓치게 한다. 시간과 비용을 써 가며 여행 가이드의 틀만 따라가는 것이 과연 여행일까. 도보 여행자라면 이 딱딱한 정보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감각을 끌어내야 한다. 여행의 묘미는 언제나 새로움에 있기 때문이다.


서해랑길 54코스 '숲길'은 현재 공사중으로 통제 상태. 길은 곧 열린다.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그 길에서 얼마나 머무를 것인가.

둘째, 그 길로부터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가.


무엇을 선택하든 이 단어에서 자유롭기 어려워 보인다. 바로, 낭만이다.

사람들은 낭만적이다 느끼면 머무를 것이고, 낭만을 찾아 길을 벗어날 것이다.


낭만이란 ‘현실에 매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여기서 현실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일상의 틀에서 잠시 떨어져 나오는 감각을 뜻한다. 어떤 요구에도 쫓기지 않고, 걷고 싶은 속도로 걷고, 보고 싶은 만큼 머물고, 나만의 리듬을 다시 찾는 순간. 이것이 낭만의 본질이다.


낭만은 또한 ‘감상적·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 한다. 이는 사물을 감정과 서사로 바라보는 시선, 즉 현실의 표면을 넘어 그 이면의 의미와 상징을 발견해내는 상상력이다. 그래서 낭만은 도피가 아니라, 사물을 깊이 있게 다시 읽는 능력에 가깝다.


결국 낭만은 현실에서 잠시 거리를 둔 곳에서 피어나는 감정과 경험이다. 어떤 굴레에 갇혀 구속되거나 속박되거나 굴복하지 않는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 낭만이다. 평소라면 이런 경험을 얻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감각은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회복될 수 있으니, 코리아 둘레길 전체가 ‘낭만 코스’라 할 수 있다. 54코스는 그 한복판에 있다.


54코스는 두 개의 호수와 숲길, 근대(近代) 역사의 거리를 지난다. 화려하진 않지만, 걷는 이에게 조용한 울림을 준다. 은파호수와 월명호수를 지나며 마음이 가라앉고, 호젓한 숲길과 산림욕장에서 깊어진 숨을 느끼게 된다. 월명공원을 지나며 3·1운동 발상지 동상을 바라보면, 그저 지나치려던 발걸음도 잠시 멈추게 만든다.


초원사진관에 들르거나 수시탑 근처 한 벤치에 앉으면 영화 속 주인공이 품은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54코스 종점 근처의 장미공연장 주변에 놓인 초봉(소설 ‘탁류’의 인물) 동상을 발견하면, 어느새 마음 속에서 소설의 한 장면이 열리기도 한다. 원도심으로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탁류길이 펼쳐지고, 일제강점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애환이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낭만을 조금 더 특별하게 느끼고 싶다면 동백대교 아래 도선장을 추천한다. 지금은 사라진 포장마차를 추억하며 시커먼 파도에게 “바다야, 너도 한잔 할래?”(안도현의 시, 숭어 회 한 접시)하고 소주잔을 들어도 좋을 것이다.


이 모두는 따지고 보면 그저 평범한 풍경이고 일상의 장면이다. 그러나 군산이라는 장소는, 그 평범함에 특별한 온기를 더한다. 이곳에서만 작동하는 묘한 마법 같은 힘 때문일까. 평범한 풍경이 감성으로, 감성이 새로움으로 바뀌는 경험이 찾아온다. 그래서 도보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많지 않다. 약간의 여유, 잠시의 방황, 그리고 과감한 방향 전환이면 충분하다.


여행이란 다른 사람의 후기를 순례하듯 따라가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후기에 없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게 뭐냐고? 그것은 결국 ‘자기만의 낭만’에서 비롯된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시들지도 꺼지지도 않을 마음 속 불꽃 같은 바로 그것. 그 낭만을 품고 걸어보자.


그럼에도 먼 훗날 어느 순간, ‘가슴 한 곳이 비어 있는 듯한 감상’이 몽글몽글 떠오르거나, 아련하게 스며들지라도, 오늘 이 길에서 느낀 낭만이 내 안에 남아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일 것이다. 그 선물 덕에 여행자 우리는 새로운 감각을 지닌 사람으로 변해간다.


궂은비 내리는 오늘, 또 하나의 감상을 품으며 음악을 튼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 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서해랑길 54코스는 벚꽃 피는 4월이 절정이다.





*이 글은 2장의 두 번째 꼭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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