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꼭지를 고치는 손과 글을 쓰는 마음 사이에서
세면대 밑에 나와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샌다.
똑 똑 똑 똑 똑… 규칙적으로 늦지 않은 속도로 떨어진다.
결국 사람을 불렀다.
모자를 눌러쓴 칠십 가까운 어르신이 쓰윽 들여다보더니
전면 교체를 선언하고 다음 날 오겠다며 휑하니 가버렸다.
다음 날, 그의 손에는 각종 연장이 들어있는 커다란 상자와 수도 배관이 들려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끙끙거리더니
수도꼭지 두 개, 세면대 자동 밸브 하나를 새것으로 말끔히 바꿔 놓았다.
비용은 10만 원을 말씀하신다.
한 시간 정도 일하였고, 앞으로 윗집 아랫집에서 자주 이용할 테니 2만 원만 깎자 했다.
전문가께서는 재료비만 3만 원이고 어제오늘 들어간 시간이 있으니 안된다 하신다.
생각해 보면 아깝지 않은 가격이다. 10만 원을 드렸다.
얼마 전 카카오에서 받은 원고료가 생각났다.
몇 날 몇 시간을 죽어라 생각하고 생각해서 지어낸 글 몇 편의 가격,
그것도 내가 부르는 값이 아니라 독자가 지급한 가치가 18,290원!
내가 생산한 글 하나의 가치 2,613원을 떠올리니… 한숨부터 나왔다.
시급 1만 원 시대에 배관전문가는 10만 원을 가져가고,
컴퓨터에서 자판 두드리는 나의 시급은 약 653원(글 하나 쓰는 평균 시간을 4시간으로 잡음).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여?
게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글쓰기의 생산성을 높이면 달라질까.
평균시간을 줄이고, 인공지능을 옆에 두고 대량생산 시스템을 갖추면 이 게임에 낄 수 있을까.
그날, 마음이 싱숭생숭했던지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인공지능 시대 인간 일자리의 미래라는 글이다.
기자는 세계경제포럼의 4가지 시나리오를 소개하며
이 시나리오의 어떤 것도 인간 일자리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보도한다.
(https://www.hani.co.kr/arti/science/future/1240601.html)
요즘엔 이 정도의 기사, 인공지능에 대한 사회경제적 진단은 차고 넘친다.
어떤 예측은 컴퓨터로 하는 일 전부가 AI로 대체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묻는다.
앞으로도 당신의 일자리는 안녕하시냐고.
뉴스들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일자리와 일은 다르다.
일자리는 일에 자리를 준 것이다.
누가? 지금까지는 회사 거나 국가다.
“여기에 앉아 이 역할을 하라”는 고정된 좌표, 사회적 배치다.
반면, 일은 좌표가 아니라 움직임이다.
생각하기, 만들기, 해석하기, 판단하기…
그래서 일은 자리 없이도 존재하고, 일자리는 사람이 없어도 유지된다.
배관 전문가는 그걸 몸으로 증명한다.
그는 배관 담당자라는 고정된 자리에 있지 않고,
배관 고치는 일을 언제, 어디에서나 하고 있다.
그에게 일자리는 없어도 일은 있다.
그러니 배관 담당자라는 일자리는 사라져도 배관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일자리를 줄일 수는 있어도 일을 없애지는 못한다.
계산, 반복, 생산, 정리의 일은 대신하지만,
의미를 판단하는 일, 방향을 정하는 일, 질문을 만드는 일,
무엇보다도 복잡하고 섬세하고 고된 배관 고치는 일은 대체하기 어렵다.
일자리가 아닌 일 중심의 커리어를 생각하다 보면
글 쓰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지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글 쓰는 일을 하는 사람들(작가들)의 미래 청사진도 분명해진다.
그들은 평균적인 글을 무한히 생산하는 AI와 달라야 할 것이다.
요약, 설명, 정리… 그런 것은 AI의 일이다.
독자의 영혼을 울리는 질문을 던지는 일,
독자의 내면에서 생각이 시작되게 만드는 일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사람들은 인간다운 글을 더 찾게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아니, 그렇게 되지 않으면 곤란하다.
급하게 나가다가 문턱에 부딪혀 파고드는 엄지발가락의 엄청난 통증,
대한(大寒)에 찾아온 영하 십몇 도의 추위에 귀가 떨어질 듯 시리고 손이 꽁꽁 어는 겨울을
AI는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어도 배관 고치는 일과
글 쓰는 일의 시장가가 하늘과 땅차이라는 현실을 돌아보면,
이제라도 배관일을 배워 글을 써야 하나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