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핸디의 <아흔에 바라본 삶>을 읽었다.
갑자기 읽어야 했고, 꼭 읽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2024.12.13)는 소식을 1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의 마지막 메시지라는 생각에 바로 구입했다.
책을 펼치고는 다소 놀랐다.
그가 지금까지 써온 책들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글은 짧았고, 전개는 단순했으며, 기대하던 번뜩이는 통찰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 문장 전반에 힘이 빠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찰스 핸디는 2019년 뇌졸중을 겪은 뒤, 더 이상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는 생각을 말로 풀어내고, 그것을 정리하고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 책을 완성했다.
이 작업은 분명 그를 더 힘들게 했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독자를 향한 애정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더 길게 풀어냈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예전처럼 몸과 생각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고,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 자체가 그에게 주어진 ‘아흔’의 또 다른 과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책이 <아흔에 바라본 삶>이다.
아흔은 특별하다.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렇다.
아흔은 인생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이다.
더 이상 앞을 보지 않아도 좋은 시간이다.
삶이 과제가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되는 순간이며,
가능성이라는 환상이 물러나고, 오히려 삶의 윤곽이 더 또렷해지는 자리다.
우리는 찰스 핸디의 아흔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 전체를 잠시 돌아본다.
이 책을 통해 찰스 핸디가 말하는 '아흔'이 무엇인지
나는 조심스럽게 두 가지 이야기만 뽑아내 보려 한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문장이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저 ‘나는 이렇게 살았다’는 정직한 보고다.
찰스 핸디를 직접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의아해할 수 있겠으나, 그의 글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정직’은 개념이 아니라 태도이며, 그 태도는 그의 문장 곳곳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많은 독자가 그를 신뢰하고 사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경영 사상가, 혹은 사회 철학자라고도 불리지만
그의 글에는 복잡한 이론도, 어려운 개념도 없다.
대신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우연을 통과해 왔는지를 숨기지 않는다.
그 정직한 ‘보고’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꿈과 직업에 관한 이야기다.
바로 이 부분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나는 작가가 되었다.”
이 문장은 많은 사람에게 하나의 롤모델처럼 읽힐 것이다.
너무 쉽게 말하는 듯해 오히려 얄밉게 느껴질 정도다.
그는 이 과정을 인도에 있는 친구의 말로 대신한다.
“잘못 탄 기차가 때론 올바른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어쩔 수 없이 입사한 회사에서 일을 잘하는 방법을 찾다가 발견한 문제점.
그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그는 작가가 되었다.
그 결과, 그는 글을 쓰고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대가로 돈을 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말 그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한 정직한 보고서가 <코끼리와 벼룩>이고 <포트폴리오 인생>이다.
이 모든 작업을 가능하게 한 그의 필살기가 바로 ‘글쓰기’였다.
그래서 아흔의 찰스 핸디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내 일, 즉 책을 쓰는 일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10)
나는 이 한 문장에 사로잡혀 더 읽지 못하고, 이 느낌을 글로 적었다.
(관련 글은 아래에서 확인)
이 책 서문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인생을 즐기자, 너무 늦게까지 미루지 말자. “
우리는 늘 미룬다.
이 일만 끝나면, 안정되면, 여유가 생기면, 은퇴하면…
그러나 찰스 핸디는 말한다.
‘나중에’라는 말로 넘기지 말라고.
그 ‘나중’은 대개 오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떻게 즐길 것인가.
그가 제시하는 삶의 지침은 놀라울 만큼 단순하다.
그가 이탈리아 사람들에게서 깊이 공감했다는 3F.
가족(Family), 친구(Friend), 음식(Food).
‘사랑하는 가족과 좋은 친구들과 오랫동안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삶.
삶이 우울하거나 기쁘거나에 상관없이 인생을 살아내는 하나의 방식이다.
찰스 핸디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중국식 행복의 정의도 흥미롭다.
그는 공자의 말이라고 소개하지만, 정확한 출처는 분명하지 않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쏟을 일이 있어야 하고,
희망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사랑할 상대가 있어야 한다.” (221)
할 일이 있고
바라볼 희망이 있고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행복하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줄이고 싶다.
희망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상관없다.
그것은 미래의 소관이다.
그러니 바로 오늘, 사랑하고 일하라.
다만, 막연하게 들릴 수 있겠다.
사랑보다 일이 더 그렇다.
일에 대한 찰스 핸디의 생각을 빌려 보자.
그는 누구보다도 ‘일’에 대한 탁월한 전문가이다.
그는 일을 기업 관점과 개인 관점에서 정의하였다.
기업 관점에서는 “클로버 조직(Shamrock Organization)”을
개인 관점에서는 “포트폴리오 인생(Portfolio Life)”을 제시했다.
이 개념들은 당시(1980~90년대)에는 그저 탁월한 예견에 가까웠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낯선 미래가 아니다.
지금은 어느 기업에서나 볼 수 있는 조직 형태가 되었고,
개인들 역시 자신의 커리어를 생각하며 그의 통찰을 활용하고 있다.
클로버 조직은 아일랜드의 세 잎 클로버(shamrock)를 비유로 삼아,
현대 조직이 세 종류의 노동으로 구성된다는 이론이다.
핵심 전문 인력(Core), 계약직 전문 인력(Contract) 그리고 유연 노동 인력(Flexible).
각 잎은 서로 다른 고용 형태와 기능을 담당한다.
이 모델은 기업에게 “모든 직원을 정직원으로 채용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구성원에게는 일정 기간 회사에 머무는 임금 노동자에서
점차 프리랜서, 유연 노동자, 혹은 자영업자로 이동하는 미래를 예고했다.
기업에게 클로버 조직은 '군살 없는 효율성'을 의미했지만,
개인에게는 '평생직장의 종말'이라는 거대한 파도로 다가왔다.
기업이 핵심 인력을 최소화하고 나머지를 외주와 유연 노동으로 채울 때,
개인이 생존을 넘어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내놓은
하나의 응답이 바로 '포트폴리오 인생(Portfolio Life)'이다.
핸디는 개인이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일을 스스로 조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가 말한 일은 크게 네 가지다.
돈 버는 일, 공부하는 일, 가사 노동, 자원봉사.
그에게 인생은 하나의 ‘직장’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의 일들이 담긴 서류 가방, 곧 포트폴리오였다.
이제 우리의 가방을 들여다볼 차례다.
그 안에는 어떤 일들이 들어 있는가.
참고로, 찰스 핸디는 강연과 방송 출연 같은
순수 돈 버는 일에 1년 365일 중 약 50일만을 썼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회사가 우리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회사란 여전히 훌륭한 학교이고, 때로는 든든한 은행이고, 별천지 여행지이기도 하다.
잘 작동할 때의 회사는 사랑하고 일하기에 충분히 좋은 장소다.
다만, 찰스 핸디가 경고한 것은 이것이다.
회사를 삶 전체의 유일한 트랙으로 삼지 말 것.
A트랙인 회사만을 전부로 여기지 말고,
필요할 때는 B트랙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라는 것이다.
아직 현역이라면, 그가 말한 '두 번째 곡선(The Second Curve)'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회사를 떠날 것인가가 아니라, 회사에만 머물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일지 모른다.
찰스 핸디는 경영학자이기 이전에 인문주의 철학자였다.
그는 조직의 효율성을 말하는 한편,
그 비정한 구조 속에서도 개인이 자기 삶의 감각과 영혼을 잃지 않도록 사유의 도구를 남겼다.
그러한 그가 “아흔”이라는 자리에서 내린 결론은 의외로 단순하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바깥에는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니, 이쯤에서 글을 마쳐야겠다.
누구의 문장인지 궁금했을 잇님들께, 그동안 죄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