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
# 10.30
10월의 마지막 주에 이르자 마음이 이상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뿌연 안개처럼 번지고, 그 속엔 갑갑함과 아리송함이 섞여 있었다. ‘마음이 뿌옇다’니, 그럴 수 있을까 싶지만, 분명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건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해마다 이맘때 나타나는 이 ‘신호’ 때문에 코리아둘레길(이하, ‘코둘’) 지킴이 마지막 활동을 10월 30일로 잡았다. 회색빛 모호함을 조용히 포착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천천히 움직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며 마트에 들러 물을 사고, 버스표를 끊어 잠시 기다리고, 버스를 갈아타며 사뿐사뿐 이동했다. 평일 오전, 버스 안에는 기사와 나, 단 둘 뿐이었다. 선도리 정류장에도 나 혼자 내렸다. 오늘 걸을 길은 서해랑길 58코스. 선도리 갯벌체험마을에서 춘장대 해수욕장까지 12.9km를 걸으며 길 안내가 잘 되고 있는지, 앱부터 리본, 방향안내판까지 살핀다.
길지킴이를 한지 올해로 2년째다. 그동안 군산과 서천 구간 총 여섯 개 코스를 세 차례씩 걸었다. 이 말은 만경강이 보이는 군산시 대야에서 충청도 춘장대 해수욕장까지 지도 없이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이고, 마음만 먹으면 위로는 강화도 통일전망대, 아래로는 해남 땅끝마을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간절하거나, 걸어야 할 이유가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생각을 리셋하듯 비워내고 싶을 때, 우리나라의 외곽을 하나로 잇는 4500km 둘레길 전체 혹은 그 길의 어떤 한 공간을 다녀오는 일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하는 아주 근사한 방식이다.
서해랑길 58코스의 ‘바로 그 공간’은 내 경험에 두 곳이다. 하나는 오랜 추억이 있는 '춘장대 해수욕장'이고, 다른 하나는 지킴이 활동을 하며 알게 된 ‘띠섬목 해변’이다. 둘 다 특별히 화려하거나 유명하진 않아도 나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공간이다.
바로 이런 공간을 어렵게 찾아간다는 데서 여행은 설렘이라는 특별한 체험을 안겨준다. 그러니 여행을 그냥 여행이라 말하기 어렵다. 나는 ‘부름’이라 하고 싶다. 여행은 내가 여행지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장소가 나를 불러내는 일, 부름이다. 따라서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은 결국 부름에 응답하는 일이다.
여행은 — 사실, 부름
잠든 땅에서 깨어나라는 신호
질서가 완벽하게 고정된 곳에서
생명이 잠든 그 자리에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보이지 않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
마음을 떠는 여행자
위험과 기대의 경계
두려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지점
그 찰나의 전율 속에서
나라는 세상이 나를 부르는
설렘은 — 사실, 몸이 기억하는 리듬
그 ‘부름’은 우연처럼, 올해의 코둘 활동에서 시작되었다. 사실, 올해는 길지킴이 활동을 쉬려고 했다. 새로 배정된 김제 구간은 집에서 멀었고, 대중교통으로 오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군산 코스 외에는 어렵겠다는 뜻을 전하며 포기할 생각이었다. 그때 운영사무국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서천은 어떻겠냐고.
서천 역시 멀고 번거롭기는 마찬가지라 한참을 망설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어쩌면 또 다른 부름이었다.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신호. 익숙함을 내려놓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발을 내딛으라는 조용한 손짓. 그래서 올해의 걷기 여정을 시작했다.
그렇게 서천 구간을 걸으며 띠섬목 해변과 춘장대 해변을 새롭게 만났다. 처음 가는 길은 늘 불편하고 불안하고 때론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길의 일부다. 가보지 않은 길 위에는 불안과 함께 희망도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힌다.
# 10.30
선도리 마을을 벗어나 조금 걸었더니 어느새 띠섬목 해변이다. 장관이다. 하얗고 고운 모래사장이 자그마치 3.7km에 걸쳐 부드럽게 이어져 있다. 서해랑길 58코스에서 가장 설레는 장소다. 평일의 점심 무렵이라 사람 하나 없이 고요하다. 바람은 부드럽게 불고, 파도는 낮게 숨을 쉰다.
느긋하고 한가로운 풍경 속에서, 해변에 줄지어 선 무수히 많은 조개껍데기를 보며 생각했다. 이곳은 바람의 서사이자, 파도의 생애이며, 시간의 먼지가 쌓여가는 자리. 지금 나는 은하의 가장자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모래사장이 끝나고 파도가 숨을 쉬는 경계, 그곳에서 바다가 말을 걸어왔다.
“들리는가?”
파도 소리, 바람 소리. 파도는 제 할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바람은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갔다. 그럼에도,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세상과의 연결이 순간 끊어진 듯, 어딘가로부터의 단절이 느껴졌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모래 위를 애써 달리려 했던 자동차 바퀴 자국뿐. 하지만 그 자국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 또한 또 하나의 흔적을 이곳에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래는 모든 것을 지우지만, 걷는 이는 그 순간을 하나하나 기억할 것이다. 이곳엔 모래와 갯벌, 해송림과 바람, 그리고 파도가 머물고 있었다.
서도초등학교를 지나 한참을 걸으면 넓은 모래사장과 아득한 파도의 숨결이 들려온다. 춘장대 해수욕장이다. 사람들이 떠난 바다는 고요했고, 여름의 소란은 이미 저 멀리 물러나 있었지만, 바다를 향해 뛰노는 몇몇 아이들로 바다는 여전히 누군가의 놀이터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여름의 기억은 바다 위에 오래 머문다. 걸음을 옮기며, 시선을 따라 흐르던 그 순간 문득, 고등학교 시절의 여름이 떠올랐다. 그해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대학 입시라는 것도, 저 바다 너머 무엇이 있는지도, 인생이 낭만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텐트와 버너, 수영복과 충분한 라면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웃고, 웃고, 웃으며 행복했다.
해가 저물 무렵, 모닥불을 피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친 친구 하나가 저무는 해를 향해 서서, 옆구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도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친구의 시선이, 친구의 옆 모습이. 그 친구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고, 또 몇 번의 여름이 지나도, 춘장대는 여전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내고 있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그때, 친구들과 춘장대에서 군산까지 어떻게 갔는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언젠가부터 자가용으로 ‘핑핑’ 다니는 여행에 익숙해지면서, 외딴 곳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모든 게 낯설고 불안했다. 차를 놓치면 택시를 타야 하고, 그건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다 한참을 걸려 서천으로 향하는 버스 정류장을 찾아냈다. 서천화력발전소 사원아파트 근처. 해는 저물고, 바다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곳에서 나는 가만히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 10.31
하루짜리 여행 다음 날, 나는 그만 시월의 마지막 밤에 붙잡히고 말았다. 처음엔 이 감정을 ‘싱숭생숭’이라 여겼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마음이 들떠서 어수선하고 갈팡질팡하는 모양.”
그렇다면, 아니다. 내 마음은 들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모양? 마음의 모양이 갈팡질팡하지도 않았다.
들뜨지 않고, 차분한데도 텅 빈 공간 속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꿈틀대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잠깐 걸었던 길에 찾아온 쓸쓸함도, 친구와 어울리며 주고받는 계절 인사와 안부 속에 묻어나는 속절없는 시간의 아쉬움이나 초조함도 아닌 그저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잔잔히 다가오는 아릿한 아픔을 어쩌지 못하고 방치하는 지경의 시월의 마지막 날.
도대체 그게 뭘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련함일까. 그리움일까.
# 11.01
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쓰던 글을 덮었다. 그러곤 아무 기대 없이 들른 도서관에서 나는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어느 비린 저녁 찾아온 그리움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포에지 92)
비린 저녁 그리고 그리움. 순간, 어제의 마음 상태가 언뜻 잡혔다 싶었다. 비린 저녁, 그게 내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을까. 조리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순수 날것에서 피어나는 감각. 그런 저녁 그리고 그런 그리움.
“어느 비린 저녁 찾아온 그리움”이라는 문장은 삶의 온기와 냄새가 아직 덜 식은 시간의 감각일까.
다시 물음이 남았다. 저녁이 비려서 그리움이 온 걸까, 그리움 때문에 저녁이 비리게 보인 걸까. 머릿속에 단 하나의 단어만이 남았다.
그리움이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법이라 저녁에도, 야심한 밤에도 스며들 수 있다. 그 시간은 종종 비리고, 시큼하고, 텁텁하고, 심지어 꾸리꾸리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감각의 원인이 그리움이라면 비린 건 저녁이 아니라 그리움 그 자체가 아닐까.
저녁이 비린 게 아니라 '그리움이 비리다'
그렇다면 그리움이란,
썩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날것의 생생한 것,
부패하지도 마르지도 않아 결코 죽지 않는 것,
피와 바다의 냄새를 각인한 원초적 무의식에 머무는 것,
그리움이란 그런 게 아닐까.
손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결코 포획되지 않는 감정.
나는 그날 저녁, 내 마음을 이렇게 읽었다.
그리고 그때 알았다.
그리움은 아주 멀리서 온다는 것을.
이병률 시인의 책을 빌렸다.
로버트 해그스트롬의 책도 집어 들었다.
얼마 전 기록했던 <워런 버핏 웨이>가 생각보다 빨리 서가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실이 반가워, 블로그에 추가 기록도 남겼다.
"나는 주로 책을 읽으면서 배웠다.
그래서 내게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벤저민 그레이엄의 책을 읽었고, 필립 피셔의 책도 읽었다.
그러면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었다." (392)
여기에서 '나'는 워런 버핏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그렇게 배웠다.
무엇이 나를 부르는지.
그 부름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로부터 나는 무엇을 볼 수 있는지.
걸으며 배우고, 책에서 새로운 생각을 얻었다.
이병률 시인의 책을 낸 문학동네 기획자는 책의 앞쪽에 이런 말을 실었다.
그리운 마음일 때
'I Miss You'라고 하는 것은
‘내게서 당신이 빠져 있기(miss) 때문에
나는 충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게
소설가 쓰시마 유코의 아름다운 해석이다.
(이병률,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포에지 92, 기획의 말)
# 11.04
생각을 정리하는 이 글에서야 여행의 끝에 닿았다.
올해의 코둘 활동도, 이제 종료다.
그러니, 귀환해도 좋겠다.
귀환!
귀환은 이런 것이라 한다.
(조지프 캠벨, 신화와 인생)
*광휘: 환하고 아름답게 눈이 부시는, 그 빛.
귀환은 다시 돌아감이 아니다
처음으로, 진짜로, 보기 시작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내게서 빠져 있었던 당신을
비로소 다시 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2장의 마지막 꼭지글입니다.
아래 글들도 2장에 속하며, 세 꼭지를 더 두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