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 머물거나, 바다로 나서거나

경고

by 별들의강



# 주의!!!

이 글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에 관한 것이고,

밥벌이에 관한 것이고,

무엇보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읽기’로 나만의 길을 걷고자 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 길을 같은 방식으로 걷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낮에 일하고, 밤에 책을 펼친다.
어떤 이는 아이를 재우고 나서야 비로소 몇 줄을 읽는다.

어떤 이는 읽기를 밥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어떤 이는 그것을 자기 치유의 방식으로 삼는다.

삶은 다르고,

길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나의 문장을 한 줄씩 써 내려가는 일이다.


# Part 1

고향으로 내려오며 나는 나의 직업을 ‘읽는 일’로 정했다. 세상의 직업 분류표 어디에도 ‘읽는 사람’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빈칸이야말로 내 자리를 말해주는 듯했다. 나는 일보다 삶을, 생계보다 의미를 먼저 택하며 자칭 ‘전업독자’의 길을 선언했다.


책 읽는 일이 직업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한다. 도서관 사서냐, 책방 주인이냐고 묻는다. 그게 아니라고 답하면 그다음 말이 궁금한 듯 시선을 고정한다. 책 읽기를 일로 내세울 정도면 분명 뭔가 있을 거라는 기대와 의심의 눈초리다.


책 읽기로 밥벌이를 한다니, 이보다 편한 일이 또 있을까 싶겠지만 —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만 읽어서는 밥이 나오지 않는다. 직업으로 삼기에는 좋은 일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역시나’로 끝내기엔 뭔가 찜찜하다. 정말로, 좋아하는 일로는 밥벌이를 할 수 없는 걸까?


우리가 하는 일은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하고 싶은 일이거나,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은 내 마음이 시키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은 나 아닌 누군가의 지시와 통제 속에서 이뤄진다. 여러분의 일은 어느 쪽에 있는가? 대부분의 경로는 정해져 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을 먼저 하고, 하고 싶은 일은 뒤로 미룬다. 이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제껏 해봐서 알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일을 미룰수록, 그 일은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새로운 해법을 찾는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균형의 기술’을 발휘하려 애쓴다. 흔히 말하는 워라밸, 일과 삶의 균형 말이다.


그러나 이게 가능할까? 대부분의 사람에게 일과 삶이란, 회사와 개인 시간을 적당히 나누는 계산의 문제일 뿐이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온종일 회사에서 시달린 뒤 퇴근하면, 남은 에너지는 거의 없다.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거나, 엄지와 검지로 핸드폰 화면을 키우고 줄이고 넘기며 하루를 마친다. 그게 우리의 ‘자기 시간’이다.


그렇게 우리는 피로를 풀기 위해 쉬고, 다시 피로를 쌓기 위해 일한다. 이 악순환에서 균형은 환상이다. 하루를 쪼개어 아침과 저녁에 자기 계발을 더해도, 본질적으로 우리는 같은 궤도 위를 돌뿐이다. ‘피로사회’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나도 그랬다. 집과 회사를 오가며,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내는 것이 곧 삶의 충실함이라 믿었다. 가족과 나의 미래를 위해 일과 사람에 몰입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에 취직해 회사에 충성하는 것이 나를 실현하는 길이라 여겼다.


그러나 그 믿음이 신기루였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사라는 조직은 결코 오래 머물 수 있는 집이 아니었다. 언제든 흔들릴 수 있는 모래 위의 집이었다. 외부 환경의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회사는 먼저 사람을 밖으로 내보냈다. IMF 외환위기 때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그리고 지금의 팬데믹 이후 경기 침체 속에서도 그랬다.


하지만 회사 밖의 위기는 어떤 식으로든 언제든 발생하기 마련이다. 기술과 문화의 변화, 통제할 수 없는 재난, 예측 불가능한 세계의 흐름 속에서 경영 환경은 매번 달라진다. 이에 적응하려는 기업의 노력 역시 치열해진다. 문제는 그 안의 구성원들 역시 그 속도에 맞혀야 한다는 점이다.


기업은 변화에 적응하지만, 개인은 그 변화에 순응하도록 강요받는다. 이것이 공식처럼 굳어진 생존 논리다. 그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무기력함이고, 불안이고, 두려움이다. 익숙했던 자리가 흔들릴 때,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라 선택당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제 나는 다르게 살고자 한다. 아주 단순한 원칙을 세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한다.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이고, 질서다. 그다음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읽기’이고, 해야만 하는 일은 ‘밥벌이’다. 그러니 이제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이 둘을 잇는 다리를 놓는 것. 읽기를 중심으로 생계를 설계하는 삶이다.


이게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유를 먼저 말하고 싶다. 이유가 분명할수록 현실적인 여정을 계속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이 길을 되돌릴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고 싶은 일로 결과를 만드는 삶을 원한다. 그 일이 나에겐 ‘읽기’다. 그런데 왜 하필 ‘읽기’인가.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즐겁다. 나는 책 읽는 일이 좋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곳으로 나를 이끄는 탁월한 저자들이 즐비한 이 세계가 마음에 든다. 그들과 함께하는 여행을 무한히 신뢰하며, 그들과 밀고 당기며 나누는 대화를 은근히 기다린다.


둘째, 유익하다. 책 속에서 나는,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흥미로운 단서와 용기를 얻는다. 거칠고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그것이 나의 생의 원천이다. 읽기는 생의 근력을 단단히 만드는 일이다.


셋째, 소명이다. 세상의 변화를 읽고, 나의 내면을 다시 읽는 일. 유연하고 거침없는 이 흐름을 읽기의 영역이라 여긴다. 읽기는 쓰기다. 보고 생각하고 표현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내가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읽고 쓰는 삶이야 말로 내가 바라는 나 다운 삶, 단순하고 평범해도 오로지 나 자신으로 성장하는 길임을 알게 되었다. 내 가슴이 원하는 일, 그게 나의 읽기다.


오래전, 가늘지만 분명하게 기록되었던 마음속 신호.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그러니 더 이상 미루거나 피할 이유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것이 우선이다. 그러므로 ‘밥벌이’의 어떻게는 자명하다. 하고 싶은 일로 밥벌이를 할 것. 그게 당장 이뤄질 수 없다면, 견디고 견디며 나아갈 것.


그러하니 읽기로 밥벌이를 만드는 이 여정이 곧 나의 혁명이다. 거대한 세상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는 조용한 혁명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나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

(페터 비에리, 자기 결정)


이 말은 내 생각과도 닮아 있다. 읽는다는 것은 곧 쓰는 일이며, 쓰는 일은 결국 나를 표현하는 일이다. 나의 일은 읽기이므로, 나는 읽음을 통해 나를 드러낸다. 책 속에서 피어난 생각들, 세상을 번역하는 나의 시선, 그 모두를 기록한다. 독자의 사명은 표현하는 것. 그러니 오늘도 나는 읽고 쓰고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의 혁명을 시작했으니, 더디더라도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 Part 2

당신도 하고 싶은 일을 할 마음이 생겼는가. 마음의 닻을 내리고 있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띄워 보낼 용기가 충전되었는가. 그 바다는 불확실하고, 때로는 위험하지만, 우리는 그곳을 건너며 진짜 자신의 일과 만날 것이다. 아직 미심쩍다면, 그 바다를 먼저 바라본 사람, 헨리 데이비드 소로를 만나보자. 그는 이렇게 물었다.


“내 본연의 일을 추구할 만큼 자유를 누리면서 어떻게 하면 정직하게 생계를 꾸려 나갈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정회성 옮김)


소로의 물음이 나의 물음이었다. 동시에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물음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겨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스스로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 이 오래된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 많은 이들이 머물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마주해 온 화두로 이어진다. 돈과 자유. 이 물음에 답하는 과정이 곧,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길이며, 소로가 『월든』에 남겨둔 삶의 힌트를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돈과 자유’는 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그 거울 앞에서 묻는다. 돈이 있으면 정말 자유로워질까. 경제적으로 풍족할수록 마음도 넉넉해질까. 아니면, 돈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유를 잃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돈을 선택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경제적 자유, 이른바 파이어족(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을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한다. 많은 돈을 가져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생각의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이렇게는 묻고 싶다. 돈이 정말 자유의 전제라면, 우리는 언제쯤 그 자유에 닿을 수 있을까.


이른바 ‘FU머니(fuck you money)’라는 말도 있다. 재정적 궁핍에 빠지지 않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을 만한 돈, 월급에 목매지 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여유. 듣기만 해도 통쾌하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함께 따라온다. 우리는 여전히 돈이 자유의 열쇠라 믿고 있다.


소로의 고민도 거기에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먼저 생계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전제. 그 벽을 넘지 못하면 다음 세계로 결코 들어설 수 없다는 신화.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성벽 앞에서 멈춰 섰을까. 그러나 멈춘 이들 또한 여정의 일부다. 어떤 이는 그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고, 어떤 이는 벽의 의미를 새로 써 내려간다.


자유를 향한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그 방향이 다를 뿐이다. 어떤 이는 돈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freedom from)를 택하고, 어떤 이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는 자유(freedom to)를 택한다. 전자는 경제적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이고, 후자는 자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한 자유다. 돈을 좇는 삶은 종종 전자에 머물러, 자유를 구하려다 오히려 그 울타리 안에 갇히게 된다.


반대로 자유를 위해 생계를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 허락한 지금 이 순간의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나는 지금 그쪽에 더 가까이 서 있다. 한때는 전자의 삶, 안정과 생계를 좇는 길 위에 있었지만 결국엔 느지막이 방향을 틀었다. 이 지점에서 경영사상가 찰스 핸디의 주장을 들어보자.


“우리가 충분한 돈의 액수를 낮추면 낮출수록 다른 일을 할 자유는 그만큼 더 많아지는 거야. 돈을 너무 강조하면 돈은 너를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돈 버는 일에 꽁꽁 묶어 둘 수 있어.”

(찰스 핸디, 코끼리와 벼룩)


이렇게 말하는 찰스 핸디 역시, 자신이 하고 싶은 일로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대기업(코끼리)에서 탈출해, 프리랜서(벼룩)로 살아남은 장본인이다. 그는 조직의 무게 아래 눌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몸집을 가볍게 만들었다. 스스로의 재능으로 생계를 꾸리고, 그것을 통해 명성과 자유를 동시에 얻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이룬 ‘성공’보다, 그가 지나온 ‘과정’에 더 마음이 머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처럼 완성된 모습이 아니라, 그 과정의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밥벌이를 이어가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소로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첫째, 삶을 단순하게 하라. 『월든』에서 그가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삶은 사소한 일로 낭비되고 있으니, 간소화하고 또 간소화하라.” 소로가 말한 간소함은 단순히 절약의 미덕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를 되찾는 방식이다. 그는 스스로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번잡함을 덜어내고, 필요한 만큼만 일하며, 남은 시간으로 자신을 확장했다. 거기에 일의 종류까지 소개한다.


"나는 날품팔이가 가장 독립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일 년에 삼십일 내지 사십일만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날품팔이 노동자의 일과는 해가 저물면 끝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정회성 옮김)


소로는 일 년에 40일 정도만 일하면 필요한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서 이야기한 찰스 핸디 역시 일 년에 단 50일 만을 돈 버는 일에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 년에 며칠을 일할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때와 지금은 경제 상황도 다르다. 오히려 일의 형태가 중요하다.


소로가 말한 ‘날품팔이’에 대한 찬사는 단순한 생계 수단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추구한 자유로운 삶 그리고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삶과 깊이 연결된다.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일을 위해서도 전일제 직장이나 정규직 노동 대신, 해가 저물면 끝나는 일, 일용직과 단기적인 일을 선호했다. 찰스 핸디에게 그것은 출판, 강연, 방송 출연이었지만, 소로에게는 측량기사와 목수, 부업과 같은 ‘날품팔이’였다. 그러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삶은 간소화(simplify)가 필수적이다.


둘째, 낮 시간의 일자리를 가져라. 이번에는 조금 더 현대적인 인물의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읽고 쓰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잘 어울리는 사람, 엘리자베스 길버트다. 그녀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로, 세계적 베스트셀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길버트 역시 처음부터 생계 걱정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가 전업 작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네 번째 책, 그러니까 그 유명한 베스트셀러가 세상에 나온 이후의 일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글쓰기에게 내 삶의 재정적 책무를 맡기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글쓰기가 아닌 다른 수입원을 오랫동안 꾸준히 유지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 빅매직)


나는 이 말에서 중요한 하나의 원칙을 배웠다. 하고 싶은 일이 곧 생계가 되는 순간, 자유는 위협받는다. 그래서 길버트는 글쓰기에 재정적 책임을 지우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다른 일을 병행했다. 나 역시 그 방식을 따르고 있다. 글쓰기가 나의 자유라면, 생계를 위한 일은 그 자유를 떠받치는 안전망이다. 길버트는 자신의 안전망을 “낮 시간의 일자리”라 불렀다.


“작가로서의 삶을 실천하던 기간 내내, 나는 언제나 생계를 위한 낮 시간의 일자리를 따로 가지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길버트, 빅매직)


대부분의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일 —지금의 직장—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일 속에 ‘자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은 단지 생계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자유를 떠받치는 단단한 토대, 그 자신의 안전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반은 생각보다 자주 흔들린다. 최근 잘 돌아갈 것으로 여기던 나의 ‘낮 시간 일’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의 구성을 다시 새로 짤 때가 되었다.


셋째, 물러서지 마라. 하고 싶은 일로 밥벌이를 꿈꾼다면, ‘연구개발(R&D)’이 핵심이다. 이것은 은유가 아니다. 아주 실용적인 지침이다. 다시 말해, 배우고 시도하고 실험하는 일이다. 직접 해볼 수 없다면, 간접경험이라도 쌓고, 작게라도 시도하며 실패를 견디는 연습을 반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계속하는 능력’이다. 그저 내 생각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먼저 걸은 사람들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다. 길버트의 “거절당한 소설”은 누군가에게는 외면받은 제안서이고, 불발된 프로젝트이며, 무응답의 이메일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하나다. 전진하라. 물러서지 마라.


“나는 거절당한 내 단편 소설을 회신용 우표가 붙은 봉투에서 다시 꺼내, 또 다른 거절 편지를 모을 요량으로 또 다른 문예지에 보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이쪽 분야에서 경기에 임하는 방식이다. 항상 전진하기, 결코 물러서지 않기.” (엘리자베스 길버트, 빅매직)


하고 싶은 일을 오래 하려면, 잘해야 한다. 잘하려면 배우고 익히고, 무엇보다 견뎌야 한다. 재능이란 타고난 성향만이 아니라, 계속할 수 있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가만히 앉아서, 골똘히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는다. 조금씩이라도 해봐야 알 수 있다. 재능이 얼마나 있는지, 더 할 것인 지 그만둘 것인지, 감이 잡힌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방법, 오래 하는 방법, 잘하는 방법. 그것은 견디는 것, 버티는 것이다. 용기보다 인내가 더 필요하다. 몽테뉴는 말한다.


“피할 수 없는 것은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니체는 거기서 더 나아간다.


“불가피한 것을 견디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것을 사랑하라. 운명애. Amor fati.”


세상은 하고 싶은 일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는 한 문장을 읽고, 그 의미를 곱씹고, 자기 언어로 표현해 냈다. 그 행위는 조용하지만 분명한 선언이다.



# 경고!!!

이것은 위험한 삶이다.

시간은 어느 것도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이 위험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신이 하는 일로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
읽고 쓰는 단순한 삶의 길 위에 서겠다는 결심은
그 자체로 이미 ‘특권’처럼 보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우선이고,
오늘 하루의 버팀이 먼저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글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길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점을 이미 ‘주의문’으로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마음 한편에서 묵직하게 울리는 그 문장이 있다면,
지금 이 경고는 멈추라는 신호가 아니라
‘조심해서 가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라!”

(니체, 즐거운 학문)


이 말은 모험에의 초대이자, 대가를 요구하는 암시다.

경계 없이 펼쳐진 불확실의 바다,

그 위를 나아가는 일은 곧 나를 찾아가는 길이자

내가 나를 견뎌내야 하는 시험의 여정이다.


이 두려움과 불안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 삶은 항구에 묶인 배처럼 무난한 일상에 머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미 항구를 떠났다.

그래서 니체의 이 말은 단지 한 줄의 파편이 아니다.

비록 나만의 오역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도전의 북소리요, 전진의 깃발이다.

위험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

이 문장은 경고가 아니라 위안이 된다.

두려움이 아니라 응원이 된다.

그대가 아직 항구에 있든, 이미 떠났든.


2022.08.08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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