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젤과 인간

적응 2

by 별들의강



누구나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직업으로 풀어낸다. 공무원, 의사, 교사, 과학자, 작가처럼 수많은 직업 가운데 자기의 희망과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을 고른다. 좀 더 포괄적으로 꿈을 탐색하는 사람도 있다. 가령, ‘내가 가진 시간을 하고 싶은 일에 마음껏 사용하기’, ‘경제적 독립을 이루고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제공하는 사람’의 길을 찾는다.


꿈을 이루는 방식이 어떻든 간에 꿈 자체는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꿈을 그리고 내 곁의 사람들의 꿈을 응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꿈은 언제나 더 나은 내일로, 성장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이다. 꿈을 가슴에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살아가는 이유를 진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느리게 가더라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바로 그것이 오늘의 힘듦을 이겨내는 동력이다. 우리는 꿈꾸며 사는 존재, 미래를 기획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삶의 문턱에 발이 걸려 호되게 넘어지고 나면,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과 투쟁하듯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들이 눈앞에 줄줄이 늘어서 있는 현실과 마주하면 꿈꾸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바로 깨닫는다. 그 순간 일상의 즐거움, 나아가서는 신비로움과 설렘과 감동이 사라지고 어제와 같은 일이 오늘도 어김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 당장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에 감사할 뿐, 각종 청구서에 박힌 숫자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한다. 통장 잔고를 늘리려고 재테크에 진심인 자신을 발견할 때에는 한없는 씁쓸함과 허탈함이 가슴 가득하다. 그 푸르렀던 나의 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러한 삶을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적응. 주변 여건에 자신을 맞춰 사는 일. 우리 삶의 주요 장면에는 어김없이 적응이 등장한다. 세상의 변화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낙오자나 외톨이로 남지 않으려고 주어진 환경을 세심히 살피며 그에 반응하는 삶을 산다.


적응은 진화 측면에서도 인간종이 채택한 생존전략이다.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로 지구 생태계에 올라선 것은 혹독한 자연환경에 자신을 맞추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조상은 살아남으려고 자연환경에 적응했고, 이제 우리는 사회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살아가는 일, 그것은 적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적응이란 변화를 수용한 것이고 환경에 순응한 것이다. 생존을 위한 선택이지만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어느 한 곳에 갇혔다는 말이다. 심하게는 거기에 발목 잡혔다는 뜻이다. 뜨거운 기후에 적응했다는 것은 그곳이 아닌 데서는 생존이 어렵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 갇히고 잡힌 상태에서 주어지는 환경은 불안 그 자체다. 경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좌절감, 건너지 못해 선이 그어진 곳에서는 언제든 포식자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그럴수록 더욱더 주어진 환경에 매달린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경계 너머의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불확실함보다 경계 안쪽의 익숙함과 확실함이 편하다. 그래서 여러 차례의 위협과 역경과 고통을 견뎌내면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바뀌고, 신중함은 무디어지며 주의는 흐트러진다. 줄기차게 떠오르는 당면 문제들을 임기응변으로 처리하기에 급급하다. 불확실함에서 확실함으로 환경에 완벽히 적응한 것이다. 그렇다면, 적응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너무 잘 적응한 것이 문제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단서를 과학자 제이콥 브로노우스키는 오래전에 남겨두었다.


“인간의 진화는 아프리카의 기후가 건기에 들어섰을 때 시작되었다. 호수는 말라 들고 숲은 줄어들어 대초원으로 바뀌었다. 인류의 조상이 이러한 조건에 잘 적응하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행운이었던 것 같다. 환경은 적자생존의 대가를 요구한다. 환경은 그 적자(適者)들을 붙들어 놓는다. 얼룩말이 메마른 초원에 적응하자, 초원은 얼룩말의 시·공간적인 덫이 되었으며, 그들은 그 자리에서 커다란 변화 없이 그대로 묶이게 되었다. 짐승들 가운데서 가장 멋지게 적응한 동물은 분명 그랜트 가젤(Grant’s gazelle)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아름다운 뜀뛰기로도 영원히 초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제이콥 브로노우스키, 인간 등정의 발자취, 2009)


살아남음이 곧 자유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완벽히 적응한 순간, 생명은 스스로를 구속한다. 환경은 적자생존의 대가를 요구한다는 이 대목을 읽으며 전율했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노력한 삶이 바람직할 수 없다는 냉철한 진단. 그 말에 몹시 놀랬다. ‘말라가는 호수와 줄어드는 숲’을 의식하지 못한 채 마냥 한 곳에 붙박이처럼 머무는 일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불길한 삶인가. 나는 그랜트 가젤이 초원에 갇혀 뛰던 순간, 그 뜀뛰기가 바로 나의 일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유로워 보이지만, 결코 초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생. 그랜트 가젤이 나의 모습이었다. 마치 제이콥 브로노우스키가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은 안정과 여유가 아니라 덫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들려주는 듯했다. 고립된 적응은 결국, 고립된 인간을 만든다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만의 북소리


마흔둘. 직장인으로 살았던 15년의 찬란한 축제를 마감했다. 내가 머물던 곳에는 아직 맑은 물이 흐르고, 작은 열매가 열리는 숲이 있었다. 그러나 바람의 결이 바뀌고 있었다. 잎맥이 말라가고, 열매의 빛이 옅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숲에는 오직 하나의 규칙만 남게 되었다. 더 많이 따는 자가 살아남는다. 조심스럽고도 거침없는 전투가 매일 벌어졌다. 함께 나누던 열매는 작아지고, 숲의 침묵은 점점 무거워졌다.


결국, 그 숲을 떠나야 했다. 확실한 죽음과 불확실한 가능성 사이에서, 나는 오래 머뭇거렸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이르고자 하는 곳, 나만의 길이 그 너머에 있음을. 그 길의 초입에서 한 문장을 만났다.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내던진 사람. 찰스 핸디의 문장이었다. 그 한 줄이 내 발을 초원 밖으로 이끌었다.


찰스 핸디(1932~ )는 유명한 경영사상가다. 이 분야에서 잘 알려진 피터 드러커(1909~2005)와 톰 피터스(1942~ ) 등과 견줄 만큼 명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그가 남다른 점은 ‘경영’이라는 하나의 틀에 갇혀 있지 않은 채 경영을 인문학적으로 풀어낸 ‘경영철학자’라는 것이다. 특히, 그의 『코끼리와 벼룩』은 21세기 노동과 삶의 구조 변화를 가장 통찰력 있게 포착한 저서다. 단순히 “조직과 개인의 관계”를 다룬 경영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경영의 언어로 풀어낸 인문서라 할 수 있다.


책에서 찰스 핸디는 자신이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내팽개치고 선택한 것은 새롭고 무모한 모험의 세계였다고 밝힌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선택한 바깥 세계의 무모한 모험이 조직 안에 너무 오래 머무르다 화석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한다. 내가 회사를 그만둘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그토록 강조한 ‘코끼리(대기업)에서 벼룩(프리랜서)으로의 전환’이 거부할 수 없는 시대의 도도한 추세라는 진단 때문이었다. 이를 점검하기에 걷기와 도보 여행은 제격이었다.


나는 금요일 저녁의 걷기를 실험하며 점심에도 주말에도 걸었다. 딱히 무언가의 답을 얻으려는 노력보다는 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정도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특히 곁에서 함께 걸어준 동료가 내 생각을 정성껏 들어주며 방향과 속도를 조정해 주었다. 그렇게 걷기를 이어가며 물었다. 떠날 채비는 충분히 마쳤는가? 뭔가 믿는 구석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경우도 있는데 무모해 보이는 모험을 시작해도 좋을까? 그 어떤 질문에도 확실한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선택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답으로 누구에게 허락을 구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카프카의 ‘돌연한 출발’이 하나의 표지처럼 거듭 떠올랐다. “다만 여기를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를 떠나는 거야, 그래야만 나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네.” 그는 그렇게 속삭였다. 떠남 자체가 곧 목적이라는 이 역설의 문장은, 내 마음속 어딘가에 울려 퍼지는 트럼펫 소리처럼 들렸다.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나만은 분명히 듣는 소리. 나를 부르고, 출발을 명령하는 그 소리.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그 소리를 자기만의 북소리라 불렀다.


“어떤 사람이 동료와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치는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정회성 옮김)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내 안에서 일렁이는 욕망의 파도. 그것은 그곳을 떠나라는 신호, 자기만의 여행을 시작하라는 표지였다. 그래서 이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그 정도를 확인하며 다시 한번 내 안에 귀 기울여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한 또 다른 실험. 베르나르 올리비에로 꿈꿔왔던 도보 여행을 시작하는 것. 회사를 떠난 지 이틀째 되던 날, 미리 준비해 둔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섰다. 목표는 단 하나, 걸어서 고향 군산에 닿는 것. 내 안의 북소리가 그 길의 방향을 알려주었다.


내 마음이 이끄는 길


출발을 하루 앞둔 날, 나는 블로그에 이렇게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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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는 자유. 나는 늘 그런 자유가 그리웠다. 시간 맞추어 출근하고, 눈치 보며 퇴근하는 그런 삶이 언제부터인지 시시해졌다. 내가 머무는 곳의 현재와 미래는 뜨겁지도, 즐겁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았다. 떠남을 택한 이유이다.


# 떠남은 늘 불안하다. 자유가 책임과 맞물리는 부분이다. 자유를 제한하는 곳에는 일상이라는 편안함이 주어진다. 한 사람이 짊어진 짐을 나눠지고, 어느 정도 앞날을 예측가능하게 하고, 일정하게 열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만을 선택할 경우 더 이상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을지 모른다. 스스로 열매를 찾아야 하고, 책임의 짐을 전적으로 짊어지고 숱한 모험 속에 고스란히 노출될 것이다. 그러기에 떠남은 늘 모험이자 도전일 수밖에 없다. 미래의 꿈 만을 믿고 떠나는 장거리 여행이다.


# 내일부터 시작하는 '도보 여행'은 온전한 자유를 얻으려는 하나의 입문식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긴장된다. 하필이면 내일(2일)부터 강추위가 시작된다는 날씨 예보도 반갑지 않다.


# 여행의 준비물은 대략 이러하다.

배낭(브라이튼 헤르메이스 42리터), 노트북(IBM R51), 신발(집에서 신던 가벼운 운동화)

기능성 양말 4켤레, 지도책(집에 있던 15만 분의 1 책으로 대체), 손전등 1개, 내복 2(하의),

속옷 1벌, 바지 2벌, 겉옷 2(두툼한 것과 가벼운 것), 상의 2, 생활복 1벌, 방수재킷 1,

모자(나중에 비 올 때 방수 등산모 구입), 수첩, 볼펜, 휴대폰과 충전기,

카메라와 충전기(메모리 2G 2개), 세면도구(자외선 차단 크림 필수),

구급약품(맨소래담 로션, 일회용 밴드, 압박 붕대, 지사제, 케토톱)

그리고 읽을 책 (3권을 준비했다가 1권만 남기고 다시 집으로 택배 발송)


# 대략의 일정은 이러하다.

2월 2일(1) : 월곶 포구 근처 숙박

2월 3일(2) : 대부도 근처(시화방조제 지나) 숙박

2월 4일(3) : 서신면 근처 숙박

2월 5일(4) : 남양호 지나 숙박

2월 6일(5) : 송악 부근 숙박

2월 7일(6) : 당진군 부근 숙박

2월 8일(7) : 서산시 이전 부근 숙박

2월 9일(8) : 부석면 지나 창리 근처 숙박

2월 10일(9) : 삼봉 해수욕장 근처 숙박

2월 11일(10) : 영목항 이전 근처 숙박

2월 12일(11) : 영목항에서 배를 타고 대천항으로 넘어와 무창포 부근 숙박

2월 13일(12) : 비인면 부근 숙박 또는 서천 지인 집에서 숙박(한산면 신성리 갈대밭 근처)

2월 14일(13) : 군산 도착. 설날. 성묘

2월 15일(14) ~ 20일(19) : 태어난 곳, 자란 곳, 골목길, 학교, 성당, 친구들


회사에서 짐을 정리해서 나온 다음다음 날, 나는 시화방조제 길을 걸었다. 날씨는 영하 15도 이하로 곤두박질치고 바람이 매서웠던 그날. 나는 오이도에서 제부도까지 한참을 걸었다. 추위를 피해 잽싸게 달아나듯 사라지는 차량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까마득하게 이어진 길 위에서 문득 생각이 스쳤다.


내가 걷는 이 길은 마음 따라 걷는 길,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마음에 길이 있으니, 마음으로 길을 놓자. 나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다. 처음의 생각은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중요한 것은 그 울림을 분명히 들었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생각이 연달아 이어지자 처음의 생각은 몽롱해졌다. 며칠 뒤, 공사장 근처를 지나는데 한 노동자가 물었다. “추운 날씨에 어딜 그렇게 가요?” 무심결에 대답했다. “길을 가고 있지요.”라고 답했다. 한참을 걸으며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그랬다. 나는 지금, 내 마음에서 시작한 그 길을 걷고 있었다.


IMG_7117.JPG 2월 5일


회사를 그만 둘 무렵,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할까. 어떻게 먹고살까. 대답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유난히 또렷이 떠오른 것은 글이었다. 빗소리 들으며 책 읽던 즐거움, 그 때문에 상을 받은 독서 감상문, 칠판 한 귀퉁이를 그럴싸하게 장식한 대학입시 응원 글, 빼곡히 채워진 일기장, 여기저기 남겨진 젊은 날의 낙서, “젊음은 몸부림이다”라고 써 내려간 학회지 서문, 인상적인 자소서 때문에 나를 뽑았다는 첫 번째 회사, 인터넷 비즈니스를 다룬 국내 처음의 웹진 창간, 딱딱한 경영 혁신 소식을 풀어서 사보에 싣기, 동네 백일장 대회에서 받은 금테 두른 상장과 상품권까지. 뚜렷한 재능이라 부를 수는 없었지만, 내 삶의 실타래에는 늘 읽고 쓰는 시간이 길게 엮여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뭐 할 거냐는 후배 질문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읽고 쓰는 일”. 그것은 내 마음이 끌리는 일이었다.


이제 알겠다. 적응은 살아남는 기술이지만, 동시에 멈춤의 다른 이름이었다. 변화하지 않는 적응은 진화가 아니라 정체다. 진짜 적응이란 환경에 굴복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를 선택─혹은 창조─하는 일이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방향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세상에 나를 맞추는 일은 결국 나를 잃고, 꿈을 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건 내 마음과도 다른 길이다.






*이 글은 “멈춤(02), 신호(17)"와도 이어집니다.



*적응 2는 적응 1과도 이어집니다.


* 글 싣는 순서를 바꾼 이유


* 주의 사항: 회사 밖에 늘 그리는 자유와 행복과 설렘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글부터 읽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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