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의무의 윤리: 4일의 느낌, 날 것 그대로

by 별들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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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추석 연휴를 조용히 보내고 싶었다.

매일 ‘메리 올리버’만 읽으려 도서관에서 네 권의 책을 빌렸고,

브런치 연재도 잠시 미뤘다.

하지만 조용함이란,

마음먹는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은 늘 바쁘고,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 더 분주하다.

세상만사 참,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다.


20251011_152920.jpg 군산시간여행축제. 2025.10.09~12


책을 읽고 글 쓰기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읽고 쓰는 삶이 누구에게는 한량처럼 비친다.

며칠 전 큰 누님이 직접 한 말이다.

“한량처럼 살지 말라”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나를 이해 못 하는 상대방을 원망하기보다

정말 그렇게 사는가 싶어 자기 검열부터 한다.

그러다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어휴~”

그 숨에 삶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남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정년 이후를, 안정된 노후를, 풍족한 여유를 움켜쥐려고 동분서주한다.

그러니 하고 싶은 것을 하려는 사람은

해야 할 것을 이미 끝내 놓았거나 그것에 연연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해야 할 것에 쫓겨 표류하거나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


달리,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은 ‘글쓰기’이고, 해야 할 일은 ‘생계’다.

글쓰기는 욕망이고, 생계는 의무다.

욕망과 의무, 글쓰기와 생계는 언제나 갈등 관계에 있다.

글쓰기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면 더 없는 행복, 아니 커다란 행운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런 행복과 행운을 만나기 어렵다.

돌이켜보니 나는 운이 나쁘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그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다.

전업작가 아닌 직장인으로 읽고 쓰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 관계가 지속되지는 않았다.

욕망을 키우자 의무도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특히 회사라는 안정된 생계 수단을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은 달라졌다.

회사에 있을 땐 날고 싶어 밤하늘을 올려다봤고,

회사를 벗어나서는, 지붕을 받쳐주고 머물고 싶은 ‘벽’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이 아이러니를 블로그에 적었다.


자유가 없는 자는 별을 그리워하고,

자유가 있는 자는 벽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벽이 전혀 그립지 않다.

그 앞뒤 꽉 막힌 벽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생각은 1도 없다.

나는 자유의 냄새를 가슴속 깊이 들이마셨고, 뼛속 깊은 데까지 새겨 버렸다.

벽을 박차고 나온 15년 동안 바깥세상의 바람과 별과 노래를 들으며

위험이 도사리는 밀림 숲 한가운데를 건너며 결코 안락할 수 없고 안정되지 않은

일희일비의 시간을 보내는 삶에 적응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적응에 성공한 것은 아니니 나는 이를 기회로 생각할 뿐이다.

또한 나는 저 건물 속에서 하루하루 지치지 않는 도전을 펼치는 사람들의 일상을 응원하며

그들 역시 어느 순간 이쪽 편으로 건너오리라 생각하며 무한한 동병상련의 신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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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그동안 균형을 잘 잡아줬던 해야 할 일의 ‘영역’에서 지금 변화가 일어나는 중이다.

현재로서는 그저 신호 sign를 판독하고 해석하며 추이를

지켜보는 상황이지만 sign의 주기와 강도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어쩌면 타오르는 욕망에 눈이 멀어 바람의 방향이 크게 바뀌었음을,

곧 쏟아질 있을 폭우와 닥쳐올 폭풍의 그림자를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큰일이다.

예전에도 그랬듯이 지금의 sign 역시 변화의 조짐이 맞다.


그럼에도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

해야 할 일을 다시 새롭게 조직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축으로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욕망이 없으면 의무는 메마르고, 의무가 없으면 욕망은 허공을 맴돈다.
이 둘 사이를 어떻게 다시 엮어 새로운 질서를 세울 것인가.

여기에 두 가지 조건을 두어야겠다.


하나, 하고 싶은 일로 해야 할 일을 덮어버리지 마라.

글쓰기로 생계를 대신하려 들지 마라.

글쓰기는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호흡이어야 한다.

글쓰기를 돈의 자리에 세우는 순간, 글은 호흡이 아니라 노동이 된다.

글은 내 안의 세계를 확장시키기 위해 쓰여야 한다.

그 세계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말했듯, “내 글쓰기에게 그런 부담을 지우면 안 된다.”

그녀의 말은 냉정한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글이 지녀야 할 자유와 무게의 균형에 대한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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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해야 할 일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놓아버리지 마라.

의무가 욕망의 숨을 막지 않게 하라.

생계를 꾸리는 일이 글쓰기의 불씨를 꺼뜨리게 두지 마라.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우리를 호출하지만,

그 부름에 전부 응답하다 보면 정작 자신에게는 답할 시간이 사라진다.

먹고사는 일은 살아 있음의 조건이지, 살아 있음의 이유가 아니다.

의무는 욕망을 돌보는 토양이 되어야지, 그 뿌리를 메마르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래 전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나는 하나의 ‘신호’를 감지했다.

이 ‘신호’에 대한 이야기를, 내일 브런치스토리로 발행할 생각이다.


이 둘 사이의 절묘한 조합이 가능한가.

해야 할 일을 다시 새롭게 조직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실험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긴 추석 연휴의 4일을 덜어내 아르바이트(사진)를 했다.

아르바이트는 얽매인 노동이 아니라 일시적 노동이다.

욕망을 지탱하기 위해 허락하는 ‘자발적 비자유’다.

아르바이트는 의무의 완화된 버전, 자유를 잃지 않으려는 전략의 실행이다.

그래서 당근 알바에 지원했는데

최근의 알바 경험이 전무(全無 )하고, 고령(?)의 나이임에도 시급 11,000원 알바에 덜컥 합격했다.

덕분에 고독이니 고요니 조용이니 하는 원래의 고상한 추석 계획은 물 건너가고 말았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선택한 알바마저도 한량스런 일(주요 직무가 ‘걷기’에 해당)이었고

아주 오래전 직장이라는 곳에서 즐겁게 했던 일, 그 일을 위해 학원을 다니고,

수료 작품을 만들고, 자격증을 따고 관련 캠프에까지 참여하며 경험을 바탕으로

경력자 모집에 신입으로 입사했던 그 회사에서의 그 일이었다.


세상만사 참, 알 수 없다.


그런데 어찌 보면,

바로 이 알 수 없음이야말로 욕망이 숨 쉬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면,

이러한 일들 즉 무수히 많은 부업과 알바와 해야 하는 일들의 출현과 돌발과 충돌이

단순히 욕망을 위한 조건이나 수단으로 쓰이지 않고,

욕망의 생생한 문법을 완성하는 경험의 장,

나아가 욕망에 필요한 언어와 지혜로 쌓이기를 바라고 바란다.

20251012_184424.jpg 4일간의 축제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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