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야(前夜)
누구에게나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만 받아먹던 새끼 사자가 제 스스로 초원으로 나서는 순간처럼, 사람에게도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때가 있다.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며 도약하는 단계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도약이 언제나 갑작스럽게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이전에,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어 보이는 시간이 있다. 사자는 곧장 사냥에 나서지 않는다. 먹잇감을 찾고 사냥하는 법을 익히고, 자신의 몸과 감각을 깨우는 시간을 갖는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서두르지 않고,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신의 본성을 깨우기 위해 머무는 시기가 있다. 바로, 인생의 전야(前夜)다.
나폴레옹(04 참조)에게 그것은 첫 전투 이전의 8년이었다. 그는 전장에 서기 전, 전략을 익히고 스스로를 단련하는 잠복의 시간을 견뎠다. 에커만에게 그것은 괴테 곁에서 보낸 9년이었다. 니체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양서라 평한 『괴테와의 대화』는 에커만이 한 인간 곁에 오래 머물며 듣고 기록한 시간의 결정체였다. 신화 학자 조셉 캠벨에게 그것은 숲 속 오두막에서의 5년이었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선택한 길이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지 않은 상태로 견뎌낸 고독의 시간이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쉽게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시간이다. 눈에 띄는 성과도 없고, 설명할 만한 이력도 남지 않는 시간. 그러나 결코 다른 어떤 순간과도 바꿀 수 없는, 인생의 대체 불가능한 시간. 흔히 청춘(靑春)이라 불리는 시절이 그렇다.
청춘은 인생의 푸르른 봄날이다. 가능성이 열려 있고, 앞날이 넓게 펼쳐진 시기다. “듣기만 하여도 가슴 설레는” 시간이다. 청춘은 자신감으로 가득하다. 불가능해 보여도 과감하게 도전하고 활발한 기동력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하루는 짧고 세상은 좁다. 지난 추억보다 앞날의 가능성으로 삶은 충만하다.
그러나 현실의 청춘은 그보다 복잡하다. 설렘보다 막막함이 앞서고, 자신감보다 불안이 먼저 찾아오기도 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 공존한다. 청춘은 늘 빛나기보다, 자주 흔들린다.
봄은 겨울을 지나며 온다. 그 겨울이 바로 청춘의 전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는 시간,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각과 선택이 서서히 깨어나는 시간. 청춘은 완성의 이름이 아니라, 깨어남의 이름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기회와 에너지가 넘치는 이 시간을 붙잡아야 한다고. 가만히 있으면 뒤처진다고, 서둘러 목표를 세우고 달려가야 한다고. 실제로 청춘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시간이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누구나 조심스러워지고, 다음 학기 등록금과 취업, 경력과 생계라는 현실의 짐이 어깨 위에 얹힌다. 분홍빛 내일은 언제나 현실 다음에 있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해지고, “뚜렷한 목표를 가져라”는 말에 쉽게 흔들린다. 목표가 없다는 사실이 무능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기보다 떠밀리듯 앞으로 나아간다. 사정없이 자신을 몰아붙여야 안심이 되고, 잠시 머무는 일은 실패처럼 느껴진다. 사실 멈춤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선택이 아니다. 어떤 이에게 멈춤은 사치이고, 위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건네고 싶다.
잠시 멈춰보자. 청춘은 ‘확실한 계획을 완성하는 시기’가 아니다. 계획이 아직 언어를 갖지 못한 시간을 견디는 시기다. 계획은 언제나 현실 앞에서 수정된다. 완벽한 계획은 오히려 기동력과 유연성을 앗아간다. 목표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이 정말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난 것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떠안은 것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정도 동기도 생겨나지 않는다.
전야의 시간은 선택을 미루는 시간이 아니다. 선택이 아직 명확한 말이 되지 못한 상태를 견디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과하지 못하면, 삶은 거대한 물줄기에 떠밀려 흘러간다.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속도만 남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일 때,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전야는 정체가 아니라 준비이며, 실패가 아니라 형성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은 전혀 다른 얼굴을 갖게 된다.
이 시기는 인생에서 가장 비생산적인 때다. 생산적이라는 것은 산출되는 것보다 적은 투입을 말한다. 적잖은 자원이 들어가지만 눈에 띄는 결과물이 적으니 비생산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생산성을 감내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성장 가능성. 미래는 불확실해도, 청춘의 삶은 언제나 자라나고 있다. 그 가능성은 누구나 느끼는 자연스러움이다. 의지가 아니라 본성이다. 봄이 오면 새싹이 돋듯, 청춘은 자라지 않을 수 없는 계절이다.
이 믿음에 확신을 가지며 ‘투입’을 아까지 말아야 한다. 투입은 부모가 챙겨주는 해외연수가 아니다. 유명 강사의 백점 공략법 강의도 아니다. 주어진 일을 늘 같은 방식으로 처리하는 바쁜 일상도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잠시 멈추어 머물기, 그 시간의 확보와 집중이다. 그래서 이 시기는 가장 비생산적으로 보내야 할 때이다. 이것이 게으름이고 외로움이고 설령, 권태여도 좋다.
잠시 머무는 이 시간의 투자야말로 가장 생산적인 일이다. 나폴레옹의 8년, 에커만의 9년, 캠벨의 5년— 탁월했던 사람들이 머물렀던 시간,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과는 딱히 관련 없어 보이는 시간, 한참을 돌아간다고 막막해했을 그 시간, 또다시 펼쳐지는 단조롭고 지루한 반복의 시간들. 그것은 아무래도 적은 투자처럼 보인다. 100세 시대를 사는 우리 역시 ‘그 몇 년의 시간’은 적은 투자다. 그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생산적이기 위한 막연한 투자다. 그러나 그 시간은 삶의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다. 청춘의 시간도 그러하다.
나는 청춘이 잠시 멈추고 머무는 시기를 비생산적이라 했다. 그러나 방금 전에는 생산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리둥절할 것이다. 눈치챘겠지만 생산과 비생산의 판단 기준은 측정 시점에 달려있다. 잠시 멈추어 있는 이 시기, 청춘의 시절에만 한정해 측정하면 ‘당연히’ 비생산적이다. 그러나 인생 전체로 보면 ‘생산적일 수’ 있다. 당연한 결과와 다를 수 있는 결과, 어느 쪽이 나은가는 각자의 몫이다. 판단하기 위해 곰곰이 계산할 필요는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들은 측정할 수 없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이다. 청춘은 통계로 환산할 수 없는 시간이다.
지금 ‘당장’ 뚜렷한 산출물이 없다고, 이 시간을 중단하지 말라. 헛되다며 무작정 앞으로만 나가지 말라. 너무 빠른 피드백과 측정은 바람직하지 않다. 행동의 결과를 바로바로 피드백하는 것은 분명한 목표와 보상을 두고 일하는 조직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나, 인생에는 불친절하다. 스스로의 성찰이 가장 정확한 피드백이다. 열린 마음으로 차분히 들여다보면, 일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 그 마음이면 충분하다. 어떤 일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 자체를 스스로 감당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은 인생의 묵직한 무게를 들어 올리고 버텨내는 기초 체력과 같다.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묵히고 발효시키기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생산과 비생산을 측정하고 판단하는 주체는 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멈추고 머무는 이 시기에는 게으름도, 외로움도, 공허나 권태조차도 허용된다.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읽기다. 청춘은 읽기를 통해 깨어나야 할 시기다. ‘열정페이’ ‘삼포세대’ ‘N잡러’ ‘사오정’─ 이 말들은 청춘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청춘에게조차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사회의 논리다. 타인의 기준에 수동적으로 휘둘릴수록, 청춘은 점점 위축된다. 청춘은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여야 한다.
청춘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읽어야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 안의 신호를 판독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 속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길어 올려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읽기다. 청춘의 읽기는, 자기 존재를 발견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다. 그 싸움을 감당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싸움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삶의 무기를 제대로 쓰려면, 싸움의 기술을 먼저 익혀야 한다.
백윤식 주연의 영화 <싸움의 기술>은 단순한 코미디를 넘어선다. 영화의 배경은 군산. 고향이 군산인 나는, 익숙한 골목과 풍경이 스크린에 펼쳐지는 순간, 이 영화를 ‘보는’ 것보다 ‘읽는’ 쪽에 가까워졌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하다. 청춘이 익혀야 할 첫 번째 기술은 무엇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유쾌하지만 묵직한 방식으로 답한다. 주인공 병태는 맞고 사는 게 일상인 ‘부실 고딩’이다. 그 앞에 싸움의 고수 오판수가 나타나고, 병태는 그에게 싸움을 가르쳐달라며 매달린다. 오판수에게 기술을 배우던 병태는, ‘남의 싸움엔 끼어들지 말라’는 충고를 뿌리치고, 영애를 괴롭히는 깡패 앞에서 동전 던지기 기술을 펼친다. 결과는? 어설펐지만, 병태는 한 걸음 성장했다. 그날 밤, 영애는 대명 독서실 옥상에서 오판수와 이야기를 나눈다. 영애가 ‘선생’에게 말한다. 어린애한테 싸움이나 가르치는 선생이 어딨 냐고. 그러자 싸움 선생은 한방 먹인다.
“싸움이라는 게 주먹질만 하는 게 아니고, 살아가는 인생 그 자체가 싸움인 거야.”
그리고 이어진 명대사─
“뭘 그렇게 봐요?”
“자세히 보니까, 너 참 예쁘다.”
“자세히 안 보면요? 이상해요?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이지!
사람은 자세히 안 보면, 안 보이는 거야.”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세히 보는 것. 눈썰미 좋은 병태에겐 말해주지 않았지만, 눈썰미 없는 사람, 싸우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기술, 그것은 자세히 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관찰’이라 부른다. 사물이나 현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 그것이 청춘이 익혀야 할 첫 번째 싸움 기술이다. 이 싸움의 기술을, 에머슨은 더 본질적인 말로 풀어냈다.
"우리는 시인과 철학자들이 제시하는 삶의 지침을 따르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에 번개처럼 스치는 섬광을 발견하고 관찰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섬광처럼 찾아오는 그 직관을 미처 주목해보지도 않고, 습관처럼 지워버렸던가!"
(랄프 왈도 에머슨, 세상의 중심에 너 홀로 서라, 씽크뱅크)
살아가는 법은 누군가의 지침을 좇기 전에, 스스로 찾아야 한다.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번개 같은 섬광마저, 자세히 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아야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지금 여기 없는 사람조차도 볼 수 있다. 특히 책은, 내 앞에 있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니 자세히 보아야 한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타인도, 세상도.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도.
에머슨이 말한 ‘마음의 섬광’은 새로운 나를 마주하게 한다. 싸움의 고수가 말한 ‘두려움’의 벽을 넘게 만든다. 그러니, 나의 가장 깊은 곳을 번쩍이며 깨우는 그 섬광을 보아야 한다. 그 섬광은 잊혔던 진실을 다시 꺼내고, 흐릿한 나를 선명하게 만든다. 찰나의 순간으로 다가와 작은 틈을 만들고, 가보지 않은 길을 비춘다. 그 예기치 않은 출현이 만들어내는 떨림과 울림이 바로 새로움의 징후다.
하지만 이 빛은 금세 사라진다. 머무나 싶더니 어느새 달아난다. 문제는, 그 순간을 오래 붙들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이 번쩍이는 마음의 불빛을 갈무리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켜지는 이 빛을 어떻게든 잡아야 한다. 그래서 청춘은 멈추고 머물러야 한다. 삶이 빠르면 빠를수록, 이 빛도 더 빨리 사라진다. 자세히 보려면, 속도를 늦춰야 한다.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이렇게 풀어낸다.
“느림이라는 태도는 빠른 박자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느림이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의 재촉에 떠밀려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겠다는 확고한 의지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동문선)
잠시 멈추고 바라보면 무엇이 보이는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놓치고 살았던, 나의 삶— 바로 그 현장이다. 그곳은 매 순간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읽고 있는가?
청춘의 눈에는 불편함이 읽힌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만 하는 불편함, 알듯 알듯 하면서도 끝내 떠오르지 않을 때의 불편함, 자기가 자기 아닌듯한 불편함, 친하지도 않은 사람과 밥 먹고 술 먹어야 하는 불편함,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을 때의 불편함……. 불편함은 말 그대로 우리 몸과 마음이 편하지 않고 괴로운 상태다.
청춘은 그 신호 앞에 번민하고 고뇌한다. 취업과 직장, 경력과 살림살이, 뉴스에 등장하는 현실까지, 모두가 어딘가 불편하다. 게다가 성과를 요구받는 시대에, 아직 결과가 보이지 않는 청춘의 시기는 더욱 궁핍하고 불편하다.
불편한 사람은 묻는다. 지금과는 다른 길, 다른 가능성을 찾기 위해서다. ‘왜 그럴까’, ‘뭐지’, ‘어떻게 될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은 곧 ‘우리 사회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깊은 물음으로 나아간다. 안정적이고 만족한 상태에서는 결코 다른 방향을 탐색하지 않는다. 불편을 생각할수록 다른 무엇을 시도할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여 정신의 물꼬를 틀 수 있다. 신영복 교수는 이 불편의 본질을 간명하게 말했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한다.”
천천히 가면 자세히 보이고 불편이 보인다. 불편은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무뎌진 감각을 깨우고, 멈춰 있던 마음을 도약시키는 일이다.
잠시 멈춤의 순간을, 알베르 카뮈는 『시시포스 신화』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그는 “숨통을 조여 오는 듯한 이 하늘 아래서 사는 일”은 부조리하다고 말하며, 이 삶의 대변자로 신화 속 인물 시시포스를 지목한다. 신들의 노여움을 산 시시포스는,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그러나 바위는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고, 그는 또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 무한 반복의 노동은 대부분에게 ‘쓸모없고 희망 없는 일’로 비친다.
사람들은 이 무용한 노동을 부조리하다 말한다. 그리고 기계적으로 되풀이되는 그의 일상을 보며 언뜻 자기 삶을 떠올린다. 굴러 떨어질 바위를 굴리며 산꼭대기로 향하는 시시포스의 뒷모습에 자기 삶을 투영한다. 하지만 카뮈는 시시포스의 앞모습, 바위가 굴러 떨어진 후 되돌아 내려가는 순간을 주시한다. 고통의 근원을 향해 걸어가는 그 멈춤의 시간을. 그는 말한다.
“시시포스가 특별히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까닭은 바로 이 되돌아 내려가는 순간, 이 잠깐의 휴지(休止) 때문이다. 돌덩이들에 바짝 붙여진 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얼굴은 이미 그 자체가 돌이다! 나는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으로, 그 끝을 알 수 없는 고통의 근원을 향해 다시 걸어 내려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바라본다. 가쁜 숨을 고르는 이 시간, 그의 불행과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다시 찾아오는 이 시간은 의식의 시간이다.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조금씩 더 깊이 접어 들어가는 매 순간, 시스포스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그는 자신의 바위보다도 더 강하다.”
(알베르 카뮈, 시시포스 신화, 연암서가)
거친 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는 이 시간. 카뮈는 고통의 근원을 응시하는 시시포스의 이 시간을 ‘의식을 거행하는 시간’으로 보았다. 시시포스는 포기하지도 회피하지도 않고 묵묵히 그 불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죽음으로 피하거나 희망이라는 “알량한 속임수”로 가리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인다. 카뮈는 고단한 현실과 맞대면하며 쉼 없이 투쟁하는 시시포스를 ‘부조리의 영웅’이라 부른다. 집요함과 통찰로 무장한 시시포스의 포기하지 않는 도전을 ‘반항’이라 말한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나아가는 것, 이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고단한 하루, 되풀이되는 일상. 하지만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고, 다시 나아가게 만드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잠시의 멈춤, 그 한 호흡의 여백이다. 불편하거나 두렵거나,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세계를 다시 생각하고, 삶을 재구성한다.
청춘이 지금 산꼭대기에 있는지, 혹은 내려가는 중인지 중요하지 않다. 청춘은 하나의 산이다. 지금 그는, 무거운 돌덩이를 이리저리 굴려서 자신의 꼭대기에 도달했다. 그 돌을 다시 굴리기 위해 그는 잠시 멈추고 바라봐야 한다. 하나의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 그에게도 집요함과 통찰이 필요하다. 청춘은 쉼표다. 마침표가 아니다.
※ 이 글은 2015년 3월에 낸 『언더라인』을 다듬어 올린 글입니다.
현재, 『언더라인』 개정판을 준비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