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기
오늘(7.26)은 서해랑길 56코스 지킴이 2회 차 활동일이다. 집을 나서기 전, 몽테(길냥이)에게 밥을 주느라 허리를 굽히는 순간 땀방울이 가방을 멘 등에 맺히더니 이내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현관문을 열고 잠시 움직였을 뿐인데, 더위는 그 잠시를 가만있지 않고 사방에서 몰려와 아우성이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걸어야 한다. 아침 햇살에 썬크림이 흘러내려 눈가가 따갑고, 저 앞에는 만만치 않은 오늘의 더위가 버티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그 한가운데를 걸으려 하는가.
군산에서 버스로 20분, 서천버스정류장이 새롭게 단장을 하느라 ‘임시’의 냄새가 진하다. 정류장 곳곳에 붙어있는 글자만 봐도 알 수 있다. 행선지별 버스 시간표, 교통 요금, 타는 곳 위치, 급히 써 붙인 안내문에 각종 홍보 전단까지… 누군가에겐 어수선한 풍경이지만, 나에게는 ‘읽기’의 즐거움이 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정보들이 우리가 찾는 ‘실마리(sign)’라 생각하면, 읽기라는 행위는 더욱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가고자 하는 곳에 이르려면 어떤 정보를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는 ‘신호(sign)’를 보지 못하거나 잘못 해석해 그토록 기다리던 버스를 놓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러니 찾으려는 정보를 제때 얻기 어렵다 생각 들면, 혼자 애쓰지 말고 물어야 한다.
동지산 가려면 어느 버스 타요?
갈목행은 이곳에서 타나요?
건물 바깥 현수막에 목적지별 타는 곳이 적혀 있었다. 그럼에도 이것저것을 묻는 나에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답해주는 안내인이 고마웠다. “여기서 타는 거 맞아요.”
대답은 짧다. 그러나 그 짧음이 길을 선명하게 만든다. 묻는다는 건, 나의 나침반을 확인하는 일이다. 좋은 장면이다 여겨 메모하고 싶었다. 가방에서 수첩을 찾는데, 분명히 챙겼다고 생각한 수첩은 없고 볼펜만 있다. 어쩔 수 없이 염치를 무릅쓰고 종이 한 장 얻어야겠다. “저, 죄송한데요. 이면지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분이 A급 복사용지를 내준다. 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버스에 오르며 기사님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701번 버스에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아침 장을 보고 귀가하는 분들이지 싶다. 맨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차장밖으로 지나가는 짙게 물든 녹색의 벼 이삭, 좁은 마을길을 곡예처럼 빠져나가는 운전 솜씨, 한 사람이 공중에 던진 말을 냉큼 가로채 대화로 이어가는 어르신들. 장에서 돌아오는 며느리를 맞으러 나온 시아버지의 자전거까지. 이 모든 풍경이 내겐 이미 알고 있는 듯 익숙하다. 그런데 오늘은 그 친근함 속에 다름이 느껴진다. 바람이 다르고, 빛이 다르고, 표정과 웃음의 온도가 다르다.
이들은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곳을 오가며 서로 길 위에서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오늘, 길을 묻는 사람이다.
어느새 둥지산 정거장이다.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송석리와석노인회관은 56코스의 종점이고, 57코스의 시점이다. 오늘은 56코스를 역방향(해남 방향)으로 걷는다.
7월 14일부터 8월 24일까지는 혹서기 활동 자제기간이지만, 나는 오늘 걷기로 했다. 폭염도 길의 일부이자, 나를 시험하는 조건이라 생각했다. 이 더위를 즐길 수만 있다면, 한 여름 뙤약볕 아래를 걷는 일은 나의 감각을 낱낱이 확인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편안함이 불편하다 말하는 책(편안함의 습격)도 있지만, 이 더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처방 같은 한방은 니체의 이 말일 것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하지만 말이다.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지려고 이 더위를 무릅쓰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런 실험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길 위에는 사람 하나 없다. 토요일인데도 그랬다. 마을에는 ‘폭염, 온열환자, 야외 활동’이라는 올여름의 핵심 키워드가 등장하는 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멈추고 주변은 조용했다.
이 와중에도 정말 신기한 것은 멍멍이들이다. 지난번 지나갈 때는 그토록 사납게 짖어대는 녀석이 아무리 불러도 제 집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널브러져 있다. 어떤 녀석들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한 나를 향해 짖어대다가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저만치 물러나 감시 모드로 바뀌었는데, 그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
털가죽을 뒤집어쓴 녀석들이 이 뜨거운 날씨에 달궈질 대로 달궈진 보도블록 위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는 것이다. 헐~ 덥지 않을까? 조용히 있을 테니 얼른 그늘로 들어가거라, 한참을 못 본 척해도 소용없다. 저 녀석들에게 이 정도 더위는 더위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나도 참을 만하다 해야지 않을까. 이 정도 가지고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호들갑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어 보인다.
56코스는 해안길 보다 논길이 많다. 바다에 비해 논길에서는 특별한 볼거리가 없지만, 그럴수록 내 안의 목소리를 듣거나 복잡하게 얽힌 생각을 내려놓는 기회가 된다. 지금처럼 더위가 맹렬한 날씨에는 나의 감각들이 훨씬 더 예민하게 살아난다.
모자를 쓰고, 토시를 끼고, 목에 수건을 둘러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리 꽂히는 직사광선은 여전하다. 대부분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되어 있는 길 위에는 발바닥에서 시작된 열기가 발목과 종아리를 타고 역류하듯 올라온다. 거기에 여름의 열기가 공기와 땅을 한꺼번에 데우고 있어, 숨을 들이쉴 때마다 뜨거운 김이 목구멍을 스친다.
논길에는 풀내음과 습한 흙냄새가 있고, 해안가에는 특유의 짭조름하고 비릿한 바다내음이 있다. 축사에서 묻어오는 역한 냄새까지 겹치면, 땀에 절은 몸이 묘하게 가벼워지면서 동시에 지친다는 이중적 감각이 생겨난다. 이때 멀리서 들려오는 트랙터 소리나 마을 방송의 안내음이 무더운 공기 속에 뭉근하게 퍼지면 정신은 흐릿하고 몽롱하다.
그제야 바다와 논길이 주는 해방감은 사라지고, 그 길 위에 나만 있다는 고독감이 밀려온다. 세상은 멀리 물러나고, 오직 나만이 서해안 길 위에 남는다. 길 위에서 바다와 파도와 바람과 매미는 나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 무심함이 나의 고독을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고독은 아무도 나를 바라보지 않는 세계의 한가운데서, 오직 나만이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 순간 길이 묻는다. “너는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가?”
장항도선장. 지킴이 활동이 끝나는 지점이다. 이제부터 정해진 길을 걷지 않으니 좀 더 자유로워졌지만 체력이 바닥났다. 군산까지 되돌아가는 것도 문제다. 아침에 안내인이 알려준 대로 장항정류장에서 군산행 버스를 탈 생각이다. 군산과 장항은 무척 가까운 거리라 생각했는데, 전라북도와 충청남도로 나뉘며 멀어 보였다.
네이버 지도로 확인해 보니 정류장까지는 1.3km 거리다. 도선장에서 앞을 보고 1시 방향이니 직진하다 마음 내키는 지점에서 우회전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또 길을 헤맸다. 문화예술창작공간에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6080 음식골목을 쏘다니다 하나로마트까지 올라갔다. 헤매는 것을 그리 염려하지 않다 보니 마트가 반가웠다. 시원한 물을 싸게 사서 기분 좋았다.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두리번거리자 지나가는 어르신이 딱해 보였나 보다.
어디 찾아요?
장항버스정류장요.
조 앞으로 쭉 가다 나오는 큰 거리에서 우회전해요.
아~ 너무 감사합니다.
그냥 물어보지 그랬어요.
맞다. 길을 모르면 물어보면 된다. 묻는 것은 길을 여는 확실한 방법이다. 그분의 말 한마디가 길을 열었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용기다. 안내인에게 묻고, 어르신에게 묻고, 길을 아는 사람에게 거침없이, 그러나 최대의 예의를 갖춰 묻자. 어디로 가야 할까요?
군산행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짧지만 긴 12시간의 여정. 폭염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었다. 물음 덕분이다. 길 위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면,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물음은 단지 ‘버스가 어디서 출발하나요?’ 같은 표면적인 안내만이 아니다. 그것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라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오래된 물음이기도 하다.
오늘 나는 수없이 물었다. 길을 묻고, 사람을 묻고, 나를 물었다. 묻지 않으면 길을 잃고, 길을 잃으면 나를 잃는다. 묻기야말로 길 위에서의 가장 중요한 장비다. 그러니 걷는 동안 계속 물어야 한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서해랑길 지킴이로 활동하며 코스를 걸을 때마다 읽는 책이 있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와 인생>이다. 캠벨은 유명한 신화학자이고, 인류가 쌓아 온 ‘신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이 우리 삶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안내한다. 책에 이런 글이 있다.
여러분은 숲으로 들어간다.
그것도 가장 어두운 곳을 골라서
그곳에는 아무런 길도 없다.
만약 그곳에 어떤 길이 있다면,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길이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의 길이 아니다.
만약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간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이다.
나의 길을 걷는다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무 길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두려워 말자. 홀로 있을 때, 오직 나만이 나를 바라보는 순간에, 물음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 물음이 필요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지금 너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오해하지 마시라! 서해랑길, 둘레길, 구불길, 천리길... 그 밖의 이 세상 모든 길이 이미 있고 그 길을 걷는다 해서, 다른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서해랑길 56코스에 대한 일반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