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생폼사 희망부

도취

by 별들의강

# 꿈이 있어요

내가 다니는 탁구장에 ‘8부’(=초심부, 희망부)는 거의 없다. 그동안 대회에 함께 나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상위 부수로 올라가더니 어느덧 나 혼자 덩그러니 희망부다. 그래서 나의 희망부 탈출 여부는 탁구장 사람들 입방아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이번에는 희망부를 벗어날 거야. 당연하지!

이러다 희망부 이무기가 되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대회가 다가오자 사람들의 전망이 격려와 버무려져 소곤소곤 귓가에 꽂힌다. 야~ 희망부 탈출 못하면 큰일 날 것 같다. 은근한 가스라이팅 덕분인지 희망부 탈출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 되었다. 이 불확실한 시간을 잘 버티는 것도 지혜이고 용기겠지만, 어쨌거나 뭐가 됐든 혼자 있으면 늘 서럽고 외로운 법이다.


7월 27일, 일요일. 드디어 군산에서 대회가 열렸다. 2025 군산 진포배 동호인 탁구대회. 만 20세 이상의 전라북도탁구협회에 등록된 동호인이면 누구나 참가 가능하다. 이번 대회에 희망부로 출전한 사람은 89명. 이 가운데 4강에 들어야 희망부를 벗어날 수 있다. 탈출에 성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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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구에도 ‘주의’가 있다

주말이건 평일이건 틈만 나면 서브 연습을 했다. 공을 손바닥에 올리고 잠시 멈췄다 띄우고, 떨어지는 공의 낮은 지점에서 긁듯이 공을 쳐내기 위해 허리와 다리를 굽혔다 다시 준비자세! 관장님이 보여준 자세를 무한 반복에 가깝게 되풀이해도 여전히 러버를 스치는 공의 감각은 알듯 알듯 모르겠고, 손목에 힘이 들어가 뻣뻣하고, 떨어지는 공과 라켓이 엇박자를 내고, 통통 튀며 넘어가거나 네트에 걸리는 공을 볼 때마다 드는 아득함과 답답함.


그럼에도 거울을 보며 드라이브 스윙 자세를 다듬고, 3부에서 7부까지 상위 부수 회원들과 실전 게임을 치르고, 주중 2번 이상 꼬박꼬박 관장님 레슨을 받으며 연습에 연습…


그야말로 대회에서 뭔가 하나는 가져오겠다 싶을 만큼 열심이다. 그런데 이러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처음 탁구를 하면서 내가 가진 목표는 분명했다. 관장님은 나에게 어떤 탁구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때 대답한 것. 게임에서 이기는 탁구, 부수를 높이는 탁구가 아니라 멋진 탁구, 폼 나는 탁구. 흔히 말하는 ‘폼생폼사’ 탁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맞다. 난 탁구의 폼생폼사 주의자다.



# 삶을 충만하게 고양시킬 수 있다면

이 길을 가겠다는 데 다들 난리다.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몸이 굳을 대로 굳은 배불뚝이 아저씨 몸으로 그런 욕심부리지 말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나에겐 ‘여전히 꿈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 꿈을 탁구로 풀어가며 ‘선수들’이 보여주는 멋짐 하나만이라도 시합 중에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선수처럼 멋지게 치고 있다는 상상과 그럴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탁구가 내게 주는 가장 큰 효용이다. 여기에 배움이, 그것도 몸으로 할 수 있는 공부가 아직 남아 있다는 사실이 소중하고 각별하다. 그로부터 나는 삶의 새로움을 감각한다.


나는 앞으로도 이 '폼나게' 치는 탁구의 세계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 가만 보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도취’를 가지고 있고, 거기에 빠져 살기도 한다. 니체 역시 이 도취의 힘을 강조한다. 그에게 도취는 고양된 기분, 건강한 힘으로 충일해 있는 상태, 세계를 아름답게 경험하고 해석하는 삶의 충동이다. 그가 말한다. 삶을 충만하게 하고 고양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술뿐이라고, 도취가 예술에 이르게 한다고.


덕분에 이렇게 생각한다. 탁구가 삶을 충만하게 고양시킬 수 있다면, 이 또한 예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을 시도하는 생활체육인으로서 나는 삶의 예술가라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탁구는 언제나 폼생폼사여야 한다. 그런데 그게 탁구뿐이랴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읽기이고, 걷기이고, 쓰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자기 삶을 충만하게 고양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삶의 예술가다.



# 현실 vs 이상

'폼생폼사'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지인이 찍어 준 경기영상을 시청할 때다. 그 전까지 나는 펄펄 난다고 생각한다. 땀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경기 때마다 뻘뻘 흘리는 몇 바가지의 땀을 보고, 헉헉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쏟아내는 기합 소리를 들으며, 분명 나는 지금 ‘아주’ 잘하고 있다는 시그널로 해석한다.


그런데 지인들이 찍어 준 영상들은 하나 같이 이상하다. 저 화상이 바로 나란 말이야? 내 목소리를 녹음해 다시 들으면 낯설게 들리는 것처럼, 내 경기를 찍은 저 모습도 혹시 그런 해석불가한 이상함이 깔려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곤 한다. 동시에 나의 자뻑 혹은 폼생폼사 정신의 대단함에 놀라곤 한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다른 사람들 경기를 구경한다. 상위 부수 사람들은 어떻게 경기하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좋다. 그러다 보면 가장 부러운 장면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화려한 서브도, 힘찬 드라이브도, 연이은 랠리도 아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로 ‘풋워크’이다. 내가 가장 못하는데, 제일 먼저 기본으로 장착해야 할 기술,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해결하기 불가한 기술.


눈만 높으면 이런 고(苦)에 빠진다. 이때의 답은 문제해결의 기본 원리를 적용해 간단히 구할 수 있다. As-Is(현실)와 To-be(목표)의 간극을 줄이는 것. 현실을 바탕으로 높은 목표를 두지 않는 것. 그렇게 머리로는 판단을 마쳤어도, 마음만은 저 멀리 날아오른다. 저렇게 한 번이라도 여유롭게 나폴나폴 날아봤으면...





# 끝으로,

지금은 “희망” 없는 희망부처럼 보이지만, 간혹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풋워크와는 상관없이 그동안 갈고닦은 (야매성) 서브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린다. 드디어 희망부에 이무기가 나왔다고. 올해엔 꼭 승급할 것이라고. 정말? 정말!


난 그 농담 같은 응원을 진짜로 만들어 보겠노라 속으로 배시시 웃으며, 회원이 건네준 아이스크림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하~ 이가 시리다.


작은 승리의 달달함이 몽글몽글 온몸 가득 퍼지며 진포배 대회까지 이어지면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폼생폼사 탁구의 초심을 버리지 말라는 계시일까. 전날 폭염 속에서 걸은 25km 강행군으로 온몸이 찌뿌둥했는데, 개인전 단체전 모두에서 줄줄이 입상후보자와 만났다. 하~ 예술하기 힘들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참~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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