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장마가 끝나고, 초복도 지나며 여름이 한창이다. ‘여름’이라 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피서와 휴가를 떠올린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멈춰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기대가 피어오른다. 여름은 자유의 냄새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보기 드문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습관처럼 묻는다. “올해는 어디로 갈까?” 누가 뭐래도, 여행은 설렘이고 낭만이다. 특별한 장소를 찾아 떠나는 일은 그 자체로 여름의 중요한 의식이 된다. 멀고 낯선 곳을 이리저리 누비며 걷는 상상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마음 한쪽이 들뜬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풍경들─조용하고, 게으르고, 생각이 머무는 시간 또한 의외의 매력을 지닌다.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질 뿐이지, 알고 보면 오히려 만족감은 더 클 때도 있다. 앞의 풍경엔 ‘남다른 휴가지’가 필요하지만, 이 풍경은 ‘어디서든 가능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몇 해 전부터다. 여름과 휴가가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다 얼마 전에 다시 읽은 책(아래 글의 첫 번째 인용)으로 그 생각은 더 분명해졌다.
‘여름휴가’는 분명 재충전, 힐링, 쉼 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돌아오면 몸은 더 지쳐 있고, 마음은 더 바빠져 있다. 왜일까. 기간이 짧아서일까, 장소 선택이 잘못된 걸까. 아니면 너무 익숙한 ‘여름 풍경’ 속으로 아무런 의심 없이 걸어 들어간 탓은 아닐까. 어쩌면, ‘의식적으로 살라’는 삶의 계명을 잊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개하고 싶다. 내가 이곳, 군산에서 사용하는 여름 나기의 한 방법을.
혹시 당신의 여름이 지겹고, 휴가가 식상하게 느껴진다면 잠깐 다른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떠나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한 번쯤은 머무는 일에도 시선을 돌려보는 것. 혹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럴싸하게 휴가 보내는 나만의 00가지 방법’ 목록에서 살짝 지워버리면 될 일이다.
1. 사람이 많을수록, 성공한 여름휴가?
발 디딜 틈 없는 백사장, 셀카봉과 캐노피가 점령한 해변, 파도 소리보다 먼저 들리는 건 옆 사람의 스피커 음악 소리. 북적북적해야 여름 같다고 믿는 사람은 결국 ‘후회’와 ‘집이 최고’라는 진실을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된다.
2. 계획표는 촘촘할수록, 여행이 알차다?
아침 7시 기상, 8시 조식, 9시엔 카페 줄 서기, 10시는 수상스포츠, 12시 SNS 맛집 예약. 그리고 오후 2시부터는 피로와 예민함이 계획표에 덤처럼 따라온다. 모든 순간이 촬영되고, 기록되고, 인증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과업이다.
3. 이국적인 곳일수록, 진짜 힐링이다?
“멀리, 낯선 곳으로”는 많은 이들의 여름 로망이다. 비행기를 타고 갈수록 더 제대로 쉰다는 생각도 그럴듯하다. 병도 아니고 강박관념도 아닌 개성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치는 건 나처럼 그 ‘휴가지’를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라면, 휴가는 관광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름을 ‘떠나는 일’로만 채우며, 정작 ‘쉬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촘촘한 일정과 타인의 시선을 좇느라, ‘나’는 어느새 그 한복판에서 흘러가 버린 건 아닐까?
여름은 그렇게 흘려보내기엔 아까운 계절이다. 햇살은 뜨겁고, 바람은 느려지고, 삶의 속도를 잠시 늦출 수 있는 드문 시간. 누군가는 그 여름 앞에서 걷기 시작하고, 글을 쓰며, 조용히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그런 여름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바꾸는 시작일지 모른다.
그래서 제안하고 싶다. 조용하게, 게으르게, 유유자적하게. 그렇게 살아보는 여름도 괜찮지 않을까?
“개성은 병도 아니고 강박관념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하는 것과 똑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고, 우리 각자가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로랑스 드빌레르, 모든 삶은 흐른다)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새로운 여름’을 스스로 기획하게 된 것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예전의 나는 모두가 환호하는 여름 속으로 얼결에 따라 들어갔다. 덥고 번잡한 공간에서, 익숙한 자리를 맴도는 반복이 싫었다. 매해 같은 방식으로, 같은 말들을 되풀이하는 여름은 지루함을 넘어 짜증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어느 순간, 나는 다짐했다. 여름을 늦춰야겠다고. 뜨거운 계절일수록 더욱 조용히, 더욱 천천히, 더욱 깊게 살아야 한다고. 급히 흘러가는 풍경을 쫓지 않고, 때로는 뜨거운 햇살에 정면으로 부딪히며, 나만의 속도로 여름을 통과해 보기로.
그것은 단지 여름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나답게 살려는 법을 다시 익히는 훈련이기도 했다.
그 여름의 시작은 ‘조용함’이었다. 대도시의 소음을 벗어나, 더 구체적으로는 서울을 떠나 군산으로 내려왔던 그 시기. 나는 스스로에게 ‘하지 않음’을 허락했고, 마침내 자유롭게 사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 여름’부터, 나는 조금은 더 조용했고, 게을렀으며, 그리고—조심스럽게나마—철학적이려 했다.
조용한 여름은 멀리 있지 않다. 내 감각이 그리워하는 곳, 나 자신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시간, 그 둘만 있으면 충분하다. 우리는 너무 오래 ‘소란’을 여름이라 믿으며 달려왔다. 북적이는 사람들, 요란한 음악, 끊임없는 알림 속에서, 진짜로 쉬어 본 적은 있었을까. 이제는 조용함 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이 여름, 당신의 감각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 보자.
예를 들면, 목적 없는 산책.
월명공원에 오르며 호수를 한 바퀴 돌아보고, 구도심의 골목길을 따라 걷는다. 또는 신시도의 몽돌해변에 들러 바람이 전하는 노래에 귀 기울이고, 대각산 능선을 따라 한참을 걸어보자. 동네 한 바퀴만 돌아도 괜찮다.
배차 간격이 긴 버스, 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혹은 목적지까지의 도보. 중요한 건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머무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조용한 여름은 ‘자기만의 감각’을 회복하는 계절이다. 타인의 기준이나 기대에 자동 반응하지 않고, 그 사이에서 묻는다. “내가 진짜로 느끼는 건, 무엇일까?”
한낮의 적막, 그늘 아래 벤치, 자판기 커피 한 잔, 무심히 스치는 바람, 이름 모를 새의 울음, 제 할 말을 반복하는 파도, 사람 없는 길, 종이 노트 위에 흘러내리는 글자들… 조용한 여름은, 그런 것들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 보는 시간이다.
꼭 기억해 둘 것 하나. 한 번쯤은 ‘가족의 여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여름을 보낼 것. 혼자가 가장 좋고, 함께라면 아주 조용한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하다. 혼자라고 해서 외딴곳에 고립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다.
게으른 여름은 미뤄둔 과제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하지 않음’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일, 그 자체의 선언이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해 왔다. 해야만 안심이 댔고, 그렇게 존재를 증명해 왔다. 하지만 여름에는, 특히 휴가에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그 방법으로 게으름만 한 게 없다.
예를 들면,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고, 배가 고파질 때 첫 끼를 먹는다. 시간표가 아니라 배꼽시계를 따라 하루를 보낸다. 알람을 끄고, 일정은 비워두고, 오늘은 그저 ‘아무거나 하거나 하지 않기’. 책을 ‘다 읽는 것’이 아니라, 문장 하나를 하루 종일 음미한다.
은파호수 근처든, 구도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든, 혹은 집에서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느려지는 자신의 리듬에 맞춰 사는 하루를 허락하는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을 단지 무기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노동에서의 해방이자, 자유롭고 창의적 삶의 출발점이며, 선한 본성에 다가가는 방법이었다.
“지중해의 햇살을 즐길 수 없는 나라에선 게을러진다는 것이 더 어려워서, 게을러지려면 먼저 대대적인 대중 선전이 필요할 판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꽤 진지한 제안도 남겼다.
“YMCA 지도자들은 내 얘기를 다 읽고 나거든,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라고 선량한 젊은이들에게 캠페인을 시작해 주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헛살진 않은 셈이 될 테니까.”
게으른 여름의 가장 큰 적은 불안과 죄책감이다. 이 소중한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맙소사! 그러나 묻자. 우리는 정말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가? 게으름은 용기가 필요하다. 휴가지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집에서라도 실험해 보자. ‘하지 않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유유자적은 ‘느림’이나 ‘한가로움’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의 의무와 기능에서 물러난 자리에 서서, 비로소 자신에게 묻는 일이다. “지금, 나는 무엇에 몰두하고 싶은가?”
유유자적이라는 말 앞에서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는 몽테뉴다.
1571년 2월 말일,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 ‘자기만의 여가’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가 찾은 여가는 ‘텅 빈 고요’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경계했다.
“여가가 정신을 사방으로 흩뜨려 놓는다.” (루카누스)
-에세 8장.
그래서 그는 하루의 일정표를 지웠지만, 그 여백에 철학과 독서, 사유와 글쓰기를 의도적으로 채워 넣었다. <에세>는 그 몰두의 결과물이다.
유유자적한 여름은, 그런 몰두를 허락하는 시간이다.
군산의 어느 도서관 창가에 앉아 ‘자기만의 주제’를 읽고, 기록해 보자. 종이와 펜으로 짧은 문장을 써 보고, 청암산 둘레길이나 동국사처럼 고요한 장소에 잠시 머물러 보자. 조용한 장소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하루를 통째로 비우되, 단 하나의 몰입을 중심에 두어 보는 것. 그 몰두는 남에게 설명할 필요도, 성과로 남길 이유도 없다. 그것은 오직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이 시간, 나는 무엇에 머물고 싶은가?”
그 질문에 정직해지는 순간, 우리는 유유자적의 문턱에 들어선다.
로랑스 드빌레르는 이렇게 말했다.
“삶의 예술이란 ‘오티움(otium)’으로 ‘유유자적’이다. 비생산적인 것에만 몰두하며, 영혼과 정신을 높이 갈고닦는 시간이다.”
몰두는 노력이 아니다. 오히려 효율과 생산성에서 벗어난 자리, 스스로 그 안에 머물기로 결심한 태도이다.
유유자적은 도피가 아니라 전환이다. 모든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만 남겨 두는 것. 정보와 자극으로 가득한 여름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하며 조용히 스스로를 가꾸는 여름. 그렇게 몰두가 시작되는 자리에서, 우리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조용하고, 게으르고, 유유자적한 여름을 말하니 마치 수행자나 수도승처럼 지내라는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니다. 이것은 여름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열정적으로, 역동적으로, 혹은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보내는 여름 역시 좋다. 거기에 내가 제안하는 여름도 잠시 시도해 보시라.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리듬을 의식해 보자.
조용함은 우리의 감각에 집중하자는 제안이다. 소음에 묻혀 지워졌던 내 목소리, 바쁘게 지나치다 놓쳐버린 고요한 감정들, 그 모든 것들을 조용한 여름 안에서 다시 느껴볼 수 있다. 여름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서 출발한다.
게으름은 목적 없는 하루를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이다.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이어진 고단한 삶, 반복되는 회의와 의무의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존재 자체를 쉬게 해 보는 것. 쉼 없이 살아온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 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비로소 유유자적 머무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것은 어떤 결정도, 해답도 아닌 한 자리에 머무는 태도. 작은 글 하나, 책 한 줄, 벤치 위의 30분을 온전히 살아내는 연습과 같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돌아봐야 할 여름의 자리, 진짜 휴식의 모양이 아닐까. 조용한 여름, 게으른 여름, 유유자적한 여름. 그것은 새로운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내는 여름이다. 그로부터 새로운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면, 충분히 실험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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