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와 동죽, 그리고 어딜 가나

설렘

by 별들의강

# 길 위에서

나에게 여행은 설렘이다. 무엇보다도 설렘, 그 자체다. 비록 10시간도 안 되는 짧은 여행이지만, 거기에 순수여행이 아니라 '코리아둘레길 지킴이' 봉사 활동이지만,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마음은 두근두근한다. 버스 정류장까지 걷는 길, 생수를 사는 마트 계산대, 신호를 기다리는 횡단보도 앞에서조차 오늘의 ‘하루짜리’ 여행은 이미 충만하다. 앞에 무엇이 나타날까 하는 두려움보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을 만날 즐거움이 크다. 기본의 조심성 모드에 마음을 살짝만 열어도 오늘 하루는 분명 달라진다. 어딜 가나, 여행은 늘 새로움 천지다.


문제는 더위다. 열대야가 이어지고, 폭염 주의보가 요란한 7월의 한낮. 아스팔트 위를, 모래사장 위를, 뻥 뚫린 논길을 걸어야 한다. 서해랑길 57코스. 지난 5월에는 정방향, 이번에는 역방향. 선도리 갯벌체험마을에서 송석리와석노인회관까지 15km 길을 걸으며 통행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 보면, 아니 천천히 느리게 가다 보면 반드시 새로운 장면과 마주친다.

20250712_084526.jpg 선도리갯벌체험마을까지는 군산에서 서천까지 시외버스를, 서천에서 선도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20250712_100237.jpg 2025코리아둘레길 군산서천의 4개 구간(55코스~58코스) 지킴이로 활동 중


# 20만 원짜리 부업

선도리 갯벌체험마을. 탁 트인 서해의 갯벌과 하얗고 파란 하늘, 거기에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날은 더워도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온다. 바닷가 쪽이라 안내 리본이 쉽게 닳는다. 리본을 교체하며 걷던 중, 앞서 가던 일행이 묻는다. 이 더위에 뭐 하시냐고, 일 한다 하니, 좋은 일 하신다며 이 근처 차박할 수 있는 데가 있냐고 물어온다. “요 앞 캠핑장도 있지만, 저 앞에 있는 띠섬목해변도 좋다”라고 제법 전문가스럽게 알려줬다.


'띠섬목해변...'하고 여성1이 외우듯 되뇌더니 갯벌로 향한다. 갯벌사진이 필요한 나도 뒤를 따랐다. 바닷가로 멀어지는 여성1을 향해 “손 한번 흔들어 주세욧”하니 그녀가 손을 흔든다. “이뻐요!” 소리쳤다. 씩씩하게 갯벌로 향하는 여성1이 멋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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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1과 반대로, 갯벌에서 나오는 남자를 만났다. 같은 아저씨라 말이 잘 통한다. 뭐예요? ‘자하’란다. 어디다 쓰는 거냐고 여성2가 묻는다. 젓갈도 담지만 이건 팔 거란다. 자세히 보니 새우젓 담는 그런 새우 같아 보였다. 이 정도면 20만 원은 족히 된다며 자랑스러워한다. 아직 오전인데, 저 정도 벌이면 엄청나다 생각 들어 엄지척을 했다. 전업으로 하냐고 물었더니 부업이란다. 와~부러운 부업이다. 살펴보니 자하 잡는 데 쓰는 도구가 따로 있었다. 어딜 가나 전문가들은 자기만의 ‘무기’를 갖고 있다.


# 부녀회 포장마차

지난번 활동에서는 점심시간을 놓쳤다. 바닷가 근처 칼국수집에서 시원한 국물맛의 한 끼 식사를 기대하며 움직였는데 ‘식당’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간 집에서 식사 대접을 받으며 감동받은 일이 있었다.

20250712_115034.jpg 다사항 해변길 모래사장 끝나는 지점 우측(정방향 기준)으로 들어서면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그때 지나친 ‘부녀회 포장마차’에 꼭 들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찾아 들어간 포장마차의 주인아주머니가 바쁘다. 20분은 기다려야 한다며 하얗고 도톰한 아나고를 불판 가득 펼쳐놓고 굽고 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점심 때니 어쩔 수 없다. 기다릴 밖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가게 앞 평상에서 물을 들이켰다. 냉장고에서 꺼낸 ‘시아시’된 물이 목을 타고 들어오자 짜릿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한참을 핸드폰도 확인하고, 화장실도 다녀왔지만 아주머니는 여전히 불판 앞에 있다. 안 되겠다. 술이 진열된 유리창 너머로 ‘종천 막걸리’가 눈에 들어왔다. 하나를 꺼내서 따를 잔을 찾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드디어 움직인다. 막걸리 잔이 따로 있다고, 맞다. 잔이 달라야 한다. 소주는 소주잔에, 맥주는 유리잔에, 막걸리는 찌그러진 양은그릇에 먹어야 제 맛이 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다. 어딜 가나, 세상에는 다 자기 짝이 있다. 그런데 내 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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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고와 펄 벅

아주머니가 바빠 안주 달라는 이야기도 못하고 첫 잔을 쭈욱~ 비웠다. 와~ 다르다. 분명 다르다. 군산보리/쌀막걸리와 종천 막걸리는 달랐다. 맛이 분명 다르지만,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다. 그렇게 아무 안주 없이 마시면, 혹시 아나고 한쪽이라도 나눠 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저씨들이 이야기하느라 바쁘시다. 빈 잔에 막걸리를 다시 따르는데, 그 아저씨들, 군산분들 같기도 한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깜짝 놀랄만한 ‘단어’를 꺼냈다.


펄 벅 그리고 대지! 왕룽과 그의 부인, 첩에 대한 이야기로 친구들에게 뭔가를 설명한다. 세상에. 분명한 것은 그분이 펄벅을 말했고, <대지>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인적도 드문 바닷가 허름한 포장마차집에서 펄벅이라니... 그 순간, 여행이란 책이나 여행 가이드에 없는 걸 발견하는 것이라는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여행의 새로움은 책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문장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나도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심심해서 꺼내든 책,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던 메뚜기떼만 떠오른 바로 그 책. 언젠가 다시 읽겠다고 미뤄둔 책. 그 책이 오늘, 아나고와 막걸리 앞에 나타났다. 좀 더 들으려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소리가 작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더운 날씨로 나의 종천막걸리가 안에서 끓어오르는지 얼굴이 벌게질 무렵, 드디어 칼국수가 나왔다. 또 한 번의 우와~다. 찌그러진, 엄청 큰 양은 냄비째 가져온 1인분짜리 칼국수. 그 안에 푸짐하게 들어 있는, 작지만 하얗고 분명한 선을 가진 조개, 동죽! 부드럽고 쫄깃한 맛의 동죽이 칼국수와 버무려져 짙고 시원한 국물 맛을 내고, 탱탱한 국수가 애호박, 당근과 어우러져 보는 맛까지 더하는 동죽칼국수. 칼국수도 반찬도 막걸리도 금방 바닥이 났다. 후루룩후루룩 먹는 게 맛있게 보였는지, 안 먹겠다던 앞쪽 아저씨들이 아나고를 포장으로 돌리고 칼국수 2인분을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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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2_125410.jpg 동죽, 바로 앞 갯벌에서 3명이 1시간 30분 동안 캐냈단다. 식구들과 먹을 거란다... 사람들 정말 열심히 산다.


# 마음이 걸은 거리, 8km

점심 식사를 거하게 했더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행군’의 시작이다. 선도리 비인해변은 가족단위 여행객들에게 좋고, 다사항의 해변길과 모래사장 길은 혼자 걷는 이들이 잠시 머물며 물멍 하기에 좋은 곳이다. 하얀 백사장, 길쭉길쭉한 소나무들, 한가로운 갈매기들, 마침 밀물이 시작되고 있어(이날 만조는 16시 16분) 파도 소리가 한층 크다.


이 짧은 해변길을 지나면 까마득한 그래서 자연스레 무념무상에 이르는 논길이 펼쳐진다. 쏟아지는 한낮의 뙤약볕에 사람하나 보이지 않고, 지난번에 촐싹촐싹 뛰어오르며 반겨주던 강아지 녀석까지 시무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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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고 걸으며 길을 점검하다 겨우 도착한 송석리와석노인회관. 16시 45분. 물도 바닥났고, 체력도 바닥났다. 회관 앞 평상에 엎어지듯 쓰러졌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했지만 어르신이 누워있는 터라 차마 눕지는 못하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며 친구차를 기다렸다.


램블러(등산어플) 기준 이동거리 16.5km, 아침에 버스를 잘못 내려 2km를 더 걸었는데, 이것저것 합쳐져 갤럭시 ‘헬스’ 어플이 찍은 거리는 26km를 훌쩍 넘어섰다. 그렇다면 8km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그것은 발이 아니라 마음이 걸어간 거리, 발자국이 아닌 이야기로 걸어간 거리, 이게 바로 여행의 설렘?


# 여행은 이야기가 된다

어디에서든 여행이 시작되면, 설렘은 이내 고생과 피로로 바뀐다. 하지만 바로 그 고생 덕분에 여행은 특별해지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품게 된다. 아름답기만 한 길은 없다. 뻐근한 다리, 타는 목마름, 숨 가쁜 호흡이야말로 여행을 진짜 ‘여행’으로 완성시킨다. 그러니 오늘 하루의 26km는 단지 걷기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나만의 이야기로 새겨진 삶의 한 페이지였고, 내가 여전히 삶을 감각하고 있다는 작지만 또렷한 증거였다. 이제 당신 차례다. 어디든 떠나도 좋다. 어딜 가도, 새로움은 늘 길 위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


오지: 낯선 지역, 어쩌면 덜 알려진 지역을 가리킬 때 쓰는 용어. 이런 지방은 관광지 바깥에 위치한다. 이처럼 가게 뒷방에 깊이 숨겨진 보석 같은 고장에 찾아가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고정관념을 뒤흔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장 피에르 나디르, 여행정신)


연재, 이렇게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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