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의 울타리를 넘어라

멈춤

by 별들의강

마흔. 어떤 사람은 마흔이 생의 마지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한발 한발 신중하게 발을 내민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마흔이었고, 갑자기 '중년'이라 불리게 되었다. 여기까지 이르는데 남다른 고민이나 걱정이 없었겠냐마는, 내 마흔은 유별나게 신경 쓰이거나 지긋하게 누르는 압박 없이 거기에 다다랐다.


노면을 스치며 잠시 흔들리다 안착하는 비행기처럼, 나는 마흔이라는 시간에 조용히 닿았다. 별다를 게 있겠어? 지금까지 달려온 속도 그대로, 삶은 익숙한 리듬에 따라 흘러갈 것이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큰 탈 없이 계속될 거라 긍정하고 낙관했다. 나는 불만도 욕심도 없이 껌딱지처럼 일상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회사도, 그곳에서의 일도 내게 잘 맞았다. 동료들과는 진한 우정과 일에 대한 애착으로 서로를 북돋으며 지냈다. 하지만 해가 바뀔수록 마음 한편에서는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짙은 허무와 권태가 누룩곰팡이 퍼지듯 삶 여기저기에 피어났고, 어떤 것으로도 쉽게 메꿀 수 없는 갈증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어쩌면 그것은 인생 중반에 들어선 이들이 피할 수 없는 속앓이―스멀스멀 일어나는 정체 모를 불안, 어느새 들어서는 막막한 갈림길인지도 모른다.


걱정은 점점 더 깊어졌다. 이 길은 어디까지 이어질까. 끝까지 갈 수는 있을까.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마지막 방’을 향해 달려가는 쥐가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세상이 날마다 좁아지는구나. 처음엔 하도 넓어서 겁이 났는데, 자꾸 달리다 보니 마침내 좌우로 벽이 보여서 행복했었다. 그런데 이 긴 벽들이 어찌나 빨리 마주 달려오는지 나는 어느새 마지막 방에 와 있고, 저기 저 구석엔 덫이 있다. 나는 그리로 달려 들어가고 있다."

(카프카, 작은 우화, 민음사)


가장 현실적인 위협은 직장이었다. 사람들 수명은 늘어나는데, 직장생활의 유통기한은 점점 짧아지는 현실. 내 두려움은 일에 관한 것이었고, 좀 더 정확히는 회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의 실종이었다. 하고 싶어서 했던 일, 재미와 보람을 느끼며 뿌듯하게 여긴 그 일을 멈추고 다른 업무를 맡아야 한다면, 여전히 그 일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회사는 ‘순환보직’이라는 정제된 표현을 쓰지만, 직장에서 새로운 업무란 전문 경력의 단절을 의미하고 다시 새로운 일과 환경에 익숙해져야 하는 원치 않은 변화이기도 하다. 물론 스페셜리스트에서 제너럴리스트로, 깊이에서 넓이로 확장해 간다는 긍정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마흔을 넘기는 직장인에게 일의 변화는 이후의 경력을 어떻게 이어갈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길목에 서게 되고, 이상하리만치 그 시기는 마흔 언저리다.


"여기에서는 보다시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면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단다. 어딘가 다른 곳에 가고 싶다면,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뛰어야만 해!"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현대문학)


루이스 캐럴의 작품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말이다. 그랬다. 붉은 여왕은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하는 ‘여기’는 내가 속해있는 직장이었고, 내가 처한 현실,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작동하는 울타리 안쪽의 안전지대였다. 나는 그곳에 머무르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는 결코 이르지 못했다. 그 정도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갈림길 앞에 선 나에게, “같은 자리를 지키려면 계속 달려야 한다”는 말은 저주의 주문처럼 들렸다.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달려야 하는 삶이란 이 얼마나 팍팍한가. ‘어딘가 다른 곳’에 이르려면 최소 두 배는 더 빨리 뛰라는 이 충고는 또 얼마나 끔찍한가. 더, 더, 더 달려야 겨우 ‘어딘가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다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앞만 보고 뛰는 삶이 맞는가. 어쩌면 그곳은 덫이 놓여 있고 고양이가 길목을 지키는 바로 거기, 마지막 방이 아닐까?


그러나 그곳은 누구에게나 언젠가 도달할 장소다. 다만 나는 아직 중반에도 이르지 않았고, 여정은 한참 남아 있다. 새로운 여행이 필요했다. 언젠가 떠나야 한다면, 그때가 지금이 아니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곰곰 생각했다. 막연히 ‘어딘가 다른 곳’을 향하는 대신, 정말 가고 싶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을 것. 붉은 여왕이 내민 손을 물리치고, 나만의 길을 걸을 것. 지금, 바로 그 여행을 시작하라는 내 안의 목소리에 응답할 것. 달려야만 하는 삶을 잠시 멈추고, 나의 리듬을 다시 들을 것. 문득문득 건너오는 자잘한 삶의 신호를 외면하지 말 것. 자기 자신이 되라는 내면의 호출에 귀 기울일 것!




※ 삶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떠나는 것도, 머무는 것도, 혹은 ‘잠시 멈춤’도

때론 같은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 글은 다만,

‘다르게 질문하기’의 한 방식일 뿐입니다.


이 글을 쓴 뒤, 연재 계획을 바꿨습니다. 리셋!

https://brunch.co.kr/@riverofstars/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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