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친구 사이야

by 별들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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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친구야! 오래전 그녀가 말했다. 그래 친구 맞아, 여자친구! 나는 답했다. 아니 그냥 친구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여친이면 여친이지 그냥 친구가 어딨어? 그녀는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나는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여친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에게 나는 그냥 친구였다니… 나의 마음을 자기 혼자서만 결정한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동안 즐겁고 재밌게 공유한 추억에는 엄연히 내 지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현실을 깨달았다. 이 말에 이런저런 생각을 깊이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말은 '나는 너를 좋아하지 않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녀가 '넌 아직 내 친구야'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은 나에 대한 배려라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래, 알겠어! 그로부터 친구라는 나와 그녀의 관계 설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남녀 사이에 친구라는 관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평소 생각이었기에, 나는 더 이상 그녀에게 마음을 쏟지 않으려 애썼다. 겨울과 봄과 여름과 가을, 혼자였다.


그 일이 있은 후 2년쯤 지났을까. 졸업을 앞둔 겨울,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크리스마스이브 자정 무렵이었다.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어서 다소 시간이 지나 술집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가 청하를 시켰다. 나는 그 술이 탐탁치 않았다. 마시면 정신없이 취한다는 선례가 있었지만,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홀짝홀짝 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취해 버렸다. 결국,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며 비틀비틀, 횡설수설하였다. 그녀가 잡아줬는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나를 허허벌판에 내려놓고 사라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칠흑같이 깊고 어둡고 까만 밤, 고요한 밤, 거룩한 밤에 나는 하늘도 길도 마음도 어두침침한 곳에서 한참을 떠돌아다녔다. 친구 사이라고 선언한 그녀의 이유, 그녀가 다시 찾아온 사정 이야기를 들으려다 제풀에 꺾여 취하고 말았다. 친구라면 함께 취하고 함께 견디고 함께 등을 두드려 줘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시절에, 그녀는 나 혼자 취하게 놔뒀고 혼자 사라졌다.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찾아온 그녀였지만 반갑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씁쓸함. 헛헛함. 묘한 슬픔과 아픔이 구토처럼 올라왔다. 그렇게 나와 그녀는 연인도 친구도 아닌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


작고 동그란 얼굴, 오뚝한 코, 동글동글한 눈, 가느다란 팔, 작은 어깨, 가는 허리, 비음이 섞인 목소리, 소리 없는 웃음, 리본으로 묶은 꽁지머리. 1학년 축제 날, 그녀 뒤로 찬란히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놀라며 설레었던 그때의 마음은 더 이상 아무것도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를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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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친구란 오랫동안 서로 알아가며 지내온 사이, 둘 사이에 충분한 교감이 이뤄지며 다듬어지는 관계를 말한다. 친구라고 말로 꺼내지 않고 쌓여가는 시간만으로 서로를 알아주고 응원하는 존재. 그래서 나는 언제나 '친구들'보다 친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친구들 속에서도 더 잘 통하는 사람이 친구인 셈이다. 친구의 복수형은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니 한 여자가 나를 친구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이 된다. 왜냐면, 친구는 오래 알아온 사이어야 하는데 그녀를 알게 된 것은 2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친’이라면 말은 달라진다. 나의 본능이 그녀를 나의 사람으로 알아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눈에 콩깍지가 씌면 2년은 20년처럼 훅 다가선다. 그런 마음을 품은 나에게 친구라니… 그 당시 시절이 그러했다. 남녀 사이를 친구라고 말하기에 불편한 시대. 물론 요즘은 다를 것이다. 남녀 사이에도 친구라는 심리적 공간이 있고, 친구라는 말도 그전처럼 진한 농도도 아니며 상당히 거품 빠진 가볍고 편안한 존재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을 바꿔야 할까? 만약, 한 여자가 나타나 ‘우린 친구야'라고 ‘다시’ 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제는 묵묵히 듣기만 하겠다. 여친, 남친을 떠나 그냥 친구로 진지하게 생각해야겠다. 시간이 필요하다느니, 편안한 사이가 되려면 많이 어울려야 한다느니, 무엇보다도 많은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느니 꼬치꼬치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OO씨'라거나 '그랬어요, 저랬어요'로 시작하자고 제안하고 싶지도 않다. 편하되 존중하는 사이,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이 정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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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 일인지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을 떠나간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사람에게서 멀어진다. 내 기준만으로 세상을 보는 때문일까? 내 잣대로만 판단해서일까? 허심탄회하게 내뱉는 말들 때문일까? 배려도 존중도 없는 가벼움 또는 경쟁 때문일까? 알다가도 모를게 사람 사이 관계다. 그러니 ‘우린 친구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시 한번 더 생각해야겠다. 그는 나를 진정한 친구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짧게 만났어도 앞으로 오래 함께할 친구라 여겼는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과 행동과 말을 오해했는지도 모른다. 아무 사이 아닌 것보다 친구 사이로 남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또 친구를 잃는 실수를 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삶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전혀 모르게 흘러간다. 그게 비극일지 희극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사, 사람과 사람의 사이. 조금 전까지 분위기가 좋았는데, 갑자기 기운이 바뀌고 자리는 썰렁해지고 말투는 단호해진다. 그렇게 여태껏 좋았던 추억이 악몽으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다. 그렇게 한순간에 바뀐다. 손쓸 새도 없이 하나의 장면이 끝나고 전혀 새로운 장면으로 넘어간다. 낯설고 어색하고 괴로운 시간들. 계속 지켜볼 것인가, 다시 되돌려야 할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다. 다시 처음으로. 그 일 이전으로. 그런데 한 소설가가 들려준다.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흔히들 첫사랑은 만나고 나면 후회한다는데 피차에 늙고 볼품 없어져 만난다 해도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상대방에게 실망할 처지가 아니다. 우리가 살았던 달골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에 지나지 않듯이,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황석영, 해질 무렵)


그 말이 맞다. 그러나 동시에 틀리다.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아도 그 일은 다시 어김없이 등장한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사건은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지금까지 그러하지 않았던가. 다시는 후회하지 않고 시행착오도 겪지 않겠노라 그렇게 그렇게 결심하고 다짐했는데 어느 순간 코앞에 나타나는 그 익숙한 모습, 운명 같은 이별. 그것에 그만 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회한을 쌓는다. 분명 우리 앞에 놓인 날들에는 희망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으나 같은 양만큼의 불행도 슬픔도 아픔도 숨죽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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