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면 하루키처럼?

씨익, 웃음이 나면 충분하지

by 별들의강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하루키가 주간지 <앙앙>에 연재했던 짧은 글 50편을 엮은 에세이다. ‘하루키 라디오’ 시리즈의 첫 작품이며, 이후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로 이어진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마치 라디오 부스에 들어간 진행자처럼 목소리를 낮추고, 어떤 주장도 앞세우지 않은 채 자신이 관찰한 일상을 조용히 들려준다. 내용은 지극히 사소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소함 속에서 드러나는 글쓴이의 솔직한 감각에 독자는 박수를 보낸다.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것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어떻게 이런 글이 가능할까. 이것은 글쓰기의 기술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문장을 만드는 능력 이전에, 세계와 독자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에 가깝다.


하루키는 젊은 독자를 대상으로 쓰는 글인 만큼, 안이한 단정이나 무의식적인 전제를 피하겠다고 말한다. 특히 다음 문장이 눈에 띄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하는 강요하는 글도 되도록 쓰지 않도록 하자,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은 것도 있고,

어떤 때는 옳은 것이 다른 때는 옳지 않기도 하니까요.”

(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후기)


이는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서늘할 만큼 엄격한 규율처럼 읽힌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지,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절제.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를 지탱하는 평온함은, 어쩌면 이 규율에서 나온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그의 “되도록” 이라는 표현 역시 되짚어볼 만하다. 하루키는 쓰지 않겠다고 단정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피하겠다고 말한다. 이는 단호한 선언이라기보다 유연한 절제 혹은 타협에 가깝다. 그러나 옳고 그름에서 거리를 둔 문장은 양날의 검과 같다. 언제든 안전한 중립 뒤에 숨어 해석의 책임을 독자에게 전가한다는 비판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하루키는 바로 그 지점을 의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중립이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함으로 읽힐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자신의 글이 세상에 크게 도움되지 않을 것이라 덧붙인다.


“여기 모은 글들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겠지만,

즐겁게 읽어주신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개인적으로 도움이 된다면 나로선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후기)


냉정히 말해 그 말이 맞다. 그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역시 읽고 크게 도움되는 것은 없다. 하루키의 면도가 나의 일상을 흔들거나 세상을 뒤바꾸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읽다 보면 ‘씨익’ 미소가 번진다. 결국 재미와 즐거움 자체가 독자가 얻는 가장 실질적인 도움인 셈이다.


하지만 글 쓰는 입장에서는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는 욕심만 생기거나, “왜 나는 저토록 쉬운 문장을 쓰지 못하나”라는 안타까움만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욕심과 아쉬움이 내 글쓰기에 도움되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 때문에 하루키 글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이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는 단순한 에세이 모음집이 아니다. 문장을 대하는 하나의 태도를 생각하게 만드는 텍스트로 다가온다. 바로 이것이 하루키 글에서 약간의 도움이라도 건지려는 독자들이 발견하게 되는 또다른 즐거움이 아닐까.


여러분에게는 또 어떤 재미가 있을까. 직접 읽어보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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