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갑자기

장어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

by 별들의강



그의 에세이에서 이런 문장을 만났다.


“그런데 인생의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장어가 좋아졌다.”


‘장어’라는 단어가 눈에 걸렸다.

그래서 장어 대신 다른 단어를 넣어보고 싶었다.

맥주, 재즈, 달리기, 새벽, 커피, 책 읽기, 글쓰기, 침묵, 혼자, 그녀, 비 오는 날, 불편한 의자, 계산되지 않은 시간…

놀랍게도 그 문장은 거의 모든 모든 단어를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참으로 너그러운 문장이다.

내가 이 문장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바로 그 넉넉함 때문이었으리라.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역시 그리 특별하거나 극적인 사건으로만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장어만큼이나 우리의 삶에는 언제인지도 모르는 수많은 시작들,

언제 시작되었는지조차 모르는 변화들로 가득하다.


사랑이 처음 싹튼 순간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을까.

꽃이 아름답다고 처음 느낀 순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외로움이 삶에 스며든 정확한 시점을 특정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변화는 조용히,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변화의 실제 속도와 우리의 자각 사이에는 늘 간극이 존재한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 표현은 바로 그 인지적 착시를 정확히 포착한다.

삶은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불연속적인 사건처럼 인식한다.


결국 인생은 애매모호한 사건들의 연속이다.

또한 이 말은 작정하고 산다고 해서 삶이 반드시 그 작정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다른 작정을 포기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지금 이 시점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벌써 마흔, 내가 벌써 중년, 내가 벌써, 아니 벌써


이러고 사는 게 인생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변화의 시작을 정확히 포착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변화를 문득 자각하는 것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런 우리를 가리켜 ‘항상 뒤늦게 깨닫는 존재’라 비유한 어느 소설가의 말이,

이 글을 쓰던 중에 ‘갑자기’ 생각났다.


또 이 글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28쪽,

‘장어’를 읽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 때문에 썼다.


오늘은 또 어떤 갑자기가 나타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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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2월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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