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장, 6절 읽는 중
해마다 여기저기서 “OOO 트렌드”가 발표된다.
올해는 이게 유행할 것이고, 이것이 대세가 될 것이며,
세상은 이렇게 흘러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설명들.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듯 매끄럽게 지어낸 이야기들.
이것은 삶에 대한 해석이다.
모든 인식은 해석이다.
해석은 사실(fact) 일 수 있고 아닐 수 있다.
진실이라기보다 대개는 허구(fiction)에 가깝다.
해석은 허구이기도 하다.
‘그럴 것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삶은 허구의 승리사다.
돈, 국가, 법, 종교, 도덕, 의미.
이 모든 것은 허구다.
그런데 작동하는 허구다.
허구 없이는 삶은 굴러가지 않는다.
문제는 허구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어떤 허구가 우리를 강하게 하는가,
그리고 어떤 허구가 우리를 약화시키는가이다.
형이상학도 허구이고, 도덕도 허구이며
위대한 해방이라 부르는 자유정신도 허구다.
차이는 단 하나, 효과다
니체는 삶을 강화하고자 한다.
그가 던진 자유정신이라는 허구는
믿으라고 던진 교리가 아니라 살아보라고 던진 형식이다.
니체는 철학을 삶을 해석하는 도구로 쓰지 않고,
삶을 시험하고 강화하는 장(場)’으로 사용한다.
그러한 그의 질문은 ‘삶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가깝다.
니체는 허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허구가 신이 되는 순간을 부정한다.
그는 철학을 예술로 바꾼다.
“철학은 예술이 바라는 바와 같이 삶과 행위에 최대한의 깊이와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1장, 6절, 28쪽)
예술은 삶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고통과 모순, 불합리를 견딜 수 있는 형태로 바꿔서
(=최대한의 깊이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을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
본래 철학도 그러해야 했다.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삶을 가꾸고 단련하는 방식이어야 했다.
그러나 기존의 철학과 트렌드 담론은 삶을 인식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삶이 먼저가 아니라 해석이 먼저가 되고,
실제의 삶은 그 해석을 증명하기 위한 사례로 소비된다.
앎이 최고의 선(善)이라는 믿음 아래,
우리는 살아보지 않은 삶을 미리 재단하는 해석들에 귀를 기울인다.
미래의 흐름을 안다는 안도감에 취해,
정작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를 주저한다.
그러한 우리를 향해 니체는 묻는다.
당신은 지금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남의 해석을 이해하며 머물러 있는가.
(덧붙여)
우리가 매달리는 '트렌드'라는 허구는 대체로 삶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전체'를 설명하려 드는 거대 서사이기 때문이다.
이 매끄러운 설명 앞에서 우리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살아보지 않아도 된다.
니체가 경계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세상을 통째로 설명하려는 형이상학적 유혹을 뿌리치고,
아주 작고 사소한 부분,
지금의 현실에서부터 엄밀하고 냉철하게 삶을 대면하라는 주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1장, 6절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서 강한 학문의 정신"의 내용이다.
그 정신이란, 삶을 대신 해석해 주는 허구를 거부하고, 삶을 직접 견디는 태도를 가리킨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은 이 책에 자주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