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그리고'를 넣지 못했다
읽을라치면 이 책은 벌써 다 읽어버렸다.
하지만 빨리 읽어 치우고 싶지는 않았다.
글이 너무 좋아서라기보다는,
이 분 글을 읽다 보면 자꾸만 ‘토’를 달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읽는 사람을 가만두지 않고 기어이 글을 쓰게 만드니, 이 얼마나 소중하고 얄미운 책인가.
28일까지 반납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아쉬움이 밀려온다.
한 꼭지 한 꼭지 정성껏 읽으며 글을 마구마구 생산하다 보면
구독자도 늘고, 방문자도 늘어 애드 포스트 수익도 좀 나아지고 응원금도 쌓이지 않겠나.
실제로 최근 애드 포스트 수익금이 1500배나 상승했다.
평소에는 1원이 나왔으니 어마무시한 성장이다. (와우!)
오늘은 또 이런 글을 만났다.
저자는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는 할리우드의 유명 스턴트맨 이블 크니블과
작가 오에 겐자부로를 대립시키며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전형적인 스타일로 글을 풀어냈다.
그 글의 마지막을 읽어보자.
“다시 젊어져서 인생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우선 여기까지만 읽어보자.
여러분이라면 어찌하시겠는가.
나는 무조건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쪽이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이 꼬질꼬질한 인생,
어쩌다 이리 꼬여 버렸는지 모를 시간들,
후회와 회한으로 범벅된 한 많고 탈 많은 삶, 되돌려 보고 싶다.
아니, 다시 젊어졌으니 무엇이 되었건 신나게, 즐겁게, 뜨겁게 살아보고 싶다.
그게 솔직한 마음 아닐까.
그런데 이 사람은 싫단다. 그의 답은 이렇다.
“질문을 받는다면, “아뇨, 됐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무서운 것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라.”
이 분에게 인생은 ‘무서운 것’이었나 보다.
그래서 싫은가 보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든다.
그는 인생이라는 계곡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뜀뛰기에서 이미 성공적으로 착지했다.
“세간에서 ‘작가’라 불리며 등 따습고 배부르게 지내면서
변변찮게나마 글을 쓰며 하루하루를 태평스럽게 보내고 있다.”
그러니 위험한 삶, 무서운 인생을 굳이 다시 살려고 하겠는가.
심기가 틀어져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 본다.
나라면 어찌하겠는가.
이미 건너왔는데, 이미 버텨냈는데,
다시 돌아가 그 아찔한 뜀뛰기를 반복하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니 나 역시 “다시 돌아 갈래”라고 말하기 어렵겠다.
젊은 날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같은 건 절대 없다는 철든 어른의 생각 때문이 아니다.
나 혼자 젊어진다고 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의 구조까지 바꿀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엄청난 속도로 벌어지는 기술과 부의 격차,
‘쓸모없음’으로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간 노동,
갈수록 변덕스럽고 사나워지는 날씨.
이 모든 우려가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인간의 본성은 지금의 궤도에서 벗어나지도, 그것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루키의 말처럼 ‘뛰기 전에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뛰어봤자 벼룩이다.
나 혼자 돌아가 봐야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중요한 건 돌아가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내가 딛고 선 발 밑이 지금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번만 잘 건너뛰면 ‘안전한 착지’가 보장되던 시대는 저만치 흘러갔다.
지금은 뛰고, 뛰고, 또 뛰어야만 간신히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대다.
뛰기 전에 보라고?
지금은 공중에서도 발길질을 멈추면 안 되는 전혀 다른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내 관절은 이제 뛰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 들어서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해야 할꼬.
절실하고 간절하면 이 험난한 계곡을 다시 건너갈 수 있을까.
여러분은 지금 착지할 땅을 찾으셨을까.
물음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질문이 다시 쏟아진다.
“이 게임을,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부디,
우리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가득하기를.
(이런 생각이라도 하게 만든 하루키 할아버지, 고마워!)
*인용한 문장
"무라카미 하루키,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뛰기 전에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