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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아 Sep 04. 2018

개강, 선입견, 화장실 변깃물, 자의식

네 가지 생각

오늘 나는 특별히 할 말이 없는데, 실은 눈꺼풀이 반은 감겨 있는데, 그냥 무언가를 쓰고 있는 그 느낌이 그리워서 노트북을 켰다. 녹초가 됐지만 내 소중한 너만은 오늘 꼬옥 보고 들어가고 싶은 마음


아무말. 꼭 위트 있어야 하는 거 아니잖아.

꼭 지면 꽉꽉 채워야 하는 거 아니잖아.

초췌해도, 그냥 만나서 좋은 그런 거 있잖아.

그래도 보기 좋게 큰 따옴표 데코레이션...


오늘 개강을 했다.

사실 개강보다 더 큰 사건은, 조교 근무를 시작했다는 거다. 물론 지난 방학동안도 조교를 했는데, 그 땐 다른 사람을 대신해 임시로 맡은 자리였다. 그런데 오늘부터는 본격적이다. 과사무실 책상벽에 노란 핀으로 꽂아 놓은 조교 일정표. 월요일 칸에 이젠 내 이름 석자가 있다. 방학동안엔 10시까지 나갔지만, 오늘부터 조교 업무는 오전 9시 시작이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걸 정말 힘들어 한다. 그런데 오히려 10시 맞춰 갈 때보다 오늘 컨디션이 더 좋았다. 오전 7시에 비해 오전 6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잠에 대한 미련을 아주 내려놓게 한다.


오늘은 정말 많은 걸 했다. 복사를 이백 장 정도 했고, 전화를 열 통화 정도 주고 받았다. 방학동안엔 하루에 전화 세 통 받으면 일이 많은 것이었으니, 오늘의 업무량은 정말 어마어마했던 거다. 또 과에 새로 들어온 무선 청소기도 조립했다. 연구 조교한테 왜 청소기 조립 따위를 시키는 거야. 잠시 투덜댔지만, 청소기 조립은 솔직히는 아주 재밌었다. 오히려 정말 연구를 시켰으면 좀 귀찮았을 것 같다. 복사도 재밌었다. 호치케스를 리듬있게 하나씩 찍고 있으면 머리에 아무 생각도 없고, 얼마나 시간이 잘 가는지 모른다.


혼자 소동도 좀 있었다. 자두처럼  상큼한 학부생 청년들이 우리 과 스터디룸 카드키를 빌려 달라고 찾아 왔는데, 전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혀. 그래서 이따가 다시 오라고 돌려 보내고서는 한참을 혼자 찾다가, 아직 말도 몇 마디 못 해본 데면데면한 교수님께 카드를 빌려 달라고, 내겐 어려운 전화를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형 책꽂이 한 가운데, 정확히 내 눈 높이의 선반에 있었다. 분명히 다 살펴 봤는데… 뭐에 홀렸나… 처음 겪는 상황에 닥쳤을 때 내 시야가 얼마나 좁아지는지를 보았다.


수업은 야간이라 저녁을 먹고 들어갔는데, 잠이 쏟아졌다. 그래서 정작 수업에 대해선 수업 시간에 마셨던 커피 맛 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강력한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때로 부럽다.

왜 막, 아주 어렸을 때부터 부모한테 단단히 훈육받아 그냥 뼛속까지 각인된 판단 기준 같은 게 있는 사람 있잖아. 자기한텐 너무 당연해서 인식조차 되지 않는 원칙이 있는 사람. 나는 종종 모든 순간을 다 처음 경험해 본 사람처럼 군다. 뭐 가령 어떤 커피가 정말 맛이 없었다는 것을 전에 경험했으면서도 또 다시 그 커피를 선택지로 놓고 고민한다든가. 분명 유사한 상황을 여러 번 겪어서 머릿 속에 매뉴얼이 생겼을 만도 한데, 매 상황 새로 고민하고, 다시 머리를 쓴다. 공들여 머리로 세운 원칙, 노하우, 결심이, 모래 위 글씨처럼 돌아서면 지워지고 흩어져 버린다. 어떤 때는 모든 선택이 동일한 수준의 합리성을 갖고 각자 내 사지를 당겨, 어디로도 갈 수 없다. 교착상태가 길어지면 긴장된 정신이 투툭 투둑 찢어진다.




끝. 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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