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미아 Aug 30. 2021

고시원의 그녀

2탄 공동 여자 화장실과 '그녀'

내가 살던 P고시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겠다.

이 글의 제목 <고시원의 그녀>의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지역 번화가의 상가 건물 4층에 위치한 우리 고시원은 새 입실객이 끊이지 않았다. 새롭게 드나드는 손님들은 주로 20대 여성이었는데, 거의 인근 대형 병원에 잠시 실습하러 온 간호대생들이었다. 걸어서 5분이면 병원에 갈 수 있는 데다, 3분 거리 안에 지하철역, 시내버스, 광역버스 정류장을 포함해 웬만한 편의시설이 다 갖춰져 있었으니 잠깐 지내다 가기론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을 것이다. 한 번 들어오면 2주-3달 정도 머물렀고, 퇴실 후 빈 방이 다시 차는 데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 역시 그런 간호대생 중 한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고시원의 공동 여자 화장실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이 화장실로 말할 것 같으면, 가로, 세로 양팔을 벌리면 양쪽 벽에 손끝이 닿을 것 같은 정사각형 공간에, 좌측에 변기 두 개, 우측에 샤워부스 3개, 입구에 세면대 1개가 들어차 있는데, 변기 칸막이의 문을 열면 샤워 부스 문을 열 수 없고, 샤워부스 안에서 허리 굽혀 ‘안녕하세요,’ 하면 수도꼭지에 이마를 박을 구조였다. 두 변기 중 좌측 변기 칸의 문이 잘 잠기지 않았지만, 별 상관이 없었다. 문을 닫아 놓고 앉아 있으면 폐쇄공포가 엄습해서, 어차피 문을 반쯤 열어두고 볼일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공간이었지만, 나 혼자 쓴다면야 샤워부스도 열어 놓으면 되고, 변기 칸 문도 활짝 열어놓고 쓰면 되니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나는 이 고시원에 홀로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세면, 4시 반에 방 청소, 5시에 소등. 새벽에 가끔 어슬렁거리는 아저씨들은 있었지만, 여성 입실객들은 늦어도 새벽 1시면 자러 들어갔다. 즉, 이후 공동화장실은 완전히 내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나타났다.


어느 겨울 밤. 당시의 여느 날처럼 눈이 벌게지도록 아이돌 덕질을 하고서 보니 또 새벽 네시가 되었다. 세 시에 자기로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또 지키지 못한 데에 묵직한 가책을 느끼며, 세면도구를 챙겨 복도를 나섰는데, 이게 웬 일. 늘 컴컴했던 저 대각선 방이 한낮의 백화점처럼 환한 게 아닌가.


‘누구야, 저렇게 새벽에 불 켜놓고 방문 열어놓는 매너 없는 인간은.’


하며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자그만 두루미 같은 여자애가 “아깜짝야” 하며 과연 놀란 두루미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것이었다. 얼굴에 클렌징 폼 거품이 석고처럼 발렸고, 분홍색 머리띠의 리본이 안테나처럼 솟아 있었다.


나 역시도 준비됐던 황새 눈을 하여, 원시적 견제감, 또래와 마주친 반가움, 그리고 진로가 가로막힌 데서 온 욱신한 불만을 머금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를 그녀가 차지하고 있으니 별 수 없이 샤워 부스로 들어가야 했다. 세면도구를 뻘쭘하게 바닥에 내려놓고, 칫솔에 치약을 묻히고, 수도꼭지 레버를 돌렸다. 둔탁하게 쏟아지는 차가운 물이 타일 바닥을 치고, 종아리로 튀어 올랐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시원의 그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