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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아 Aug 12. 2021

고시원의 그녀

1탄 터줏대감

오피스텔 건물에 화재경보기가 울렸다. 화재 시설 점검 중이라 한다.




언젠가 고시원 살던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이곳에서 보냈던 지난 2년 반의 시간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앞으로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내가 너무 작고 굽어져 버린 시간이어서 숨기고 싶고 아직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소재이지만, 나는 언제나 선뜻할 수 있는 것보다 +1을 더 해내라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인간이기에.





내가 살던 P고시원은 비교적 관리가 매우 잘 되는 곳이었다. 사장과 총무가 근면 성실했고, 무엇보다 이곳의 실세, 장기 거주 터줏대감들이 강력한 모범을 보이고 있었다. 예컨대, 공동주방이 조금만 어질러져 있다 치면 이분들이 동굴 발성을 내며 나와,


"어떤 새끼가 또 이렇게 해놨어? 시발."


"그러게. 어떤 개념 없는 놈이야? 뒤질 놈의 새끼"


"CCTV 뒤져서 찾아내야 돼, 이런 새끼는."


하며 빛이 나게 닦아 놓으니, 과연 얌전히 쓰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쾌적한 이곳에 하나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과민하게 반응하는 화재경보기였다.


이 경보음을 처음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내 교감신경, 반사신경 등 비상사태에 대응하는 내 몸의 능력치를 그렇게 또렷이 목격한 적이 없었다. 정수리부터 뒷골, 뒷목, 척추 하단까지 털이 쭈뼛 서면서, 제일 먼저 무엇을 챙겨야 할지를 생각했다.


지갑. 핸드폰. 노트북. 편지 꾸러미.


'그 외 나머지는 다 타버려도 상관없다.’

‘아니, 그냥 다 타버리면 좋겠다. 귀찮은데.'


…생각하니 참 마음이 스산하다. 꼭 필요하다며, 없으면 큰일 난다며 연신 카드를 긁게 한 이 물건들 중 단 하나도 애정이 가는 물건이 없다니. 사실 지갑, 핸드폰, 노트북마저 다 태워 먹어도 상관없었다. 꼭 지키고 싶은 건 편지 꾸러미 하나였다.


몇 가지 아이템을 품에 안고, 복도를 성큼성큼 뛰어, 코너를 신속히 회전하여, 운동화를 집어 신고 현관문을 나와 섰더니, 내가 1등이었다. 그리고 곧 어리바리한 청년 네다섯 명이 잠옷을 입고 나와 섰다.


그런데 그게 전부였다.


찌르르르르르릉 울리는 이 급박한 와중에 1번 터줏대감이 커피를 저으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곧 경보기는 꺼졌다. 뭐지? 하고 현관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을 때, 2,3번 터줏대감과 눈이 마주쳤다.


"크크크 아가씨 지금 도망가려고 그렇게 다 챙겨 나간 거야?"


"네...... 해결된 건가요? 들어가도 되나요??"


"응. 여봐. 이 아가씨 도망가려고 이렇게 다 챙겨 나갔대."


"하하하하하!"


그렇게 나는 이곳의 경보기가 조금 모자란 놈이란 걸 알게 되었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편으론 저 귀찮은 물건들이 타버릴 기회가 사라졌음에 약간은 실망하여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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