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뮤지컬
밤새 퍼붓는 빗소리에 잠을 설치게 되는 장마철이다.
얼마 전에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허리를 삐끗해 오른쪽 골반과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서 있으면 마리오네트 어깨에 달린 실을 한쪽만 잡아당긴 것처럼 몸의 한 축이 기울어진 모양새가 되었다. 앉아 있어도 다리가 심하게 저려서 결국 자리에 눕고 말았다. 온몸의 촉각이 곤두섰고 통증이 감지될 때마다 괴로웠다. 정신은 또렷한데 옴짝달싹 못 하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자니 감옥이 따로 없었다. 일어서려면 슬로모션으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했다. 먼저, 자세를 고쳐 옆으로 누운 다음 한 팔로 몸을 지탱해 상체를 세워 앉았다.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바닥을 두 손으로 짚고서 천천히 일어섰다. 달팽이 기어가듯 움직이고 있다는 자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일어서기가 온몸의 뼈와 근육의 협동이 필요한 고난도 동작임을 새삼 깨달았다.
통증이 시작된 첫날에는 진통제를 먹어도 통증이 가시지 않았는데 다음 날에는 한결 상태가 나아졌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약 먹으면 정상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통증이 미미해졌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고,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때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무더운 날씨여서 갈만한 실내 공간을 탐색했다. 차로 20여 분 거리의 국립부여박물관에 가기로 하고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박물관에 도착하니 입구에 붙어있는 뮤지컬 공연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공연 시작이 30분 후였다. 사람들이 공연장에 몰려가는 것을 보고 그 무리에 동참해 표를 사서 입장했다. 일반 시민들이 참여한 공연이라고 해서 큰 기대는 없었다. 겨우 회복했으니,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앉아서 공연을 보는 게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그 공연의 제목은 <부여비트>였다. 2000년도에 초연한 미국 뮤지컬, <어 커먼 비트(A Common Beat)>가 원작이다. 후에 그 작품은 일본에서 각색되었고, 2015년에 한국과 일본에 거주하는 100명의 시민이 함께 공연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참여 뮤지컬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 다섯 번의 공연을 했다. 작년에 충남 부여의 청년문화예술공동체, ‘부여안다'가 그곳의 지역적 특성을 참조해 다시 각색해서 <부여비트>의 첫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공연이다. 7세 아이부터 77세 어르신까지 마흔두 명의 시민 배우와 여러 스태프가 석 달 넘게 공연을 준비했다.
<부여비트>의 내용은 이러하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네 개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커먼비트 세계는 각각 고유한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국경을 수호하는 국경경비대 요원의 실수로 다른 대륙 사람들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새로운 언어, 춤과 노래에 호기심을 보이면서도 낯선 존재들을 향한 불안과 긴장이 감돈다. 그들은 참혹한 전쟁을 겪게 되지만, 결국 화해하고 화합한다. 공연 팸플릿에 적혀있듯 “춤과 노래를 통해 국적, 인종, 종교, 지역, 세대, 성별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의 다름을 공감하고 다양함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꽃피우자는 평화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각각 다른 색깔의 부족들이 다양한 춤과 노래를 소개할 때는 보고 듣는 재미가 있었다. 뒤에 전쟁으로 인해 사상자가 생겨 사람들이 온몸으로 울부짖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고통과 절절한 슬픔이 내게 온전히 전해져 가슴 저린 눈물을 흘렸다. 한 시간 남짓 공연을 감상하는 동안 무대 위 배우들의 모습에서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학생, 직장인, 주부, 은퇴자로 살고 있을 그들이 공연을 준비하며 쏟아부었을 시간과 열정이 고스란히 무대의 열기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 열기 속에서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렸다. 대학 시절, 밴드 활동을 하며 공연 무대에 오르곤 했다. 한 공연에서 “연극이 끝난 후"를 노래했을 때, 나를 비추던 조명의 색깔과 온도, 어두운 관객석에서 보이던 낯익은 얼굴들이 기억나고, 마이크를 잡고 있던 손이 떨렸던 것도 생각난다. 공연 준비하면서 악기 연주, 노래 연습에 몰두하던 선후배, 동기의 모습, 연주부와 가창부가 의견 차이로 다투고 다시 화해했던 일, 공연에 필요한 음향 장비 대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가 상점을 돌며 모금했던 일, 공연 팸플릿을 나누어주던 일 등등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는 몸과 마음이 열정과 의지로 충만했었다. <부여비트>의 배우들도 공연 준비하면서 비슷한 과정을 겪었겠다고 생각하니 그들의 연기, 노래, 조명, 의상, 소품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해 보였다.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났을 때 만난 공연이어서였을까? 무대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온몸으로 살아있음을 외치고 자신의 꿈을 펼치는 배우들의 모습이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들 중 누군가는 육신의 고통을 이겨내고 무대에 섰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무대인사에서 한 배우는 우울증으로 힘들 때 공연 준비를 하면서 이겨냈다고 고백하며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며칠간 통증 때문에 우울했던 내게도 큰 위로가 되었다. 앙코르 공연을 마치고 무대에 선 그들에게 아낌없는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조금 더 빨라진 심장박동을 느끼며 공연장을 나섰다.
장맛비가 이어지던 한 주의 끝에 유독 화창한 날이었다.
2023년 7월 4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