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Oct 31. 2023

아람이 아빠

삼촌처럼 따랐던 아저씨가 큰돈을 훔쳐 달아났다. 보증을 선 할아버지는 수억 원의 빚을 대신 떠안게 되어 충격으로 쓰러졌다. 


옆집에 살아서 어릴 때부터 봐오던 사이라 아저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할아버지가 재정 이사로 있던 신용협동조합에 일자리를 알아봐 주셨다. 할아버지는 대출 승인에 필요한 도장을 맡길 만큼 아저씨를 신뢰했다. 아들처럼 생각했던 아저씨가 그렇게 야반도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저씨에게는 내 여동생과 같은 나이의 아람(가명)이라는 딸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아람이네와 같이 놀이공원에 가고, 외식을 하기도 했다. 놀이공원 입장료를 서로 내겠다고 앞다투어 나서는 아빠와 아저씨의 모습이 친형제 사이처럼 좋아 보였다. 국민학교 운동회날에는 나무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앉아 같이 점심을 먹었다. 아람이 엄마가 휴대용 버너에 불판을 올려 불고기를 구워 주셨는데, 달게 양념한 고기가 어찌나 맛있던지 아람이 엄마가 해준 것과 똑같이 불고기를 만들어달라고 엄마에게 부탁했던 생각이 난다.


일이 그렇게 되자 아저씨가 왜 돈을 훔쳐 도망갔는가에 대한 사람들의 추측이 무성했다. 그럴듯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아빠가 부러워서 나쁜 마음을 먹은 게 아니겠느냐는 거였다. 아저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월급쟁이로 살고 있는데, 비슷한 나이에 아버지 덕에 사장이 되어 해마다 차를 바꾸는 아빠를 보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느냐는 거다. 부러운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커지면 범죄를 저지를 만큼 나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돈 만지는 일을 하면서 생긴 견물생심 탓이었을까. 무슨 일이 생기면 이유를 찾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범죄에 정당한 이유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릇된 욕심과 악의가 있을 뿐이다.


그 후로 우리 집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할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와병 생활을 하셨고, 할머니와 엄마는 할아버지를 간병하느라 고생하셨다. 집에 아픈 가족이 있으면 웃다가도 얼굴에 그늘이 지고 주변의 공기조차 무거워진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아빠는 아저씨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수소문 끝에 아저씨가 인도네시아에 있다는 제보를 받고 그곳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몇 번 허탕을 치고 그곳에 선교사로 계시던 이모부와 국제경찰의 도움을 받아 2년 만에 아저씨를 찾아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범인을 잡았으니,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아저씨는 이미 재산을 빼돌려 놓고 위장이혼을 했으며, 감옥살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잘못했고 미안하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아저씨가 횡령한 돈을 대신 갚아야 했고, 그동안 재판을 위해 쓴 변호사비와 아저씨를 데려오는 데 든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상당한 재산을 처분해야 했다. 작은 집 한 채와 논밭 수천 평을 팔았다. 매년 추수철에 소작인이 실어다 주었던 농작물을 더 이상 받아볼 수 없게 됐다.


어릴 적에 할아버지를 따라가 우렁이와 개구리를 잡고 놀던 논이 있었다. “할아버지, 얼마큼이 우리 땅이에요?” 여쭈면 할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먼 곳을 가리키셨다. 할아버지의 손끝을 따라 바라보았던 끝이 아득한 논의 풍경이 어린 마음에도 풍족했었다. 할아버지는 그 논에서 농사를 지어 장사 밑천을 마련해 시내로 나와 주유소를 열었다. 구멍가게로 시작해 큰돈을 벌어 건물을 지어서 이사했다. 아빠가 고등학교를 마칠 즈음 서울의 한 대학에 합격했을 때 할아버지는 서울에 가지 말고 가게를 맡으라고 아빠를 설득했다. 할아버지는 아빠에게 가게를 물려주고 젊을 때 농사짓던 논에서 쌀농사를 지으며 노후를 보낼 심산이었다. 그 논을 팔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아람이 아빠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할아버지는 십 년 가까이 병상에 누워계셨다. 쇠약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산책도 거부하실 정도로 자존심이 강했던 할아버지는 야윌 대로 야윈 몸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후로 20여 년이 지난 지금, 아빠는 그 시절 할아버지의 연배가 됐고, 나는 그 시절 아빠의 나이가 됐다. 우리 가족은 여전히 “절대 보증 서주지 말자.”라는 말을 가훈처럼 여기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아이를 키우다 보니 본받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의지가 더 굳건해진다.


아람이네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훔친 돈을 흥청망청 쓰며 호의호식하고 지냈을까. 화목한 가족의 모습일까. 그 시절 아저씨는 어린 딸을 두고 도망 다니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람이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수많은 질문이 있지만 가장 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아저씨,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하실 건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할아버지의 포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