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
- 톨스토이
한때 나는 프랑스어에 빠져 있었다.
프랑스 하면 떠오르는 낭만적인 이미지와 아름다운 발음이 매력 있어서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문법적으로 정교한 언어라 배울수록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영어도 좋아했지만 그건 대학입시를 위해 해야 하는 공부 같았고 프랑스어는 내가 순수하게 좋아서 하는 공부라 더 애정이 갔다. 그때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자기 전까지 보았던 프랑스어책을 폈다.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에 늘 프랑스어책을 봤다. 재미있어서 열심이었고 열심히 하다 보니 잘하게 돼서 교내 외국어 경시대회에서 상 받을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지역 대회에 나갈 학교 대표를 뽑기 위한 프랑스어 회화 시험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프랑스어 선생님은 내가 좌절할까 봐 걱정스러웠는지 프랑스에 살다 온 학생이 있어서 내가 학교 대표가 되기는 힘들 거라고 미리 언질을 주셨다. 선생님 말씀대로 나는 학교 대표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프랑스어 공부는 내 열정의 시험대 역할을 해주었을 뿐. 내가 마음먹은 것에 얼마나 열정을 쏟아부을 수 있는지 알고 싶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걸로 족했다. 그 몰입의 경험이 불안하고 초조했던 수험 생활을 버티게 해 준 큰 힘이 됐다.
대학에 가서도 불문과 수업을 여럿 들었고 그 언어의 뿌리라고 하는 라틴어 수업도 들었지만 고등학교 때만큼 몰입해서 공부하지는 않았다. 대학에는 열정을 쏟을 대상이 공부 말고도 많았다. 새로운 경험을 추구했고 학과 사람들, 동아리 사람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술잔을 앞에 놓고 대화했다. 책보다는 사람을 교과서 삼아 지냈다. 과제나 시험 때문에 밤을 새운 적은 있었어도 해야 할 일이라 붙들고 있었을 뿐 순수한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학원에 진학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 앎의 즐거움을 누린 시기가 있었지만 그 시간도 학업을 마친 후에는 추억으로 박제됐다.
그런데 다시 몰입할 대상이 생겼다. 나의 일상을 흔들고 있는 그것은 바로 문학이다. 작년 말 수필 창작 수업을 들은 이후 글쓰기에 익숙해졌는데 근래에는 시의 매력에 빠졌다. 요즘처럼 읽고 쓰기에 몰입한 적이 언제였던가. 잠도 별로 안 자고, 안 먹어도 허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상 증세가 시작됐다. 정신이 충만해지니 육신의 필요를 잊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두 손이 내 머리를 흔들어 머릿속의 먼지 같은 지식을 털어내면 나는 그 티끌을 다시 모아 나만의 작고 견고한 성을 쌓아간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붙은 건 이번 여름 한국 방문 때 고향 문학관에서 시 창작 강의를 듣고부터였다.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어렵게 느껴져서 시도하지 못했는데 마침 동네에서 10주에 걸친 시 창작 강좌가 열려서 신청했다. 지역민 대상으로 하는 무료 강좌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강사 K 시인이 유명 일간지의 신춘문예로 등단한 시인이라는 것만 알고 문학관으로 갔다. 그의 첫 강의는 대학원 세미나를 떠올리게 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엄청난 내공이 느껴졌다. 알레고리, 상징, 사실주의, 모더니즘, 동시, 현대시 분석, 시대적 경향, 화자, 바슐라르의 4원소론 등을 주제로 마지막 날까지 밀도 높은 강의가 이어졌고,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세계관을 형성하기 위한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K 시인의 시집을 사서 읽었다. 그는 불우했던 시절의 이야기와 비극적인 가정사를 시로, 에세이로 썼다. 세 번째 시집에 실린 에세이에서 그의 유년 시절을 엿볼 수 있었다.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어린 시절, 겨울이면 강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 위에 올라타 장대로 바닥을 밀어 강을 건너곤 했다. 얼음이 녹아 물에 빠지면 강변에 불을 피워 젖은 옷을 말렸다. 나와 같은 세대라고 믿기 어려운, 부모님 혹은 그 윗세대가 경험했을 것 같은 이야기였다. 얼음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소년의 삶 자체가 시이며 문학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릴 때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천부적인 재능이 있거나 연륜이 있어야 글을 잘 쓸 수 있다고 믿었고, 문학도의 삶은 배고프고 고되다는 생각에 작가의 삶을 추구하지 못했다. 세상일에 미혹되지 말고 나답게 살자는 결심을 한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야 다시 글을 쓰게 됐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왔기에 한눈팔지 않고 평생 올곧게 시인으로 살아온 그가 살아있는 위인처럼 보였다.
세 번의 강의를 남겨두고 나는 미국에 돌아가야 했다. 수업을 끝까지 마치기 위해서 비행기 일정을 미루고 싶었지만 여의찮았다. 게다가 출국 전에 참석할 수 있었던 마지막 수업이 홍수로 취소되어 작별 인사도 못 하고 떠나게 된 상황이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문학 강좌를 주관한 재단에 전화해 미국에 가서도 영상통화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담당자가 강의실에서 영상통화로 연결해 주는 수고를 해주었고, 강사 선생님도 적극 협조해 주신 덕에 시차를 극복하고 끝까지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마지막 강의를 마치고 나서 K 시인은 내가 문학 공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그리고 주제 의식을 갖고 죽을 때까지 파헤칠 거대한 기획을 구상하도록 귀한 조언도 해주었다. 요즘 나는 수험생처럼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강의를 필기한 노트를 들여다보고 추천 자료와 러시아 문학작품, 현대시 목록을 파헤쳐 가며 공부하고 있다.
서울에서 충청도 소읍의 문학관을 매주 찾아와 주었던 K 시인. 나는 그가 여전히 얼음배를 타고 강을 건넜던 시절의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그리고 나의 낭만과 열정도 내 고향에 흐르는 강물처럼 한 방향으로 흘러 언젠가는 문학이라는 큰 바다에 닿을 것이라 믿는다.
그때쯤이면 나도 그 자리에 서서 낯선 곳을 표류하는 누군가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