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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Oct 12. 2023

민박집 아저씨

해마다 여름이 되면 방문하는 작은 마을의 민박집이 있다. 사람들 사이를 벗어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찾아가는 곳이다. 이불 한 채 들어 있는 옷장, 네 칸짜리 나무 서랍장, 빈 책꽂이 하나가 전부인 단출한 방 한 칸에 걸어서 갈 수 있는 한산한 도서관과 강변 산책로가 있는 그곳은 글쟁이가 작업에 몰두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그 집과의 인연은 벌써 십여 년이 됐다. 대학을 갓 졸업한 작가 지망생일 때부터 작가로 자리 잡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그 집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다. 그곳에서 책 읽고 글 쓰며 보내는 한 달은 갑갑한 도시 생활을 견디기 위해 꼭 필요한 재충전의 시간이자 포상 휴가 같은 시간이다.


그 민박집은 오래된 집인데도 퀴퀴한 냄새가 나지 않고 마치 섬유유연제를 뿌려놓은 것 같은 은은한 향기가 난다. 해묵은 살림에 밴 냄새를 퇴치하려면 보통의 노력으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기에 그 집에 갈 때마다 감탄한다. 집안을 둘러보면 어르신 살림답지 않게 군더더기가 없다. 그것이 그 마을의 여러 민박집 중 그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활발한 성격의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살가움도 한몫했지만, 무엇보다도 집안의 쾌적한 공기와 단정한 세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몇 년 전, 아주머니가 떠나고 아저씨는 혼자가 됐다. 아저씨 혼자 사는 집에 젊은 여자가 민박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아저씨도 나도 서로 불편하지 않아서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그 마을의 다른 집이 눈에 차지 않고, 아저씨는 장기 투숙하는 익숙한 손님이 편해서다. 장기라고 해봤자 일 년 중 한 계절도 못 채우는 시간이지만 해를 거듭하며 정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저씨는 보통 깔끔하고 부지런한 성격이 아니다. 비어있는 방 한 칸 쓰게 해 주겠다는 처음의 계약과는 달리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해 주신다. 민박집에서 첫 밤을 보내고 나서 외출하고 돌아오니 허물 벗듯 몸만 빠져나갔던 이부자리와 흐트러져 있던 물건들이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내 물건에 손을 대는 게 달갑지 않아 그냥 두시라고 했는데도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그 집에 있는 동안은 주변 정돈을 바지런히 해야 했다. 내 집이었다면 쌓아두었을 설거짓거리도 바로바로 씻어 놓았고, 대충 벗어놓던 신발 두 짝도 신발장에 나란히 넣어 두었다.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집안을 순찰하는 아저씨 눈에 제자리를 벗어난 물건이 보이면 대신 정리해 주실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런 수고를 당연히 여길 만큼 염치없는 성격이 아닌 탓에 게으른 천성을 거스르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언젠가 한 번은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고 외출했는데 비가 와서 아저씨가 대신 걷어주신 적이 있다. 그 후로는 날씨와 관계없이 마른빨래를 걷어서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방안에 넣어주시곤 한다. 외출을 포기하고 빨래 마르기를 기다리지 않는 한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빨래 걷기 시합에서는 늘 아저씨가 이긴다.


아저씨는 나를 ‘작가 선생님’이라고 부르신다. 나이 들어서도 공부 열심히 하는 게 기특하다고, 나를 보면 미국 유학 간 큰딸 생각이 난다고 하신다. 막내아들은 먼 도시에 살아 자주 못 보고, 가까이 사는 작은 딸과 손주는 자주 만나신다. 나이 드니 아침잠이 없어진다며 이른 새벽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강변 자전거 전용도로를 따라 한 시간 넘게 달리신다. 오전에는 마당에서 텃밭과 화단을 가꾸신다. 대문 옆에 꾸며놓은 장미 기둥 앞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으면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아침잠은 없어도 낮잠은 꼭 주무신다. 저녁때가 되면 동네 친구분들과 모여 끼닛거리가 되는 안주에 술 한 잔 기울이며 하루를 마무리하신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아 보이지만, 여유 있는 노년의 모범답안 같은 삶처럼 보였다. 도시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지면 나도 한적한 마을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망 끝에 물음표 하나가 떠올랐다. 도시에 꼭 살아야 할 이유란 무엇일까?


이번 여름에는 아저씨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됐다. 아저씨는 어떤 전화가 오면 슬며시 마당으로 나가서 받으셨는데, 왜 굳이 밖으로 나가셨나 싶게 큰 소리로 통화를 하셨다. 들어보니, 아저씨 친구분의 여자친구인 ‘여사님'이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그분의 의중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아저씨는 친구 사이에 스파이 노릇은 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여사님의 이야기를 한참 동안 듣고 공감해 주셨다. 남자친구의 친구에게 연애 상담이란 자고로 청춘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삼각관계의 클리셰가 아니던가. 노년의 로맨스도 다를 바 없는 것일까. 집 안으로 들어오는 아저씨에게 방금 통화한 여사님이 아저씨한테 마음이 있는 게 아니냐고 여쭈었더니 흠칫 놀라며 임자 있는 사람은 절대로 맘에 두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치셨다. 당황하는 아저씨가 재미있어서 그분들이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어떠냐고 부추겼더니 그렇게 되면 친구를 잃는다면서 아니 될 일이라고 하셨다.


남의 연애사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조만간 민박집에 새 안주인이 등장하는 것은 아닌지, 그렇게 되어도 다시 이 집에 올 수 있을지, 내 안위와 관련된 생각이 먼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아저씨 처지에서 생각해 봤다. 곧 칠순이 되실 텐데 언제까지고 민박 손님 뒤치다꺼리를 하실 수는 없겠지. 이제 이 집은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맞는 민박집이 아니라 노후를 함께 보낼 동반자를 맞이할 가정집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너그러운 새 안주인이 나와 아저씨의 인연을 이어 가도록 해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다음 여름에도 이곳에 올 수 있기를 바라며 아저씨께 작별 인사를 한다.


“덕분에 잘 지내다가 가요, 아빠. 다시 찾아뵐 때까지 건강히 잘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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