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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Oct 17. 2023

강경 가는 길

신경림 시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내 고향 강경(江景)은 강이 흐르는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과거의 영화로운 모습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번성했던 시절의 영광은 '조선시대 3대 시장, 2대 포구', '구한말 근대도시'라고 적힌 역사책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작은 마을이 되었다. 젓갈의 고장으로 가까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그곳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강경젓갈축제'를 찾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룬다.


강경역에서 나와 직진해 대로를 건너면 왼편에는 시장, 오른편에는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있다. 그 길을 쭉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금강을 배경으로 한 강경포구 축제의 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에 솟아 있는 옥녀봉 정상에 올라서면 강경포구의 풍광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곳에서 탁 트인 하늘 아래 잔잔히 흐르는 금강을 내려다볼 때면 마음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진다. 타지에 살면서 나도 모르는 새 메말라 버린 나의 뿌리가 흐르는 강 위에서 다시 물기를 머금고 튼튼해지는 것을 느낀다. 강경에 살 때는 몰랐던 내 고향의 진가를 그곳을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내가 어릴 때 살던 집은 1층이 주유소 사무실이고 2층은 살림집이었다. 집이 대로변이라 낮에는 늘 손님으로 북적거렸고, 밤에는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창 유리에 비쳐 번쩍였다. 큰 화물차가 지나갈 때면 방바닥에서 진동이 느껴져서 집이 무너지는 상상을 하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싼 채 잠이 들곤 했다. 가끔 한밤중에 가게 문을 쾅쾅 두드려 잠을 깨우는 손님도 있었다. 도로가 앞마당인 집의 밤은 꽤 소란스러웠다.


아침에 학교 갈 시간이 되면 친구가 우리 집 2층 현관문 앞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학교 가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어서 친구는 매일 등굣길에 나를 데리러 왔다.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제시간에 학교 갈 채비를 하지 못해 친구가 기다리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미안한 마음에 먼저 가라고 해도 착한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기다려 주었다.


어쩌다 한 번씩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찍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마치는 날이 있었는데, 그날은 바로 소풍날이었다. 소풍 전날에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잠을 설쳤고, 소풍날 아침에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엄마를 재촉해 서둘러 김밥과 사이다를 챙겨 밖으로 나가 뿌듯한 표정으로 친구를 기다렸다. 우리는 다른 고등학교에 가서 헤어지기 전까지 국민학교, 중학교 내내 등하굣길을 함께 걸었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 건물 이 층 교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운동장 끄트머리에 키 큰 나무들과 테니스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철도가 보였다. 처음 며칠은 기차가 보이면 한참 쳐다보았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지나가는 기차에 익숙해져 곧 흥미를 잃었다. 기찻길이 학교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기차가 오가는 풍경은 대개 고요했다. 가끔 화물열차가 기적을 울릴 때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그 소리에도 점차 무뎌졌다. 수업 중에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산들거리는 나뭇잎들 사이로 기차가 보이면 그 안에는 누가 타고 있을지, 그 사람은 어디에 가고 있을지를 상상해 보곤 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저 기차를 타고 작은 마을을 떠나 큰 도시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도 했다.


기차를 타고 도시로 가려던 나의 꿈은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이루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재미있고 신나는 일은 서울에만 있는 것 같았다. 강경에서 보내는 시간은 심심하고 지루하기만 했다. 서울행 기차를 탈 때면 놀이공원에 가는 것처럼 설렜고, 반대로 강경행 기차를 탈 때는 놀이공원에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처럼 아쉬웠다. 그때는 대학 생활을 즐기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에 강경에 자주 가지 않았다. 다만, 연로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뵙기 위해 한 달에 한 번은 집에 가려고 노력했다.


강경을 향한 여정은 자취방에서 나와 서울역으로 가는 길부터 시작됐다. 주로 제기동역에서 지하철을 탔지만, 날씨가 좋고 시간 여유가 있는 날에는 지하철 1호선 노선을 따라 서울역까지 걸어갔다. 신설동, 동대문, 종로, 광화문, 시청을 지나 서울역까지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를 순례하듯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날에는 더 먼 길을 돌아 오래 걸었다.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해 강경행 무궁화호 열차표를 샀다. 돈보다 시간이 더 많은 학생이어서 늘 새마을호가 아닌 무궁화호 열차를 탔다. 기차가 한강을 건너고 영등포, 수원, 천안, 서대전, 논산을 거쳐 강경에 도착할 때까지 창밖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거나, 선잠을 잤다. 강경역에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는 언제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던 초록색 대문집에 먼저 들러 인사를 드렸다.


대학원에 다니던 시기에는 학과 공부와 조교 업무를 병행하느라 시간에 인색해져 역까지 걸어가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무궁화호 대신 그즈음 운행을 시작한 KTX를 타고 강경에 갔다. 그때, 초록색 대문집에는 할머니가 홀로 지내고 계셨다.


이듬해 미국 유학길에 올라 서울과 강경을 오가던 기차여행을 한동안 할 수 없게 됐다. 그곳에서 공부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며 30대를 보냈다. 그사이 미국 북쪽 끝에서 남쪽 끝의 한 도시로 이주해 자리를 잡았다.


팬데믹 동안 한국에 가지 못하다가 3년 만에 아이와 함께 방문했다. 강경역에 내려 이제는 부모님이 살고 계신 초록색 대문집으로 갔다. 아이 손을 잡고 강변을 산책하고, 옥녀봉에 올랐다. 마음속에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던 강경포구의 경치를 눈으로 따라가며 채색했다. 어린 시절 따분하기만 했던 고향의 풍경은 외지 생활에 지쳐 돌아온 나에게 평온함과 여유를 주었다. 언제라도 떠나고 싶었던 그곳은 이제 언제든지 가고 싶은 그리운 안식처가 되었다. 내가 강경에서 느끼는 정서적 충만감과 마음의 평화를 내 아이도 누릴 수 있기를, 마음의 뿌리가 그곳에 내려지기를 바라며 다시 강경에 갈 그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리움을 실은 마음의 기차는 어느새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강경역에 닿는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 신경림

어려서 나는 램프불 아래서 자랐다,
밤중에 눈을 뜨고 내가 보는 것은
재봉틀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었다.
조금 자라서는 칸델라불 밑에서 놀았다,
밖은 칠흑 같은 어둠
지익지익 소리로 새파란 불꽃을 뿜는 불은
주정하는 험상궂은 금전꾼들과
셈이 늦는다고 몰려와 생떼를 쓰는 그
아내들의 모습만 돋움새겼다.
소년 시절은 전등불 밑에서 보냈다,
가설극장의 화려한 간판과
가겟방의 휘황한 불빛을 보면서
나는 세상이 넓다고 알았다, 그리고

나는 대처로 나왔다.
이곳 저곳 떠도는 즐거움도 알았다,
바다를 건너 먼 세상으로 날아도 갔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
내 망막에는 마침내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실루엣만 남았다.

내게는 다시 이것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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