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을 찾아서, <열두 살 장래 희망>
어느 마을 주민 모두가 복권에 당첨됐다.
그 복권의 이름은 고향 사랑, 당첨 번호는 그 마을의 우편번호, 발행인은 부영그룹의 창업주 이중근 회장이다. 평소 고향 발전에 대해 고민해 오던 이중근 회장은 지난달 자신의 고향인 전남 순천시 서면 운평리의 6개 마을 280여 가구 주민들에게 큰돈을 기부했다. 고향을 지켜줘서 고맙다며 주민의 거주 기간에 따라 각각 2,600만 원에서 1억 원 사이의 금액을 개인 통장으로 입금했다. 그전에는 모교 초중고교 동창들에게도 5천만 원에서 1억 원씩을 지급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한, 아니 어쩌면 현실성이 없어서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나오지 않을 법한 이야기다.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가진 것을 나누기란 쉽지 않은데 고향 사랑이 얼마나 대단하면 그렇게 통 큰 기부를 했을까. 그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이기에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고마웠을까. 그 마음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어떤 마음인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근래에 나는 아이 다 키우고 나서 고향에 돌아가 살고 싶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 근본 바탕, 뿌리가 고향에 있다는 생각이 들고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어서다. 부모님과 동생은 시골 마을이 뭐가 좋으냐며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태어나 성장기를 함께 보낸 친구와 친척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편리한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동안 나는 미국 교외의 한적한 생활에 익숙해져서일까. 요즘 책 읽고 글 쓰는 재미에 푹 빠져있어서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큰 장점으로 느껴져서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 마을은 걸어서 10여 분이면 동네 어디든 갈 수 있어 정감 있고, 발전이 더뎌서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애잔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오래전부터 고향 바라기였던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씨앗으로 있었던 애향심은 중년이 되어서야 싹트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지루하게만 보였던 고향의 풍경에서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는 나이가 되어서인가보다. 팬데믹 기간에 허전했던 마음이 암울한 사회 분위기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수년 만에 고향에 발을 딛는 순간 깨달았다. 내 뿌리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서 빈 쭉정이 같은 마음이었구나.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 고향 발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고향 사람들에게 큰돈을 나눠줄 재력은 없지만, 그곳에 살면서 마음의 꽃씨를 나누고픈 바람이다.
이번 여름에 4학년인 아이는 미국 학교의 여름방학 동안 내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청강생으로 5주를 보냈다. 등교 첫날, 교장선생님을 만나 어릴 때 고향에서 학교 다녔던 이야기, 유학하고 정착한 이야기, 외국에 살다 보니 고향에 대해 애틋한 마음이 커진다고 이야기하던 차에 교장선생님이 내게 부탁을 하나 하셨다. 고학년 학생들을 위한 진로 특강을 해달라는 제안이었다. 현직에 있지 않아서 아이들에게 감화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부담 없이 엄마로서의 경험과 애향심에 관해 이야기하면 된다고 했다. 아이가 청강하도록 허락해 준 학교에 보답하고픈 마음이 있었고 내년에 아이가 그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도록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제안에 응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은 처음이라 준비 단계부터 고민이 많았다. 초등학생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내가 어릴 때 어떤 꿈을 꾸었는지 떠올려 보았고 아이에게도 조언을 구했다. 진로 특강이니 꿈에 관한 내용을 위주로 하고 아이들이 흥미로워할 미국 초등학교 이야기도 포함해서 파워포인트 발표 자료를 만들었다. 아이가 친구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잘 해내야겠다는 부담감이 있어서였는지 잘 때도 강연하는 꿈을 꿀 정도로 온 신경이 강연 준비에 쏠렸다.
드디어 강연 날 아침, 강연장 연단에 서서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나의 꿈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강연을 시작했다. “나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학생은 손을 들어볼까요?” 했더니 학생 중 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손을 든 학생에게 꿈이 뭔지 말할 수 있냐고 물으니 한 학생은 ‘의사'라고 했고 다른 학생은 비밀이라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소중해서 혼자서만 간직하고픈 꿈이라니. 그 마음이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졌다. 강연을 다 듣고 나면 꿈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적어도 하나의 꿈을 갖게 될 것이고, 꿈이 있다고 한 학생들도 자신의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가 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내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떠나 미국에 정착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잠잠했던 아이들은 미국 초등학교 행사 사진을 보여주니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학교에 잠옷을 입고 가는 파자마데이와 밸런타인데이 파티, 핼러윈 파티 이야기에 집중했다. 미국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의 장래 희망 설문 조사 결과를 비교해서 보여준 뒤, 박성우 작가의 『열두 살 장래 희망』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장래 희망이라고 하면 운동선수, 요리사, 과학자, 가수 등 여러 직업을 떠올리곤 하는데 직업은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니 장래 희망을 직업에 국한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과 꿈 위주로 생각해 보자는 내용이다. “엉뚱한 상상을 많이 하는 사람”, “잘 웃는 사람", “지구를 사랑하는 사람", “어린이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 “고민을 잘 들어주는 사람" 등등 책에 나온 33가지의 장래 희망을 목록으로 보여줬다. 그것을 소리 내 읽게 하고 나서 아직도 꿈이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손을 들어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어릴 때는 장래 희망이 “많이 배우는 사람", “여러 가지 악기를 다루는 사람",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매일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예를 들면서 장래 희망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어른이 되어도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꿈에 다가가기 위해 생각과 상상을 많이 하고 일기를 쓰도록 권장했다.
마지막으로 노을이 아름다운 강의 사진을 한 장 보여주며 내가 지구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 장소가 어디인지 맞혀보게 했다. 강경의 강변 풍경인 것을 알아본 학생이 여럿 있었다.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장래 희망이 “강경에 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역사와 문화가 있는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한 것에 자부심을 갖길 바라며 40분의 강연을 마쳤다. 학생들은 큰 박수로 응답하고 강연장을 나섰다. 아이는 내게로 와서 “엄마, 잘했어.”라고 속삭이듯 이야기하고 친구들을 따라나섰다. 아이의 칭찬에 그동안의 수고가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이들이 마음에 담아둘 이야기 씨앗 하나를 선사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 씨앗이 아이들 마음속에서 어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게 될까? 아이들이 고향의 품에서 맘껏 꿈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작성일: 2023년 7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