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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 Dec 25. 2023

모두 너와 함께하고 싶어

친구에게, 진은영 시 <청혼>

카톡으로 날아온 사진 한 장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렁인다. 내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쓴 편지다. J가 친정에서 해묵은 짐을 정리하다 발견했다며 보내왔다. 편지에는 눈이 내리는 이국적인 거리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같은 반이라 매일 보는 사이였는데도 이렇게 낯간지러운 편지를 썼다니, 하면서 읽어 내려가는데 날짜를 보니 성탄절이다. 연말인사를 하고 싶었구나. 그때의 내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오글거리는 내용이라 부끄럽지만, 27년 전에 쓴 편지가 내게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그대로 옮겨 본다.

J에게,
아주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A와 시내엘 나갔었지. 10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했어. 몇 가지 물건을 샀어. 내게 줄 선물 또 네게 줄 선물. 내 것이 네 것이고 네 것이 내 것이니-너무 편하게 생각하는 건가?-굳이 가리지 않는다. 어쨌든 모두 내 취향이니. 96년 한 해 너 때문에 아주 행복했어.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 한 가지 결심한 게 있는데 비밀이니까 몰래 말해줄게. 네가 없을 때에도 널 생각하고, 널 생각할 때 얼굴에 미소가 띄워진다면 널 아주 좋아하는 게 맞지? 나만큼, 나를 생각해 주기 바래. One side love는 슬프니까. 거리를 다니면서, 물건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눈물을 겨우 참았다. 왜 그리 슬펐는지. 오늘은 내가 슬퍼서가 아니었고, 정말이지 인생이란 게 눈물겨웠기 때문이었어.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야. 설명할 수 있는 일들, 설명할 수 없는 일들 모두 너와 함께하고 싶어.

1996. 12. 25.

설명할 수 있는 일과 설명할 수 없는 일을 모두 함께하고 싶다는 고백이라니. 이런 절절한 고백은 연애 상대에게조차 해본 기억이 없다. 나는 애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영화 <사랑과 영혼>에서 연인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데 "Ditto"라고 답하던 남자에게 백배 공감했었다. 그랬던 내가 저리도 말랑한 감정을 가졌고 그걸 표현했다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나를 생각해 달라고 질척거리기까지 했다니. '누구냐 넌!'  정말 내가 쓴 게 맞나 의심스러운 내용이지만, 글씨체는 100% 내 것이 맞다. 친구에게 닿길 바랐던 그때의 마음을 마주하니 열일곱 살의 내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나에게서 너무나도 멀어졌음을 깨닫는다.

얘야, 비밀이면 아예 말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니니? "때문에"를 "덕분에"로, "바래"를 "바라"로 써야지. 짝사랑은 One"-sided" love라고 써야 해. 영어 섞어 쓰는 것보다는 한글로 쓰는 게 나아.

감상에 잠겨 겨우 눈물을 참았다는 아이에게 이렇게 지적을 해야 성이 차는 확신의 T형 인간이 되어 버렸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은 마음에 묻고, 설명할 수 있는 일 중 일부만 조심스럽게 꺼내 보이는 어른이 되었다.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그때의 결심을 나는 꽤 성실하게 지켰다. J와 나는 많은 것을 공유했다. 다음 해에 다른 반이 되었지만, 합창부 활동을 하며 매일 만났고 듀엣곡을 연습해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취향과 성격이 비슷했다.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고, 겉보기에는 털털한 성격이지만 예민한 구석이 있는 것도 닮았었다. 특유의 우울한 정서까지도. 우리는 대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을 서울로 갔다. 다른 학교로 가서 한동안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이듬해 J의 동생이 내 학교 근처 대학에 입학해 J가 가까운 동네로 이사 왔다. 그 후로 우리는 다시 자주 만나 일상을 공유했다. 서로 소개팅을 주선하기도 했고 흑역사로 남은 연애사에서도 주연과 조연을 번갈아 맡아 활약했다.


J와 나는 친구이지만 내가 한 살이 더 많다. 따지고 보면 반년도 안 되는 차이지만, 빠른년생이 아닌 이상 태어난 해가 다르면 학년이 달라지니 내가 제때 고등학교에 갔다면 한 학년 높았을 거다. 그랬다면 J를 만나지 못했겠고 혹여 다른 기회에 만났더라도 말을 놓는 친구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J는 내가 고등학교를 재수한 덕에 만난 친구인 셈이다.


고등학교를 재수해서 가는 경우가 있다는 걸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 나서 알았다. 소읍의 중학교에서 제법 공부깨나 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역 비평준화 고등학교의 벽은 높았다. 다른 일반 고등학교와 같은 일정으로 입시를 치렀기 때문에 그 학교에 못 가면 갈 곳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음 해 고등학교 입시를 대비해 학원에 다니려고 중학교 졸업 후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갔다. 재수하는 동안 인생의 안정 궤도를 벗어나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자주 울컥하곤 했다. 아침에 하숙집에서 나와 학원 가는 길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마주칠 때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매일 일기를 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 문장은 늘 '꼭 합격하자'라는 다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던 그 시절에도 따스한 기억이 있다. 학원 친구 L과 '투게더' 아이스크림을 한 통씩 사서 편의점 앞에 나란히 앉아 퍼먹으며 누렸던 자유시간, 영어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프랑스 동요 'Au clair de la lune'의 멜로디와 가사를 여전히 기억한다. 몇 주에 한 번 주말에 나를 태우러 오고 데려다주셨던 아빠, 김밥을 잔뜩 싸서 깜짝 방문했던 엄마, 시험을 앞둔 나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와 주었던 고향 친구 K와 S를 떠올리면 그 시절 내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먹구름이 걷히는 기분이다.


인생의 암흑기였던 그때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 덕분에 외국어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고, 그곳에서 평생 친구가 될 인연을 만났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대학 입시를 목표로 달려야 하는 예비 고3 생활이 시작됐지만, 교복 입고 학교 다니는 평범한 삶으로 돌아와서 행복했다. 학기 초에 반 친구들은 나이 많은 재수생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했었다. 빠른년생들과는 두 살 차이가 났으니 말 놓기가 쉽지 않았을 거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점차 말 놓고 지내는 편한 친구 사이가 됐다. 말은 놓았지만, 이름 부르기가 어려웠는지 친구들은 나를 반장으로 뽑았고 이름 대신 반장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그 이름으로 불렸다. J만이 나를 한 번도 반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J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그때 J는 헤드셋을 목에 걸치고 교실 뒤편 사물함을 열어 <굿모닝팝스> 책을 꺼내고 있었다.

"너도 굿모닝팝스 들어?"

당황한 듯 흔들리는 J의 시선이 내게 닿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J는 반말로 대답할지 높임말을 써야 할지 고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수줍은 성격 탓에 머뭇거렸는지도. J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슨 대답을 했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역사는 시작됐다.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고마운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포근하게 눈이 내리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생각하며.


2023. 12. 25.


청혼 - 진은영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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