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경 Dec 29. 2023

<2023년>, 엔딩 크레딧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위로 저 위로
...
또 다른 영화는 시작됐고 관객은 하나둘 입장하고 너와 나의 추억만 남아서 위로 날 위로해


엄정화의 노래 <Ending Credit> 가사의 일부다. 영화가 끝난 뒤 '위로'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을 '위로'의 메시지로 포착했다. 끝난 영화에도 추억이 있고 또 다른 영화가 이어질 거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2017년 겨울에 이 곡이 공개됐을 때 감탄 또 감탄했다. 가사, 멜로디, 템포, 안무, 뮤직비디오, 뭐 하나 흠잡을 것 없이 매혹적이었다. 가수 자신의 이야기인 듯하여 더 울림이 있었다. 정상에 올라섰던 가수가 10년 만에 새 앨범을 내는 건 분명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을 거다.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는데 굳이 앨범을 내야 하냐며 주변 사람들이 만류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과거에 머물지 않고 주관 있게 자신의 길을 가는 그가 멋져 보였다. 쌍 엄지를 치켜들고 여왕의 귀환을 환영했다.


예상과 달리 <Ending Credit>은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음원 순위 100위권에도 진입하지 못했다. '아니, 왜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이 아쉬웠고, 내 취향이 대중적이지 않은가 돌아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Ending Credit>은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 하니>에서 엄정화, 이효리, 화사, 제시로 구성된 프로젝트팀 '환불원정대'의 마지막 공연 피날레를 장식해 주목받았다. 명곡은 언젠가는 빛을 발하는 법. 지난여름 엄정화는 tvN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스 유랑단>에 출연해 활약했다. 나이를 초월하겠다고 마음먹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내고 있는 50대 댄스가수 언니, 그의 도전 정신을 닮고 싶다.


엄정화의 동갑내기 친구, 모델 이소라는 최근에 유튜브 프로그램 <슈퍼마켙 소라>를 시작했다. 나이를 초월하자는 엄정화의 말에 새로운 시도를 할 용기를 냈다. 첫 게스트로 신동엽이 출연했다. 23년 전에 두 사람이 헤어진 후 방송에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그들이 나눈 대화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이 있었다.

신동엽: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송두리째 부정하면서 사는 건 너무 후진 것 같은 거지."

이소라: "그래 맞아. 나도 그래.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의 아름다운 추억을 다 끄집어내고 싶진 않아."

두 사람이 연인이었던 시절, 이소라는 청각장애가 있는 신동엽의 형과 대화하기 위해 수화를 배웠다. 가족같이 생각했던 거다. 그렇게도 진심이었던 사람을 지운다면 인생이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누구를 올릴 수 있을까. "아름다웠던 순간, 눈이 부시던 조명들, 영원할 것 같던 스토리, 수많았던 NG 속 행복했던 시간"을 함께했던 소중한 인연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의 인연은 친구로 그쳤지만, 서로 인생의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야 할 인연임은 분명하다. 주연이 되지는 못했지만, 조연이나 '특별출연'으로라도 올려야 할 이름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과거가 없다면 현재란 있을 수 없다. 독일 출신 철학자, 비평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그의 마지막 저서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에서 과거는 소멸한 시간이 아니라 현재 안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시간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웠던 추억을 회상하고 그 기억을 되살려 행복을 찾고자 한다. 과거는 단순히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며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고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으로부터 구원을 기다리는 현재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삶을 주도하는 것은 미래가 아닌 과거인지도 모른다. 이제껏 살아온 삶, 그 기억이 지금의 나를 완성했다. 아름다운 기억뿐만 아니라 흑역사라 여겼던 과거 역시 나의 일부가 됐다.


1940년 9월 27일 벤야민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탈출하던 중 스페인 국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해 48세의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극적인 정치 상황이 초래한 시대 지성의 때 이른,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2023년 12월 27일 배우 이선균이 48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삶을 향한 의지와 희망을 꺾은 공권력과 언론의 폭력에 책임을 묻고 싶다. 부디 우리 모두의 '아저씨'였던 그가 고통 없는 곳에서 평안에 이르기를 바란다.




2023년이 곧 저문다. 내 <2023년>의 엔딩 크레딧을 채워주신 고마운 분들을 떠올린다. 작년에 만나 1년 가까이 함께했던 수필 선생님과 문우들, 멘토가 되어주신 시인 선생님, 시집 읽기와 합평을 함께하는 문우들, 일상을 공유하는 남편과 아이, 곁에서 따스한 눈길과 손으로 온기를 전해준 지인들,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늘 함께인 한국의 가족과 친구, 이곳 브런치에서 글로 만나 소통하며 선생님, 러닝메이트, 치어리더가 되어 주신 작가님들, 그리고 내 글을 읽고 응원해 주신 모든 독자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24년>, 또 다른 영화는 시작되고.


https://youtu.be/v-5jAM0Zt4w?si=rVxy_olw7B-UlAYl

엔딩 크레딧 - 엄정화

처음 본 순간 운명이라고만 딱 느꼈어
한 편의 영화 주인공 같은 난 이젠 없어
아름다웠던 순간
눈이 부시던 조명들
영원할 것 같던 스토리
수 많았던 NG 속 행복했던 시간

(*)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위로 저 위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텅 빈 객석에 나 혼자서
또 다른 예고편이 있지 않을까 앉아있어
화려했었던 추억
우릴 비추던 조명들
영원할 것 같던 스토리
수많았던 NG 속 행복했던 시간

(*) 반복

Close up and dissolve
어두운 조명
마지막 대사
나누며 fade out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둘 퇴장하고
너와 나의 크레딧만 남아서
새까만 프레임을 가득 채워

또 다른 영화는 시작됐고
관객은 하나둘 입장하고
너와 나의 추억만 남아서
위로 날 위로해
매거진의 이전글 라디오 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