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 있는 문화주민센터는 주민들의 핫 플레이스다. 삼면으로 근린공원과 중고등학교를 끼고 있어 풍수지리 및 도시건축학적으로 목이 좋고 여러 운동 종목과 다양한 취미 클래스를 갖추고 있는 탓이 아닐까 싶은데 그냥 가격이 싸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이곳에서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지 두어 달 정도 됐다. 왜 하필 수영이냐면, 사실 수영이 아니어도 됐고 솔직히 수영이 아니길 바랬는데 많고 많은 운동 중 아내가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게 수영이라 그냥 수영으로 낙찰됐다. 어릴 때 아버지가 "우리 가문은 물에서 화를 당할 상이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계셔서 수영장은 물론 바다도 즐겨 찾지 않았는데 늦바람이 들었는지 하다 보니 또 재밌다. 근데 아빠, 그럼 박태환은요.
지하 2층 수영장에는 라인이 정해져 있는데, 입구에서 가까운 순으로 초급, 중급, 고급 라인이다. 그간 자주 빼먹긴 했지만 그래도 두 달이 다 지났는데 선생님이 나를 중급반으로 안 올려주는 걸 보니 단순히 오래 다닌다고 레벨업 하는 건 아닌가 보다.
내가 속한 초급 라인은 매일이 전쟁터다. 다른 라인 대비 평균 3배가량의 사람들이 몰려 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에는 4배가 되고, 목요일에는 2배로 준다. 한 주를 마감하는 금요일에는 다시 2.5배쯤으로 늘어난다. 초급 라인이 들쑥날쑥한 것과 달리 중급, 고급 라인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수는 대체로 일정하다.
사람이 붐비는 초급 라인에서 수영을 하려면 초보 운전자들만 빽빽하게 모여 있는 서울 강남대로에서 운전을 하는 것과 비슷한 각오를 해야 한다. 일단 대규모의 병목 현상으로 25m 편도조차 끝까지 헤엄치기 어렵다. 또, 자유형으로 두어 번 정도만 팔을 내저어도 앞사람 등짝을 손으로 치게 된다. 찰싹. 범퍼카 퍼레이드가 따로 없다. 범퍼(키판)가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등짝을 친 사람과 맞은 사람 모두 물안경 너머로 사과와 민망의 눈빛을 보낸다. 마음이 통했다고 느껴지면 재빨리 앞사람 등에 바싹 붙어야 한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내 등을 맞는다. 찰싹. 맞았다고 드러눕는 사람도 있다.(배영?)
수영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없다. 초보 입장에서는 25m를 완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중간에 바통 터치하듯 등짝을 때리고 걸으며 쉬는 게 차라리 낫다. 각 수영 라인 앞에는 등급별로 팻말이 세워져 있는데 초급 팻말에 적혀 있는 말은 “자유형, 배영, 걷기 가능”이다. 못하니까 배우는 거고 배울 때는 느릴 수도, 걸을 수도 있다.
신기한 것은 주말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평일에는 각자 정해진 라인이 있지만 주말은 셀프다. 하루 중 아무 때나 가서 자유 수영을 할 수 있다. 감시하는 코치님도 없다. 웰컴 투 워터파크.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초급 팻말 앞 라인에 모여든다. 나도 같은 데서 첨벙거린다. 찰싹찰싹. 주말에도 등짝이 고생이다.
바로 옆 중급 라인과 고급 라인은? 텅텅 비어있다. 수영을 중급지고 고급지게 하는 이들은 주말에 바다로 진출하는 걸까. 사람이 적으니 물도 더 깨끗해 보인다. 자괴감이 몰려온다. 저기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저기 가면 안 되나?) 나는 왜 수영을 못해서 이 고생이지. (내가 저기 저 넓은 데 가서 수영하면 민폐일까?) 중고급 라인 사람들은 자세도 멋지네. (사람이 없어서 더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 아냐?)
손해를 보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초급자로 인정하는 나 자신이다. 사람 없는 주말이라면 중급 정도는 욕심내 볼 수 있을 텐데 겸양이 미덕인 사회에서는 물 위에 걸쳐 있는 선 하나 넘기 어렵다. 경계선 너머 중고급 라인 사람들은 길고 넓고 한적한 물에서 마음껏 팔을 뻗고 다리를 첨벙거리며 실력을 더 키워나간다. 격차가 더 벌어진다.
수영이 운전과 비슷하다면 초보 수영자에게 필요한 건 경험이다. 처음엔 무진장 어렵지만 익숙해지면 눈 감고도 할 수 있게 된다.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아 100km/s를 처음으로 돌파하거나, 후면 주차를 멋지게 성공할 때, 모두 잊지 못할 경험이지만 처음엔 다들 빈 주차장 뺑뺑이 100바퀴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언젠가 도로로 나갈 테고, 또 언젠가 마음먹은 대로 차선을 바꿀 수 있게 된다. 실력이 느는 건 바로 그 순간부터다. 지금 달리고 있는 차선을 벗어나지 못하면 경부고속도로를 완주해도 실력이 늘지 않는다. 생각을 규정하면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
타이밍 봐서 이번 주말에는 중급으로 슬쩍 넘어가 봐야겠다. 더 이상의 찰싹은.. 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