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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ya Nov 19. 2019

그녀의 이야기가 궁금한가요?

다시보기_5 책 『빨강 머리 앤』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 머리 앤~” 한 번쯤은 들어봤던 만화영화 노래다. 만화를 보지는 않아서 빨강 머리 앤에 대한 추억은 없지만 익숙한 주제가 탓에 ‘앤이라는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얼굴에 주근깨가 났고, 빼빼 말랐고, 빨강 머리를 가졌구나.’라는 정도는 추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빨강 머리 앤의 존재를 모르고 살다가 지난 10월, 문득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는 철학 고전처럼 잔뜩 무게 잡은(?) 책들을 읽어왔다. 낯선 이름들과 지명들이 난무하는 소설은 기피 1순위였고, 또 함축된 단어들을 곱씹기엔 내공이 부족한지라 시집도 멀리 했었다. 그런데 정말 뜬금없이 소설이 읽고 싶어 서점을 찾은 것이다.


  일단 베스트셀러 판매대를 찾았다. 음원 순위처럼 베스트셀러 순위 또한 논란이 있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요즘의 트렌드를 훑어볼 수 있어 서점에 가면 제일 먼저 살펴보는 곳이다. 소설 분야 1위는 『82년생 김지영』이었다. 동명의 영화도 개봉하고 젠더 논쟁도 심화되며 더욱 화제가 된 책이다. 그 뒤를 이은 책은? 곱게 땋은 머리로 턱받침을 하고 있는 『빨강 머리 앤』(루시 모드 몽고메리 지음, 박혜원 옮김, 더모던, 2019. 원작은 캐나다에서 1908년 출간된 『Anne of Green Gables』로 이 책을 바탕으로 1979년 일본에서 제작·방영된 만화영화 장면들이 삽화로 실렸다.)이었다. 속세에서 동심으로 순간 이동한 느낌이었다. 다른 책은 살펴볼 겨를도 없이 ‘나에게도 아직 동심이라는 게 남아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그렇게 안면도 없는 『빨강 머리 앤』을 선택하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빨강 머리 앤』은 나에게 처음으로 재미있게 읽은 소설책이 됐다.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을 때면 인기 드라마의 떡밥 가득한 예고편을 본 뒤 애간장 속에 일주일을 기다리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엔 각 장이 끝난 뒤 다음 장의 내용을 예고하는 삽화의 영향이 제일 컸다. 여기에 앤의 섬세한 묘사를 따라 읽고 상상하는 재미도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읽듯 쓱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꾹 참고 꼼꼼하게 읽어보니 나의 상상과 삽화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앤에게 정이 들었다. 책 초반 앤이 한 번 입을 열면 길고 길게 말을 늘어놓는 모습은 잠자코 듣다가 점잖게 타이르는 마릴라가 대단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정이 가지 않았다. 마릴라와 매슈가 남자아이를 원한 만큼 저러다 앤이 파양 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앤이 매슈, 마릴라, 린드 부인, 배리 아주머니, 조세핀 할머니 등의 마음에 들기 시작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 내 마음에도 자리 잡았나 보다. “세상에, 앤, 언제 이렇게 컸니!”(p.436)라는 마릴라의 말 뒤에 열다섯이 되며 달라진 앤의 모습이 서술되고, 한 장을 넘겨 너무나 성숙해져 버린 앤의 모습을 봤을 때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꼈다. 이때서야 나는 앤의 좌충우돌 성장기를 그저 팔짱 끼고 지켜본 것이 아닌, 같이 걸어가며 응원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앤이 퀸스에서의 시험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장면(p.491)에서는 하루, 시간, 분 단위로 시험 결과를 기다렸던 나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작품 해설을 제외하고 총 524쪽의 분량으로 꽤 두껍지만 등장인물이 얼마 되지 않는 데다가 앤 중심으로 빠르게 사건이 전개되고 삽화도 있어 읽기에 부담은 없었다. 말괄량이 앤의 행동에 ‘쯧쯧’ 혀를 차면서도 예고 없이 쿵 내 마음에 던져진 말에 감동받기도 했다. 검색해보면 앤 시리즈가 꽤 된다. 앤은 결혼도 하고, 자녀도 꽤 많이 낳았다고 하던데 당분간은 순수한 앤의 모습과 길버트 블라이드와의 열린 결말에 만족하련다. 더 깊게 파고들면 속세에 물든 앤을 만날까 봐, 감정에 솔직한 앤의 모습이 아닐까 봐 무서운 게 솔직한 마음이다.


  아날로그를 사랑하시는 분, 책을 통해 힐링을 하고 싶은 분, 따뜻한 마음을 느끼고 싶은 분, 동심을 돌아보고 싶은 분, 상상 근육을 키우고 싶은 분들에게 『빨강 머리 앤』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 스마트폰에서 검색만 하면 모든 게 나오는 시대, 활자의 시대에서 보다 직관적인 영상의 시대로 옮겨 간 지금 이 책을 읽고 나면 스마트폰 없이도 잘 살았고, 친구들과 뛰놀고 싸우고, 부끄러운 실수도 하며 성장했던 그때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마음 한 곳을 찡하게 만들었던 구절로 글을 마무리한다. 사랑스러운 앤과 헤어지기까지 몇 페이지 남지 않았기도 했고,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고 딛고 일어선 앤의 말이라 더욱 와 닿았다. 내가 마치 마릴라인 것처럼 ‘앤이 언제 이렇게 컸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부분이다.


  “퀸스를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p.518)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86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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