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기_4
“퇴직하고 싶다.” 명예퇴직 신청 시기에 팀장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진심 가득 담긴 푸념 끝에 꼭 현실적인 조언이 붙는다. “나처럼 결혼 늦게 하고 아기도 늦게 가지면 퇴직하고 싶어도 못한다. 결혼하려면 빨리 해.”
‘퇴직’과 얼핏 비슷해 보이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은퇴’다. 하지만 뜻풀이와 용례를 보면 차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퇴직’은 ‘현직에서 물러남’, ‘은퇴’는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으로 풀이된다. ‘퇴직’이 생산 활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상황까지만 설명하는 반면, ‘은퇴’는 그 이후의 삶까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평소 ‘은퇴’라는 말이 무 자르듯 냉정한 느낌마저 나는 ‘퇴직’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여기엔 스포츠 선수들의 은퇴식이 제대로 한몫했다. 선수가 은퇴를 결심하면 구단에서는 그 선수의 활약을 기억하고 앞날을 축복하는 은퇴식을 열어주기도 한다. (다시 말해 모든 선수가 은퇴식의 영광을 누리는 건 아니다.) 선수가 눈물을 훔칠 때 내 눈물도 살짝 찍어내며 감성 터지는 시간을 가졌던 기억 덕분에 은퇴라는 단어에 더욱 긍정적인 시각이 생긴 것 같다. (간혹 불명예스러운 이유로 은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관련 영상(마지막 타석이었던 5회 말 2사 만루 타석 때 보내준 팬들의 환호에 감사해하는 장면이다.)
2019년 7월 13일. 또 한 명의 선수가 아름다운 은퇴식을 가졌다.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의 이범호 선수다. 솔직히 이범호 선수에 대한 기억이 많지는 않다. 꽃범호라는 별명을 가졌던 선수, 일본 소프트뱅크에 진출했다가 다시 국내로 복귀한 선수, 국가대표 선수, 홈런타자 정도다. 그가 뛰었던 한화 이글스, KIA 타이거즈의 팬이었다면 더 많은 추억들이 내 삶 한편에 자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은퇴식이 열린다고 했을 때도 큰 감흥이 없었다.
별다를 거 없이 평범했던 토요일, 별생각 없이 TV 속 그의 은퇴식을 우연히 보면서 깨닫게 됐다. 이범호는 참 좋은 선수였고, 참 좋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의 은퇴식에는 작정하고 화려하게 치렀던 여느 은퇴식들에서 느낄 수 없었던 사람 냄새가 있었다. 통산 17개의 만루홈런이라는 대기록을 가진 그를 기억하고자 만루 홈런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팬들과 선수 모두에게 뜻깊을 등번호 전달식을 가졌다. (25번을 달고 기아의 핫코너 3루를 지켰던 이범호는 올 시즌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박찬호 선수에게 등번호를 물려준다.)
압권은 고별사였다. 이범호는 담백하게 진심을 담아 야구, 팀, 사람에 대한 애정을 풀어나갔다. 그는 은퇴를 결정하고 난 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화려한 선수가 아니라고 자평했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화려한 선수가 아니었을지 몰라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불빛들처럼 모두에게 은은한 빛으로 꽃피어있던 선수임은 분명했다. 실제 이날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는 화려한 폭죽 대신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빛으로 가득했다. 단언하건대 이범호의 은퇴식은 지금껏 지켜봤던 은퇴식들 중 가장 따뜻했던 은퇴식이었다.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은퇴식을 보니 괜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저 선수가 벌써 은퇴를 하는구나, 참 저 때 대단했지, 가족들 고생도 많았겠다, 은퇴하면 무엇을 하려나, 나도 언젠가 은퇴를 하겠지……. 이 자리를 빌려 이범호 선수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응원하며, 또 언젠가 나에게도 올 나의 은퇴식도 막연히 그려본다. 내가 은퇴하는 날 이범호 선수처럼 가족들, 선생님들, 선후배들의 많은 축복을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고, 딱 하나 더, 언젠가 나 역시도 팀장님들처럼 ‘퇴직하고 싶다.’고 푸념하게 될 텐데 은퇴하는 날 돌아봤을 때 그때가 마냥 후회스럽지만 않았으면 하는 욕심과 희망을 조심스레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