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 태어날 때부터 느꼈어.

by 리유

엄마가 집에 오기만을 기다렸다.

언제 오냐고 전화해 보아도, 차가 좀 밀린다는 말만 한다. 벌써 시곗바늘이 8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걸까.

현관문에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날 때마다 몇 번이나 달려 나가 보았다. 잘못 들었나. 우리 집 문은 움직일 생각을 안 하고 있다.




매일 해야 할 공부가 있다. 우리는 그걸 약속통장이라고 부른다. 수학 연산문제집 두 장 풀기, 영어 책 두 권 읽기다. 엄마 오기 전에 다 해뒀다고 자랑하고 싶은데, 엄마에게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은데, 요즘은 그게 잘 되지 않는다.


영어가 어려워졌다. 그림이 가득한 책일 때는 괜찮았었다. 한두 번 듣고 그림 보면서 대충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종이의 반이 훌쩍 넘도록 글자들로 채워져 있다. 닥다닥 붙어있는 알파벳들을 무슨 소리로 읽어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엄마가 CD 틀고 눈으로 따라 읽으라고 한 적도 있다. 해 봤다. 그때마다 눈이 스르르 감기고 몸이 자꾸만 의자 밑으로 내려갔다. 아빠한테 읽어달라고도 했었다. 그런데 발음이.... 차라리 엄마를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었다.

혼자서 쏼라쏼라 영어책 다 읽고, 만화책 맘껏 보는 언니가 부러워졌다. 나도 읽고 싶던 책이었다. 리코더도 불고 피아노도 치고 싶다. 어제 그리다가 만 곰돌이도 완성시켜 주고 싶다. 히 언니한테 가서 만화책을 툭 쳤다가 아빠한테 한소리 듣기만 했다. 신경질 난다.



띠띠띠. 이번에는 진짜 우리 집 현관문 소리다. 드디어 엄마가 왔다.

반가운 얼굴로 엄마를 올려다보니 눈 밑에 그림자 도장이 찍혀있다. 우리를 보고 미소를 짓긴 하는데 저건 분명히 억지로 웃는 거다. 내가 싫어하는 야근이란 걸 했나 보다.

씻고 나온 엄마 앞에서 영어책 한 권들고 배시시 웃어 보았다. 내가 약속통장을 다 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는지 실망한 표정이다. 내 입꼬리도 살짝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할 일을 다 하려는 내가 기특하다며, 엄마는 내 손을 잡고 함께 소파에 앉았다. 엄마 팔에 머리를 기대었다. 폭신하니 잠이 몰려온다. 그럼 꼬부랑 글자이 서로 엉켜 보이는데 큰일이다.


엄마 앞에서는 잘하는 모습만 보이고 싶다. 틀리는 게 싫다. 술술 잘 읽을 때면 신나게 달려 나가는 느낌이 들다가도, 머뭇머뭇거리면 이내 앞이 꽉 막힌 듯 하다. made는 메이드, have는 해브. 비슷한 모양인데 왜 다른 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엄마는 틀려도 된다고 자신 있게 일단 읽어보라고 하지만, 정말 그러기 싫다.


나도 모르게 몸이 스크류바처럼 베베 꼬이기 시작했다. 입은 벌리는데 웅얼웅얼 소리만 난다. 엄마 목소리도 점점 커진다. 속에서 꿈틀대는 화라는 녀석을 꾹꾹 눌러대는 것처럼 보였다.


답답한 마음에 이상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나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 읽냐고, 언니는 잘하는데 나는 왜 못하냐고 말이다. 결국 엄마는 굳은 표정을 하고 무서운 목소리를 냈다. 노력도 안 하면서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냐, 잘 읽는 것보다 노력하는 과정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그냥 더듬대는 나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내가 잘 읽지 못해서 답답해하는 것 같았다. 또독 또독 점점 더 많은 눈물이 책상 위로 떨어졌다.


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정수기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차가운 물을 마시나보다. 내가 징징거리면 엄마가 늘 보이는 모습이다. 또 내가 엄마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나도 괜히 속상해서 발로 바닥을 쿵쿵대며 방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엄마 품에 안겨서 차근차근 읽어보려고 다짐했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다 속상했다. 침대 위에 엎드려 발로 쾅쾅 굴러 보아도, 머리를 파묻고 부벼 보아도 화가 풀리지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 누워 씩씩대고 있는데, 방문 쪽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문틈 사이로 종이 한 장이 빼죽 고개를 내밀고 흔들리고 있다. 뭐지. 하고 집어서 펼쳐보았다. 사랑하는 아가에게 라고 적혀있다. 엄마 편지다.


'잘하고 싶은 마음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잘하고 싶은 마음과 노력이 만나면 정말 멋진 일이 벌어질 거야. 엄마가 옆에서 함께 해줄게.'


마음에 반딧불이 윙 하고 날아온 것 같았다. 따뜻하고 환한 불빛이었다. 엄마는 잘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가 나지 않게 손잡이를 짝 돌려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화날때 생기는 주름살이 없어져있다. 휴.

고양이 걸음으로 거실에 있는 책상위에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 한 장과 연필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사각사각 적어 내려갔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 태어날 때부터 느꼈어. 태어날 때부터 다 클 때까지 잘 돌봐주고 싶은 엄마 마음 잘 알아. 엄마 책 읽는 거 좋아하니까 선물을 준비했어. 사랑해."



엄마 무릎에 편지를 슬쩍 올려다 놓고 다시 방으로 호다닥 들어갔다. 방문을 빼곰히 열고 문틈 사이로 엄마 얼굴을 살폈다. 웃는다. 진짜 웃음이다. 내가 좋아하는 엄마의 진짜 웃음.


함께 건네준 작은 포스트잍들도 손에 들더니 읽던 책 사이에 끼워 넣는다. 엄마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문을 활짝 열고 엄마의 배에 얼굴을 부볐다. 두 팔로 엄마 몸을 꼬옥 안았다. 달콤한 엄마 냄새가 마치 솜사탕 같았다.


오늘은 이대로 엄마 품에 안겨서 잠들고 싶다.

읽지 못한 책 한 권은 내일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엄마 회사 간 사이 CD로 틀어서라도 읽어봐야겠다. 그래도 잘 되지 않으면, 또 엄마가 올 때까지 기다릴 거다.

그때는 절대 징징거리지 않을 거다. 말이다.




(아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아이의 시선에서 적어 내려 간 글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니, 수학도, 영어도, 아이가 어려워하는 부분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게다가 쌍둥이 언니는 똑같은 시간 동안 책을 읽고 문제를 푸는데도 자신보다 더 잘하니, 아이의 자존감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예전의 너의 수준과 비교하라고 얘기했는데도, 그게 잘 안되나 봅니다.


특히, 엄마 앞에서는 더 잘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하니 그 답답함이 더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보낸 편지를 보고 울컥 눈물이 나와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를 이렇게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데 정작 엄마라는 사람은 아이의 마음보다 내 바람을 앞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 미안함에, 후회에 나오는 눈물이었습니다. 아이를 먼저 바라봐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요즘인 것 같습니다. 매 순간 아이의 편지를 붙여놓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겠습니다.


무엇보다, 물을 터뜨린 건 태어날 때부터 엄마를 좋아한다고 느꼈다는 문장이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진짜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