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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내 나이였던 아빠가
딸내미에게 건넨 마음들

아빠의 편지

by 리유

"딸내미, 이리 와봐. 이것 좀 정리해."


아빠 목소리다. 안방 옆에 딸린 작은 방에서 들려온다.

시간 날 때 와서 짐 정리 하라고 몇 번 말씀하셨는데 그걸 말하시나 보다.


방에 들어가니 빛바랜 나무색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옷장과 세트로 사주신, 학창시절 나의 열정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을 한껏 받아내주던 녀석. 나의 결혼과 동시에 창고방으로 밀려나더니, 이제는 엄마 아빠의 자잘한 짐들을 잔뜩 품고 있다. 갖가지의 비타민, 약, 에너지바와 같은 간식 등등.


“여기, 서랍 다 열어서 한 번 봐봐. 가져갈 거 있으면 가져가고, 버릴 거 있으면 여기다 놓고. 우리가 정리하려 했는데 뭐가 뭔 지 알아야지.”


바닥을 보니 커다란 종이가방 두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솔직히, 혼자 조용히 와서 하고 싶었다. 남들이, 특히 남편이나 애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것들이 불쑥 등장할까 봐. 이를테면 과거 질풍노도의 시기에 휘갈겼던 일기와 삐죽뺴죽한 나의 사진, 그리고 멋모르던 시절 짝사랑했던 오빠에게 쓴 편지와 같은 것들.


아이들을 보니 외삼촌과 신나게 공기놀이 중이다. 남편은 핸드폰과 푹 빠져있다.그래. 정리를 시작하자. 어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볼까.




세상에,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물건들인가.

남색 삐삐, 은색 아이리버 워크맨과 MP3까지…

플라스틱 필통 안에는 수 십장의 학종이와 운세가 적혀 있는 껌 껍질이 빼곡하다. 친구들과 주고받은 자잘한 쪽지들도 어쩜 그리 잘 모아두었는지. 물론, 우려했던 사진과 편지들도 등장.


그렇게 하나하나 재빠르게 정리해 나가던 중, 작은 종이 상자 하나가 보인다.


이게 뭐지.


뚜껑을 열어보니 흰색 봉투 몇 장, 편지지 몇 장이 나란히 들어앉아 있다.

내 기억에 없는 건데. 종이를 펼쳐보니 낯익은 글씨체가 눈에 들어온다.


아빠의 편지다.


'딸내미, 아빠다.'

'잘 잤니?'

'오늘은 날씨가 춥구나.'


다정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들.

하나, 둘, 셋, 넷.. 열 통이 훌쩍 넘는다. 어떤 건 커다란 손글씨로, 또 다른 건 인쇄글로, 다양하기도 하다.


내가 어릴 적, 아빠와는 일주일에 한 번 겨우 마주했다. 주말부부 였던 것. 그때의 아빠는 목소리가 크고 엄격하고 냉정한 그런 분이었다. 좀 어색하기도 때때로 어렵기까지 한.. 그런데, 그런 분이 나에게 편지를 쓰셨다고? 그것도 이렇게 장문의 글을?


편지 하나를 펼쳐 보았다. 문장 속의 아빠는 한 없이 따뜻했다.

나는 그동안 아빠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손글씨로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가본다.


'오늘이 졸업식이네. 회사 일이 바빠 집에 못 올라갔네. 꽃다발은 엄마한테 부탁했다. 얼굴 잘 못 봐서 미안하고 무엇보다 졸업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

지금 이곳은 아침 일곱 시야. 아침은 맛있게 잘 먹었니?...'


안 되겠다. 코끝이 눈가가 뜨듯해진다. 더 읽다간 엉엉 울겠다.

아빠의 편지를 고이 접어 종이 상자 안에 넣었다. 뚜껑을 꼭 닫고는 가방 가장 안쪽에 두었다.



“아빠, 정리 다 했어요. 근데 나한테 왜 이렇게 편지를 많이 썼어?”

“그려? 그랬나?”


아빠도 그때의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걸까.


그 소리를 들은 동생이 멀리서 외친다.

“너무하다, 진짜. 나한테는 한 통도 안 써줬으면서. 누나한테만. 흥!”


동생도 자신의 책상을 한바탕 정리했던 차였다. 앞에 놓인 종이가방을 보니 죄다 건담 조각들 뿐이다.




그 종이가방은 우리 집 화장대 옆에 놓여있다. 들고 온 그 상태 그대로.

아직 아빠의 편지를 펼쳐보진 못했다. 지금의 내 나이였던 아빠가 딸내미에게 건넨 마음들을 읽을 용기가 안 나서, 그 감정을 받아낼 준비가 아직 안 되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열어봐야겠다.

혼자서, 소중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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