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부담스럽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저녁이라니. 게다가 나의 상사는 술을 좋아하시니 알코올이 거하게 함께할 것 아닌가. 무엇보다 육아조 조정이 필요하다. 양가 어머님 중 한 분에게 읊조려야 한다. '오늘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요... 잠깐 애들 봐주실 수 있으세요? 3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죄송해요..'라고 말이다.
모두의 답을 신속하게 받은 상무님은 출발하기 약 3시간가량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 보인다. 회사 근처에 유명한 고깃집이 새로 오픈했는데 그곳을 함께 가보자 하신다. 웨이팅이 있을 수 있으니 몇 명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면 좋겠다고, 아주 구체적인 지시까지 내리신다.
팀장들의 눈알과 손가락은 그 어느 때 보다 빨라진다. 퇴근 전 모든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퇴근시간.
팀장들이 먼저 이동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다행히 한 자리가 남았다. 가는 길 내내 누구 하나 한 마디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외쳤을 것이다. '빨리 가야 한다. 자리 없으면 오늘 우린 어딘가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자. 어서. 허뤼업!'
자, 지금부터는 눈치 게임의 시작이다. 누가 어디에 앉을 것인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차 갖고 와서, 바깥쪽에 앉을게요. 하하."
"에이, 뭐야, 차 놓고가요. "
"내일 집에서 차 쓸 일이 있어요..(사실이다) 그리고 술 마신 다음 날 두통이 너무 심해서..(백 퍼센트 '술 먹기 싫어요'로 들린다)"
나의 말줄임표가 끝나기 무섭게 이 차장이 끼어든다.
"아, 저도, 주말에 인대 수술받아서.. 팀장님 말동무 해드리겠습니다."
상무님의 오른팔이자 소주 네다섯 병은 거뜬히 소화하는 김 부장은 아무 말이 없다.
지난달 승진한 권차장은 그저 웃는다. 여기서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본다. 상무님이 팀장 시절이었을 적부터 소속 팀원이었던 분이다. 사원부터 팀장이 되기 직전까지 근 10년 이상 함께 해 왔고, 아이러니하게 그만큼 어려워하기도 한다. 나의 상사는 누가 보더라도 매우 권위적이며, 갖고 있는 파워를 매 순간 강하게 표출하는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리 세팅이 완료되었다. 가운데는 임원, 왼쪽은 알콜, 오른쪽은 논알콜파. 그렇게 두 명씩 자리를 잡고 한동안 고요히 앉아 있었다. 모두 소위 말하는 내향형에, 업무적으로만 교류가 있었기에 이런 자리가 다들 어색한 듯하다. (다른 회사도 그런 지 모르겠다.)
곧이어 박 부장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적막을 깬다. '지이잉.'
"네, 상무님. 15분 뒤요. 아,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권차장의 손놀림이 다급해진다. 휴지 한 장을 뽑아 정사각형으로 접은 뒤, 그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 한 세트를 놓는다. 바로 옆에는 개인 접시와 소주잔을 나란히 각 잡아 둔다. 이어서 서빙된 고기와 쪽파를 차례로 불판 위에 올린다. 10분 남았으니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한 입 드실 수 있도록 삽시간에 구워야 한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본인 팔이 벌겋게 함께 데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의 살을 익히는데 초집중이다.
드디어 상무님이 걸어 들어오신다. 팀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는다. 어서 오시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들을 하고서.
테이블 세팅과 이미 준비된 저녁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자 권차장이 말한다. '시장하시죠? 아주 잘 구워졌습니다.(웃음)'
이어서 오늘 저녁 자리의 취지가 명하여 진다. 각 팀장들 간 관계를 돈독히 하여 시너지를 내기 위함임을, 원팀 의식을 다지는 자리임을 강조하신다.
그 사이 박 부장은 상무님이 딱 좋아하는 비율로 소맥을 만다. 세 잔만 만들어진 것을 발견하자 나와 이 차장 앞의 탄산음료를 바라본다.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말한다.
"상무님, 오늘 갑자기 잡혀서 차를 갖고 왔어요. 집도 멀고, 대리기사도 못 부르고, 오늘은 탄산과 함께하겠습니다. 헤헤헤" 이 차장이 말을 잇는다. "의사가 알콜 금지라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시더니 알콜 존으로 고개를 돌려 잔을 들고 크게 외치신다. 원팀 스퓌릿! 이라고.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알콜존 테이블에는 어느새 소주 네 병, 맥주 두병이 비워졌다. 권차장의 팔뚝은 아까보다 더 불거졌다. 팔뿐만이랴. 얼굴에서 목까지 불타는 고구마다.
멀쩡한 모습으로 논알콜 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부러운 눈빛을 날린다. 마치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하다. 상무님도 거나하게 취해 보이는 틈을 타, 내 옆으로 본인 식기를 들고 옮기는 찰나,
"권차장! 어디가!" 상무님이 외친다.
"아, 예, 상무님. 충성! 짠 하시죠, 짠~ 짠~."
상무님이 흡족한 표정으로 소주를 들이켜는 사이 권차장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는 어느새 바닥에 뿌려진다. 촤악.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촥, 촥, 촤악~
술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적당히'를 넘어선 지금은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허허허 웃어대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렇다고 논알콜 존은 안전지대였는가. 안주까지 먹지 말라고 안 할 테니 마음껏 시키라는데 그 한마디가 오히려 목을 메이게 만들었다. 다 함께 짠을 할 때마다 냉랭한 눈빛을 대차게 맞아야 했다. 몸 안에 알코올 한 방울 없는 상태에서 실소를 터뜨리고 맞장구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노오력이 필요한 지, 안면 근육이 아릴 지경이다.
이 날, 우리는 최신 드라마, 영화, 취미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잠시 가까워지기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상무님이 바라시는 원팀의식을 견고히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