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차장! 어디가?!

미생들이 소주와 상사를 만났을 때

by 리유


햇살이 따스한 나른해지 오후.

띵동. 잠을 확 깨우는 사내메신저의 알람 소리가 울린다.


상무: "오늘 팀장들과 저녁 한번 먹을까 하는데, 어려우신 분?"

권 차장: "네, 가능합니다"

이 차장: "예, 알겠습니다"

김 부장: "옙, 좋습니다"

나: 네, 가능합니다! (말줄임표 '...'을 찍고 싶었으나 애써 느낌표로 당혹스러움을 감춰본다)


사실 부담스럽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저녁이라니. 게다가 나의 상사는 술을 좋아하시니 알코올이 거하게 함께할 것 아닌가. 무엇보다 육아조 조정이 필요하다. 양가 어머님 중 한 분에게 읊조려야 한다. '오늘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요... 잠깐 애들 봐주실 수 있으세요? 3시간 정도면 될 것 같은데.. 죄송해요..'라고 말이다.




모두의 답을 신속하게 받은 상무님은 출발하기 약 3시간가량 남았는데도 벌써부터 엉덩이가 들썩이는 듯 보인다. 회사 근처에 유명한 고깃집이 새로 오픈했는데 그곳을 함께 가보자 하신다. 웨이팅이 있을 수 있으니 몇 명이 먼저 가서 자리를 잡으면 좋겠다고, 아주 구체적인 지시까지 내리신다.

팀장들의 눈알과 손가락은 그 어느 때 보다 빨라진다. 퇴근 전 모든 업무를 처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퇴근시간.

팀장들이 먼저 이동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다행히 한 자리가 남았다. 가는 길 내내 누구 하나 한 마디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외쳤을 것이다. '빨리 가야 한다. 자리 없으면 오늘 우린 어딘가에 찌그러져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자. 어서. 허뤼업!'




자, 지금부터는 눈치 게임의 시작이다. 누가 어디에 앉을 것인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차 갖고 와서, 바깥쪽에 앉을게요. 하하."

"에이, 뭐야, 차 놓고가요. "

"내일 집에서 차 쓸 일이 있어요..(사실이다) 그리고 술 마신 다음 날 두통이 너무 심해서..(백 퍼센트 '술 먹기 싫어요'로 들린다)"


나의 말줄임표가 끝나기 무섭게 이 차장이 끼어든다.

"아, 저도, 주말에 인대 수술받아서.. 팀장님 말동무 해드리겠습니다."



상무님의 오른팔이자 소주 네다섯 병은 거뜬히 소화하는 김 부장은 아무 말이 없다.

지난달 승진한 권차장은 그저 웃는다. 여기서 그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본다. 상무님이 팀장 시절이었을 적부터 소속 팀원이었던 분이다. 사원부터 팀장이 되기 직전까지 근 10년 이상 함께 해 왔고, 아이러니하게 그만큼 어려워하기도 한다. 나의 상사는 누가 보더라도 매우 권위적이며, 갖고 있는 파워를 매 순간 강하게 표출하는 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자리 세팅이 완료되었다. 가운데는 임원, 왼쪽은 알콜, 오른쪽은 논알콜파. 그렇게 두 명씩 자리를 잡고 한동안 고요히 앉아 있었다. 모두 소위 말하는 내향형에, 업무적으로만 교류가 있었기에 이런 자리가 다들 어색한 듯하다. (다른 회사도 그런 지 모르겠다.)

곧이어 박 부장 핸드폰의 진동 소리가 적막을 깬다. '지이잉.'


"네, 상무님. 15분 뒤요. 아, 예, 알겠습니다."


갑자기 권차장의 손놀림이 다급해진다. 휴지 한 장을 뽑아 정사각형으로 접은 뒤, 그 위에 숟가락과 젓가락 한 세트를 놓는다. 바로 옆에는 개인 접시와 소주잔을 나란히 각 잡아 둔다. 이어서 서빙된 고기와 쪽파를 차례로 불판 위에 올린다. 10분 남았으니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한 입 드실 수 있도록 삽시간에 구워야 한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본인 팔이 벌겋게 함께 데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남의 살을 익히는데 초집중이다.



드디어 상무님이 걸어 들어오신다. 팀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활짝 웃는다. 어서 오시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표정들을 하고서.

테이블 세팅과 이미 준비된 저녁들을 보고 흐뭇한 표정을 짓자 권차장이 말한다. '시장하시죠? 아주 잘 구워졌습니다.(웃음)'


이어서 오늘 저녁 자리의 취지가 명하여 진다. 각 팀장들 간 관계를 돈독히 하여 시너지를 내기 위함임을, 원팀 의식을 다지는 자리임을 강조하신다.

그 사이 박 부장은 상무님이 딱 좋아하는 비율로 소맥을 만다. 세 잔만 만들어진 것을 발견하자 나와 이 차장 앞의 탄산음료를 바라본다.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말한다.

"상무님, 오늘 갑자기 잡혀서 차를 갖고 왔어요. 집도 멀고, 대리기사도 못 부르고, 오늘은 탄산과 함께하겠습니다. 헤헤헤" 이 차장이 말을 잇는다. "의사가 알콜 금지라고.."

미간을 한껏 찌푸리시더니 알콜 존으로 고개를 돌려 잔을 들고 크게 외치신다. 원팀 스퓌릿! 이라고.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알콜존 테이블에는 어느새 소주 네 병, 맥주 두병이 비워졌다. 권차장의 팔뚝은 아까보다 더 불거졌다. 팔뿐만이랴. 얼굴에서 목까지 불타는 고구마다.

멀쩡한 모습으로 논알콜 존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부러운 눈빛을 날린다. 마치 살려달라고 외치는 듯하다. 상무님도 거나하게 취해 보이는 틈을 타, 내 옆으로 본인 식기를 들고 옮기는 찰나,


"권차장! 어디가!" 상무님이 외친다.

"아, 예, 상무님. 충성! 짠 하시죠, 짠~ 짠~."

상무님이 흡족한 표정으로 소주를 들이켜는 사이 권차장 잔에 담긴 투명한 액체는 어느새 바닥에 뿌려진다. 촤악.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촥, 촥, 촤악~


술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적당히'를 넘어선 지금은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더 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본인이 통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허허허 웃어대는 모습이 안쓰럽다.


그렇다고 논알콜 존은 안전지대였는가. 안주까지 먹지 말라고 안 할 테니 마음껏 시키라는데 그 한마디가 오히려 목을 메이게 만들었다. 다 함께 짠을 할 때마다 냉랭한 눈빛을 대차게 맞아야 했다. 몸 안에 알코올 한 방울 없는 상태에서 실소를 터뜨리고 맞장구치는 것은 또 얼마나 큰 노오력이 필요한 지, 안면 근육이 아릴 지경이다.




이 날, 우리는 최신 드라마, 영화, 취미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잠시 가까워지기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의 목표를 향하는, 상무님이 바라시는 원팀의식을 견고히 다졌다.

우리들의 상사를 만족시키는 것.


우리는 모두 애썼다.

아마 상무님도 본인의 상사와 함께한 자리에서 굉장히 애쓸도 모르겠다.



각자의 자리에서 어진 소셜네트워킹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외쳐본다.


미생 스피릿!



*사진출처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