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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하영 May 10. 2023

마주하는 순간

류쌤의 이야기


항상 마음속으로, 입 밖으로 내뱉는 생각이 있다.


“생각처럼 되지 않더라, 생각 같지 않더라, 장담할 수 없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


사실 모든 것은 내 생각이 먼저 나오고, 내 생각 같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많은 순간들이 나에게 아쉬움과 배신감만 남겨준다!

이런 세상아!!!!!!


요가를 하면서 영상으로 찍을 때가 가끔 있다. 나의 동작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해서이다. 요즘 그래도 초반보다는 조금 늘어서 뭔가 아주 작은 자신감이 붙어 수련을 집중해서 한다. 아주 진지하게!

그러고선 녹화된 영상을 보면, 이래서 우주 저 멀리 몇 천 광년은 내다봐도 지구 내핵은 못 보는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그렇다. 내 생각과 매우 다르다.

분명히 내 골반은 더 열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어깨는 더 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팔이 더 펴져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 :)

그래도 이렇게 한 번씩 영상을 들여다보면 내가 그 순간 했던 동작의 느낌을 다시 기억해 보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다. 조금 더 열어보리라! 조금 더 손 끝까지 힘을 써 보리라!

못난 몸구석 차마 바라보기 겁나지만 한 번씩 영상을 찍고 확인을 하는 이유이다. 그러면 조금 더 깊어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시각이 생긴다.


예전에 피아노를 한창 연습할 때, 녹음을 하면서 자신의 음악을 들어보며 연습한다. 손가락을 청각이 쫓아가지 못하거나, 왜곡해서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음악을 치면서 작품의 마지막까지 속으로 이미 노래를 다 하고, 그와 동일하게 구현해 내서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를 “대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겁쟁이였다. 자신감도 없었고, 내 음악을 마주하는 것이 너무너무 고통스러웠다. 정말 고통스러웠다라는 표현이 맞다. 듣기 싫고, 부정하는 일이 매일이었다.

그러면서 자꾸 듣는 연습을 게을리했었다.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방향이었다.


피아노를 치면서 항상 들어야 한다.

“귀를 열고 친다“라는 말이 있다.

열려 있는 귀를 뭘 또 어떻게 열라는 말인가 싶지만 정말 귀를 닫고 치는 것과 열고 치는 것은 천지차이다.

보통 사람들은 왜곡을 하게 되어있다. 내가 치는 순간 들리는 소리를 내가 듣고 싶은 소리로 듣거나, 들리지 않거나, 아니면 아예 듣지 않는다. 사실 듣는 것 자체가 어렵다.

이것은 훈련을 해야 하는 중요한 과정이며, 모든 음악 하는 친구들이 꼭 해내야 하는 하나의 “테크닉”인 것이다. (물론 재능의 영역이기도 하다 (ノ_・。))


지금 학생들이 많이 하는 말 중 하나도

“제가 어떻게 쳤는지 모르겠어요”

이다.

당연하다고 얘기한다. 그럼에도 잘 들어보라고 이야기해 준다.


어린 시절 그렇게 녹음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서 그 연습법을 많이 놓친 것들이 매우 후회가 됐었다.

내가 친 음악을 듣고 분석하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완전하게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이 많았다면 아마 훨씬 더 많이 늘고, 더욱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녹음하고 듣는 것 또한 훈련하며 마주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져 공포는 사라졌다. 여러 번 녹음하고 들어가며 연습하면 점점 더 내가 생각했던, 내가 의도했던 음악과 비슷해지는 순간이 온다.


자꾸 마주해야 한다.

처음은 겁이 날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과정은 꽤나 힘든 일이다. 그러나 자꾸 마주해야 겁이 없어진다.

그리고, 그래야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이나 음악뿐만 아니라, 모든 일상 속에서도 나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지구의 내핵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깊은 바닷속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자신도 자신을 모르거나, 밖으로 비친 모습이 사실 내 모습이 아닌데,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런 것들은 보통 타인을 통해 알 수 있다. 타인이 나의 모습을 자신이 본 대로, 느낀대로 이야기해 줄 때가 있다.

그럴 때 많은 순간들에서 ”너가 뭘 알아! “라고 속으로 외치게 된다. 그렇지만 내가 보인 모습을 그대로 보는 친구들의 이야기는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보여줬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 맘대로 해석해서 타인을 평가하는 친구들도 꽤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런 친구와 진심으로 나를 생각하고 이야기 해주는 친구를 구분할 정도의 현명함은 있어야 한다.

여러 나의 모습들 중 두드러지게 타인에게 비춰지는 모습이 그리 좋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된 순간을 마주하고,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했듯, 사람은 왜곡의 장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견해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의 생각에 휩쓸리지 않도록 더욱 스스로 마주하는 순간을 가지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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