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주 주말마다 비가 왔습니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려면 귀신같이 알아보고 비가 오더라구요. 그나마 좋았던 점이라면, 그 핑계로 몇 주나 세차를 안하고 미룰 수 있었다는 겁니다. 세차를 해봐야 다음 주말이면 또 흙비를 맞고 더러워 지니까요. 귀찮아서 그런거 아니냐구요? 네...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세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다들 세차 좋아하시나요? 전 정말 귀찮아 하거든요. 그래서 가끔 셀프 세차장에서 2~3시간씩 세차하시는 분들 얘기를 들으면 정말 존경스러워요. 대단하지 않나요? 아무리 내 자동차라지만 닦고 헹구고 왁싱에 또 뭐더라 유리막코팅? 아무튼 대단합니다.
어디선가 셀프세차 매니아 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세차 자체가 좋은 것도 있지만, 걸레질에 몰입하다보면 다른 잡생각들을 떨칠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나니 그분들이 좀 이해가 됐습니다.
루틴하게 몰두하는 시간을 갖는 것은 마음 안정에 도움이 됩니다. 집중하는 순간, 잡생각이 사라지고 걱정, 번뇌, 후회, 불안이 힘을 잃는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 해 보셨을것 같아요. 그런 취미나 시간이 있다면 좋겠네요. 요가, 텃밭 가꾸기, 걷기, 그저 커피 한잔하면서 멍때리기, 뜨개질, 레고 만들기...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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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달 전쯤 되었나? 지인들과 인왕산 야간등산을 다녀왔습니다. 퇴근하고 운동겸 슬쩍 올라갔다 왔어요. 퇴근길 무리하지 않으려고 정상까지도 안 가고, 경복궁역에서 한양도성길을 따라 범바위라는 중간 포인트만 찍고 내려왔습니다. 왕복 약 4~5km 정도 되는 거리였습니다.
그리 가파르지도,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으면서 서촌 골목의 풍경과 도성길, 서울 시내 야경까지 볼 수 있는 멋진 코스라 혹시 시간 되시는 분들은 한번 꼭 시도해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범바위로 가는 길, 밤공기가 참 좋았습니다. 4월 중순이라 아직 벚꽃도 곳곳에 남아 있었구요. 내딛는 발 한발 한발이 포근합니다.
지인들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가, 또 좁은 길에서는 혼자 숨을 고르며 걸음에 집중해 봅니다. 봄 한가운데를 걷는다는 자각만으로 경쾌하고 푸릇한 밤이었습니다. 잠시나마 몰입할 수 있어 좋은 기분들로 마음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마치 자동차에 환기버튼을 누른 느낌이랄까요.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 으슥한 산길로 길을 헤맬뻔한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범바위에 도착해서 숨을 돌리며 서울 야경을 찬찬히 훑어 보게 되었습니다.
서울은 넓고 곳곳의 불빛이 밝습니다. 이렇게 높지 않아 뒷산스러운 인왕산만 올라와도 저 멀리 보이는 고층 건물들이 다른 세계의 조그마한 미니어처 같아 보입니다. 불빛이 셀 수도 없이 많지만 다들 우주의 별빛처럼 멀리 느껴질 뿐입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나오는 창백한 푸른점을 언급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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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등산이었는데, 땀이 제법 났습니다. 범바위에서 땀을 식히며 가방에 싸 온 초코바를 나눠 먹었습니다. 달콤함과 은연한 포만감이 몸과 마음을 충만하게 해 줍니다. 다이어트를 한다며 간식을 한사코 거부하던 지인도 초코바 한 입을 먹더니 눈빛이 사르르 녹았습니다. 초코바 하나로 이렇게 행복할 수가 있는데 우리는 왜 그리도 행복하려고 고생들을 하고 있나 모를 일입니다.
우리는 다들 이 넓은 세상에 작은 점과 같이 한 명으로 태어나 왜 이리도 서로를 척지고 경계하며 이기려고만 할까요? 조금만, 아주 조금만 포용하고 보듬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요.
저부터 눈 앞만 바라보며 비극을 좇지 말고, 멀리 여유를 갖고 희극스럽게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좋은 것에 몰두하고 3시간의 셀프세차처럼 비효율적이라도 정성을 쏟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겠습니다. 제 브런치를 찾아오시는 분들께도 잔잔하면서 자신을 위한 시간들이 많아지길 바라겠습니다. (가끔 초코바를 나눠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