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마리 테레즈 (1)

‘마담 루아얄(Madame Royale)’이라고 불린 여성

by 알렌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Marie Thérèse Charlotte de France, 1778년 12월 19일~1851년 10월 19일)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제5대 왕 루이 16세(Louis XVI)의 장녀로 프랑스의 왕녀입니다.
앙굴렘 공작 부인(la duchesse d'Angouléme)

프랑스 제1왕녀로 마담 루아얄(Madame Royale)¹의 칭호로 불렸으며,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²왕후의 오라비인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2세(Leopold II)의 외종질 이기도 했습니다.

ᅟ¹프랑스 왕녀들 중 최연장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결혼과 함께 이 칭호를 잃는 경우도 있었으며 장녀가 죽으면 차녀가 이어받게 됩니다.

ᅟ²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황의 딸. 여대공(Erzherzogin) 칭호를 갖고 있었습니다.






왕녀의 어린 시절

마리 테레즈 공주는 1778년 12월 19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태어났습니다.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7년 만에 생긴 첫 아이의 탄생에 감격해 이와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너는 내 것이고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야. 넌 나와 기쁨을 함께하고 슬픔을 나눌 거야.
by 마리 앙투아네트

공주의 이름은 대부모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Maria II Theresia) 여황과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Carlos III) 왕의 이름에서 따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라고 지어졌습니다.


마리 테레즈의 첫 번째 가정교사는 당대 명문가 로앙게메네 집안의 공비였지만, 이후 게메네 가문이 파산하면서 그녀의 영예는 폴리냑 백작 부인 욜랑드 마르틴느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Yolande Martine Gabrielle de Polastron)에게로 넘어갔습니다. 왕족의 교육은 대귀족 출신 가정교사들이 맡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마리 테레즈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 루이 샤를 왕자, 루이 조제프 왕태자(좌) 마리 테레즈 공주와 루이 조제프 왕태자(우)

루이 15세(Louis XV)의 딸들이자 왕후의 시고모들인 아델라이드 공주, 빅투아르 공주, 소피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그녀들이 경박한 행동거지로 베르사유 궁정 귀족들로부터 경원시당하는 것이 왕실의 부족한 가정교육 때문이라고 여겼고, 마리 테레즈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 결과, 왕후는 제3 신분인 빈민 계층의 거주지에 테레즈 공주와 함께 방문하거나, 공주로 하여금 그들을 대접하고 아이들에게 그녀의 장난감을 선물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는 1784년, ‘먹을 것조차, 입을 것조차 없는 불행한 자들이 너무나도 많아’ 공주의 신년 선물을 주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후는 승마를 즐겼는데, 하루는 왕후가 낙마해 크게 다친 일이 있었습니다. 이를 알렸던 아르장토의 메르시 백작(Comte de Mercy d'Argenteau)은 마리 테레즈의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됩니다.

마리 테레즈: 나는 어머니께서 더 심하게 다치셨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거예요.

메르시 아르장토: 그건 공주 전하께서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 같군요. 그 말씀은 왕후 폐하께서 승하하셨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리 테레즈 전하께서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엔 아직 어리시지요?

마리 테레즈: 난 알아요. 영원히 볼 수 없다는 말이죠.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보고 싶지 않아요.

마리 테레즈는 어린 마음에 섭섭함을 느꼈던 모양이지만, 마리 테레즈 공주는 왕후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경애했습니다.


남동생 루이 조제프(Louis Joseph), 루이 17세(Louis XVII) 그리고 여동생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Sophie Hélène Béatrice). 마리 테레즈는 화목한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랐습니다. 하지만 소피 공주를 1787년, 루이 조제프 왕태자를 1789년 유전성 척추 결핵으로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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