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트라우마 스위치

잊고 싶은,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

by 거니

이것은 내가 초등학생 때 이야기다. 당시 우리 남매는 여느 또래처럼 게임을 하고, 친구들과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큰집의 사람들은 노는 것을 죄악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항상 우리에게 일을 시키려 했고, 만약 우리가 PC방이나 오락실에 가있거나 친구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면 집으로 끌고 와 무자비한 구타를 가했다.
그렇다고 노는 것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은 것이 사람 심리지 않은가, 우리는 더욱 노는 것에 대한 열망이 생겼고, 그로 인해 오락→구타라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들의 폭력에 대한 수위는 점점 더 세졌고, 급기야 우리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적 외상을 남겼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학교를 마친 후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 문방구는 집에서 밭으로 가는 길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난 항상 오토바이 소리만 들리면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이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그 날 또한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숨어있었는데, 뒤에서 누가 내 머리채를 꽉 잡았다. 친척 형이 밭에서 오다 날 발견한 것이다. 난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무자비하게 맞았고, 집에 질질 끌려와 또 미친 듯이 맞았다. 곧이어 큰아버지가 들어오고, 자초지종을 들은 큰아버지는 친척 형의 구타를 말리기는커녕 구타에 가세했다. 다음날 난 얼굴과 몸에 생긴 멍 때문에 학교를 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날 가만히 두지 않았고, 집 기둥에 날 쇠사슬로 묶어 놨다. 난 목이 쉴 때까지 앞으로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풀어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큰아버지는 조용히 하라며 날 때렸다. 그는 혹여나 누가 볼까 넓은 널빤지로 나를 가렸다. 그렇게 아침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묶여 있었고, 내가 지쳐서 울고 있을 때 그나마 날 귀여워하던 친척형 중 한 명이 내 울음소리를 듣고 날 발견해 쇠사슬을 풀어줬다. 난 쓰러지듯 기절했고, 그 후로 며칠간 내가 뭘 했는지는 아직까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있고부터 난 내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미칠 듯 한 공포와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 잠을 자려고 누워도 계속 팔다리를 움직이며 내 사지가 자유롭다는 것을 확인하려 했고, 누가 장난으로 내 몸을 잡아 못 움직이게 하거나 이불 등으로 날 덮으면 미친 듯이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악을 질렀다.
하루는 내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친척 누나에게 맞던 날이었다. 친척 누나는 지체장애인이었는데,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날 자주 괴롭혔었다. 누나에게 이유 없이 맞던 날, 나는 누나에게 소리를 지르며 심한 말을 했고, 그걸 큰아버지가 듣게 되었다. 다음 날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침밥을 먹은 직후 큰아버지의 농장에서 3일간 일을 했다. 반나절 간 돼지의 변을 치웠고, 뜨거운 태양 아래 콩을 심었다. 그것은 고작해야 10살 남짓이던 나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마지막이 돼던 3일째, 난 긴 노동의 끝에 잠시 숨어 농땡이를 피웠고, 성난 표정의 그는 내 목덜미를 잡아 지옥에 던져놓았다.
그가 나에게 선사한 지옥은 60평 남짓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창고였다. 그곳은 내 공포심을 자극하기엔 너무나도 과했다. 퀴퀴한 먼지의 냄새와 미칠 듯 한 정적, 내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어둠은 고사리 같던 손이 피떡이 될 정도로 철문을 두드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미 쉴 때로 쉬어버린 가녀린 목으로 살려달라 수없이 외쳐도,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해가 질 무렵에야 날 꺼내 줬다. 덕분에 나는 외부요인으로 인해 시야가 가려지거나,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면 미친듯한 공포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상처들은 아직도 나를 힘들게 만든다. 큰아버지가 대나무로 내 팔을 때려 깁스를 했을 때, 운동을 하다 무릎을 다쳐 부분마취를 했을 때와 같은,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그저 지옥 같은 그 시간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군대에 있을 때도 부동자세를 하지 못했고, 아무리 추워도 침낭에 들어가 잘 수가 없었다. 방독면을 써서 시야가 가려지면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될 때마다 괜찮다고 되뇌어보고,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며, 억압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해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고치려고 많은 노력을 해봤지만 예전과 지금의 차이점은 내가 이런 외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남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뿐이다.
내가 남들에게 이 얘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적 외상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까지만 해도 정신질환 및 정신적 외상(이하 정신적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영 좋지 않았다. 정신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약하다’, ‘겁이 많다’며 손가락질당하거나 정신병자 취급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기보단 숨기는데 급급했고, 그러한 행동은 학교나 직장과 같은 사회생활에서,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혹은 친구관계나 가족관계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재는 집단 따돌림, 사회 부적응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많아지며 개인의 정신적 질병이 재조명받고 있는 추세고, 몇몇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들로 인해 PTSD라는 개념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정신병'이 아니게 됐으며, 또한 내가 남에게 익명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
난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공감과 동정을 바라는 것 또한 아니다. 내 오랜 숙원은 이것을 남에게 덤덤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는 사소하다고 느꼈을 이것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것은 마치 아기의 첫 홀로서기와도 같았다. 걸음마를 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한 걸음이 나에겐 겁이 나는 도전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는 것처럼 내 상처를 남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 이로써 나는, 나로서 오롯이 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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