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의 종말

7일간의 여행

by 이시절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A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땐 A도 다른 인간들처럼 혼란스러웠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사람들을 만나야 할지 혼자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버킷리스트나 해결하며 보내야 할지.


그러다 문득 A의 생각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내가 아주 오래, 깊이 갈망했던 한 가지. 지금이야말로 그것을 해결해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알았다, 지금 A가 가야 할 곳을.


아주 오랜만에 A의 컴퓨터의 전원이 켜졌다. 바쁜 생활 속에 컴퓨터를 할 시간은 없었고 굳이 폰이 있는데 컴퓨터를 쓸 필요는 없었다. 컴퓨터를 켜자 옛날부터 써왔던 W사진으로 된 배경화면과 W에 관련된 것으로 구성된 파일들, W에 관한 검색기록들이 줄줄이 나왔다. 이땐 내가 이렇게나 한가했었던가? 그러다 이땐 이리도 W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구나 싶었다.


A는 아주 오래전 만들어놓은 파일들을 훑어보다가 오랜만에 본 W의 사진에 웃고 기뻐했다. 그리고 어느덧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일주일은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


A가 첫 번째로 누른 것은 홈화면에 만들어놓은 사이트 X의 바로가기였다. 물론 사이트 X지만 W의 계정이 바로 뜨게 만들어진. 들어가자마자 최근 컴백소식과 팬사인회, 콘서트 사진들이 줄줄이 떴다. 여전히 W는 빛났다. 사이트 X에서 알 수 있는 건 이것이 다였다.


그다음으로 A가 향한 곳은 이 또한 홈화면에 만들어진 사이트 H 바로가기였다. 사이트 H는 W 같은 스타들을 위한 사이트였기 때문에 확실히 정보를 구하기 쉬웠다. 하지만 A가 원하는 정보는 며칠 전 W의 모습과 이번에 새로 나온 메모리북이 아니었다. 하긴 W도 인류의 종말이라는데 이런 사이트에 글 올릴 시간은 없겠구나 싶었다.


A는 다시 창을 내리고 구글을 열었다. 구글에 W를 검색하자 기사들과 프로필이 와르르 쏟아졌다. 앨범이 300만 장을 돌파했느니 뭐니... 월드스타인 W에게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라고 A는 생각했다. 그래, 확실히 W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고.


A는 마지막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사이트를 열었다. 이번에는 바로가기가 아니라 구글에 검색해 들어간 사이트였다. 사이트 Y. 사이트 Y에는 궁금한 것 궁금하지 않은 것 온갖게 다 뜨니까. 로그인해서 쓰지도 않는데 알고리즘은 온통 W 뿐이었다.


그럼에도 W의 행적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며칠 전에 올라온 티저와 비하인드 영상 등만 주루룩 떴다. A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쉬며 온갖 이야기와 소문이 모이는 잡담 사이트에 접속했다. 거의 몇 년만에 들어와본지라 어색했고 업데이트가 된 부분도 있었다. A는 실시간트렌드 몇 개를 훑었다. 굳이 W를 검색해보지 않아도 내용이 떴다.


그건 공항에서 W를 목격했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는 아무래도 W의 팬인 것 같았고, 우연히 공항에서 W를 마주쳤다는 내용이었다. 흔들리고 뒷모습만 나온 사진은 힐끗 봐도 W임이 확실했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A는 사진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뒤에 지나가는 사람부터 가방 디자인, 상표, 뒤의 전광판 다른 것들 전부다. 주변 사람들 중 W의 매니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가방은 주로 투어를 다닐 때 들고 다니는 가방이었다. 주로 공항출국 기사에서 보이는 가방이었으니까.


A는 W의 사진 위에 잔뜩 흔들려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전광판을 보았다. 시간과 게이트 방향, 그리고 나라까지 적혀있는 전광판을 A는 꼼꼼히 읽었다. 그리고 이내 W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W가 간 곳은 아이슬란드였다. 뜻밖이었다. 아이슬란드는 월드투어 때도 안 가는 곳이지 않나?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W가 아이슬란드에 있다는 것, 그것만이 A가 원하는 정보였다. A는 빠르게 사이트 창을 닫아버렸다.


그다음으로 A의 마우스는 갈 길을 잠깐 헤매다가, 다시 구글로 향했다. 이번의 검색어는 '아이슬란드 여행'이었다.


물론 A가 원하는 건 아이슬란드 여행 후기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아이슬란드 가는 법이었을 뿐이다. 혼자 여행한 번 가본 적 없는 어른으로 자란 A는 비행기 표를 예매할 줄 몰랐다.


처음에는 아이돌 티켓팅과 비슷하겠지 싶었다. 대충 사이트 H에 들어가서 빠른 타자와 클릭, 행운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었다. 그만큼 비행기 표 예매도 쉬울 것이라고 A는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예매하려니 가장 큰 난관에 봉착했다. 어디서 예매를 해야 하지? 컴퓨터 의자에 기대자 끼익 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막막해진 A는 무작정 지도를 열었다. 지도 속 검색어는 '공항'. 가장 가까운 공항은 버스로 1시간 거리였다. 지하철이 더 빠를 것 같았다. 하지만 A는 버스를 선택했다. A는 혼자 지하철도 버스도 타본 적 없는 어른으로 자랐기에 지하철 역에서 길을 찾을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버스는 정류장이 딱딱 있으니, 편할 것 같았다.


A는 지갑을 오래 뒤져보았지만 교통카드를 찾기 못했다. 신용카드로는 안 되려나? 현금을 챙겨야 하나?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한 A는 일단 해야 할 것 몇 가지를 적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통장에 있는 돈을 몽땅 챙겨야 했다. 아니지, 어차피 죽을 텐데 카드 빚을 상관이 없으려나? 아니지, 그래도 모은 건 다 쓰고 죽어야지. A는 현금을 좋아했기에 서랍에서 통장 두 개를 꺼내와 근처 은행에 가 현금으로 죄다 뽑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로는 여행 짐을 싸야 했다. 긴 여행이 될 터였다. 모자란 건 가서 사면 될 것이니 최소한으로 챙겨야 했다. 며칠 갈아입을 옷과 칫솔, 치약, 물티슈, 휴지... 지갑, 폰, 통장, 노트, 그리고 W 굿즈들.


세 번째로는 1, 2를 모두 해치우고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야 했다. 아마 사람이 많을 터였다. 그래도 죽기 직전 아이슬란드에 갈 사람은 별로 없을 테니 아이슬란드 표를 예매해 아이슬란드로 최대한 빨리 가야 한다.


이 정도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첫 번째, 통장에 든 돈 현금으로 인출하기.

두 번째, 짐 싸기.

세 번째, 버스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아이슬란드로 가기.


A는 통장을 가지고 근처 은행으로 향했다. A는 혼자 은행 무인 인출기를 사용해 본 없는 어른으로 자랐기에 기계 하나 다루는데도 꽤나 버벅거렸다.


첫 번째 통장은 어릴 때부터 개인적으로 모아 온 돈이었다. 자그마치 609만 원이었다. 현금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A는 뽑아낸 현금뭉치를 돈몽투에 나눠서 넣은 뒤 두 번째 통장의 돈은 카드에 든 채로 쓰기로 했다.


A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재작년에 구매한 캐리어를 꺼냈다. 지금 보니 디자인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건 만족스러웠다.


A는 천천히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단 옷부터 몇 가지 대충 골라서 넣었다. 그리고 예쁜 옷 한벌도. 양말2켤레와 새로 산 신발 하나를 넣고, 칫솔, 치약, 물티슈 같은 필수품들은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캐리어의 절반 부분에는 W의 굿즈로 채웠다. 다 넣은 수는 없는 양이었다. 그래서 결국 A는 제일 아끼는 앨범 3개, 포카집 2개, 응원봉, 인형, 포스터, 티셔츠를 챙겼다. 그래도 비좁긴 했다.


그리고 그날 A는 처음으로 캐리어 바퀴의 쓸모를 알아차렸다.


A는 W를 아주 뜨겁게, 깊게 사랑하고 또 존경하고, 그리워하고, 갈망했다. 만날 어느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며 상상하곤 했다.


이제껏 콘서트, 팬사인회에서의 만남은 만남이라고 A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로의 진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때야 말로 A는 진정으로 W와 만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긴 여정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지금 A가 가야 하는 곳은, W가 있는 곳이니까.


비행기에서 내리자 아이슬란드라는 곳이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고 A는 느꼈다. 처음 본 장면이 어두침침하고 비만 주룩주룩 내리는 모습이었으니.

뭣 같아... 처음 종말이 찾아왔다는 그 순간에는 이미 종말이 일어난 후였어. 종말이 일어나기 전에 말해주었어야지.


호텔도 예약하지 않은 A는 공항에서 아무거나 골라 산 우산을 쓰고 근처 숙소 문을 무작정 두드렸다. 그 숙소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A는 종말 후에야 그 숙소가 너무 비싸 손님이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A는 세상에 대해 모르고 자란 어른이었다. 이제 종말까지 6일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오늘부터 무언가 시작하기에는, A의 머리가 너무 오래 고생한 뒤였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고서야 A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넓은 아이슬란드에서 어떻게 W를 찾지? A는 더 이상 생각하기 싫었다. 마지막 일주일이니, 아니, 마지막 6일이니 생각 안 하고 행운이나 왔으면 싶었다. 물론 A는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종말이 찾아온 순간부터 행운이 뒤따라 왔다는 걸 종말 후에야 알았지만.


캐리어를 열어 W의 응원봉을 꺼냈다. 늘 풀로 충전해 놓은 응원봉은 화려하게 반짝였다. 사진들 속의 W도 마찬가지였다.


A는 버킷리스트부터 해보기로 결심했다. A도 여느 청춘들과 비슷해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오로라 보기였다. 그리고 하나는 검은 모래 해변에 가보기.


A는 과도한 정보와 빛에 지쳐 더 이상 검색은 하기 싫었다. 발가는 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면 어느샌가 그곳에 도착해 있으리라고 믿었다.


A는 숙소 방을 빼고 짐을 챙겨 나갔다. 결국 검색해 본 결과 검은 모래해변은 차를 타고 꽤 가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A에게는 시간이 많았다.


검은 모래 해변은 이승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만약 죽는다면, 이곳에서 죽고 싶어. 이곳의 검은 모래가 되어 사라지고 싶어. 아름다움의 극치를 달리는 곳이었다, 아이슬란드는. 이승 최상의 아름다움이었다. 모든 순간의 마지막이 검은 모래 해변이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곳이었다.


검은 모래 해변에서 자그마치 3시간을 보냈다. 늦게 일어난 탓인지 검은 모래 해변만 보았는데도 시간이 벌써 훌쩍 가있었다. 벌써 하루가 지났군, 젠장. 5일 남았어.


A는 근처 모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침대하나 달랑 있는 모텔이었지만 나름 괜찮았다. 지금 다른 거 생각할 시간은 없었으니까. 방 안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W의 노래를 틀었다. W의 목소리가 몹시도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W의 굿즈를 침대 위에 펼쳐놓고, 바라보고 또 갈망하다가 바닥에서 잠에 들었다.


3일 차에는 본격적으로 W 찾기와 오로라 보기를 겸하기로 했다. A의 계획은 바로 자신을 믿는 것이었다.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면, 운명처럼 만나지 않을까? 품속에는 W의 사진을 품은 채 A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자신만을 믿은 채.


4일 차에 A는 오로라를 보았다. 걷다 보니 운명처럼 한 숙소를 만났고 운명이라 여기고 그 숙소에 가장 비싼 방에 묵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까지 깨있었던 결과 푸른빛의 아름다운 오로라를 보았다.


오로라는 검은 모래 해변과는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이었다. 이건 마치 비현실 속의 아름다움이었다. 검은 모래 해변은 마치 옛날 르네상스의, 마치 카라바조처럼 자신만의 느낌에 집중하는 화가가 그릴 법한 모네풍의 그림이었다. 하지만 오로라는 마치 깊은 꿈 속에서 보았던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대충 천을 구겨놓은 것 같은 모습이지만, 그렇다기에는 너무 비현실적인 모습인. 무의식 속에서 찾아낸 아이디어로 그림을 그린 달리가 그럿을 법한 모습이었다. 흘러내리고, 구겨지고, 어울리지 않는 색의 조화. 그러나 아름다운.


A는 이제 오로라도 보았고, 2일밖에 남지 않았으니 다시 종말을 준비하기 위해 검은 모래 해변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종말 이틀 전에는 일을 하기 싫은지, 택시 하나 잡을 수 없었다.


A는 다시 걸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종말처럼 그를 만났다.


몹시도 사랑하고 그리워한, 존경하고 갈망한 그를.


W.


W도 A도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차가 하나도 없는 휑한 도로 위에서, W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W는 평범한 옷에 화장 없는 얼굴이었지만 빛났고. A는 챙긴 예쁜 옷을 입지도 화장을 하지도 못한 상태인 데다가 오래 걸어 지치고 머리도 잔뜩 엉켜있었다. A가 머릿속에서 그려온 드라마 같은 장면은 아니었다. 그 순간은 종말 이틀 전의 검은 모래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휑한 도로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다.


"W."


늘 입에서만,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A의 목소리는 낮지도, 높지도, 부드럽지도, 거칠지도 않았다. A가 늘 생각하던 평범한 A의 모습이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이제 마지막이지만."


그 뒤로 A의 독백이 이어진다.


"사실 알고 있었어요, 마지막이 올 거라는 걸.


하지만 내가 당신을 보러, 만나러 가지 않은 건... 마지막이 더욱 아름다워지길 바라서였을 거예요. 이 모든 순간이, 이 모든 아름다움이 내 인내심의 결실이겠죠."


W는 조용히 A의 말을 듣고 있을 뿐이다.


"몇 번 보러 가긴 했죠.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W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입을 연다.


"1년 전 팬싸에서 고양이 머리띠를 했을 때, 사진은 한 장도 찍지 않으면서, 눈도 안 깜빡이면서 웃고만 있던 그 사람, 맞죠."


A는 W의 모든 순간을 눈으로 담고 싶었다. 사진이야 다른 사람들이 찍을 터였다. 그 아름다움은 카메라 렌즈가 아닌 눈으로 담아야 하는 것이었다.


"... 뜻밖이네요. 맞아요, 나는 그날 사진을 찍지 않았죠.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요."


다시 A의 독백이 이어진다.


"세상의 마지막이라잖아요. 당신을 보러 왔어요. 아주 긴 시간을 달려. 즐거운 시간이었죠...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버킷리스트에도 아이슬란드는 있었으니까.

...

... 언제든.. 세상의 마지막이라면 당신을 만나고 싶었어요. 고마웠고, 사랑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아주 오래, 아주 깊이, 사랑하고 고마워했다고."


W가 나지막이 말했다.


"다음 마지막엔... 내가 만나러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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