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의 종말

7일간의 하늘

by 이시절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B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B는 삶에 대한 미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종말이 찾아온다길래 다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지구라는 행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만 사라진다니 피해 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다. 갑자기 뙇하고 모든 인류가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았다. 고통스러울까? 느낌도 없이 사라질까?


B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그야 너를 믿어주는 사람들 때문이지!'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곤 했다.

하지만 B의 아주 깊은 곳에선 그것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 사람들의 믿음이 나의 삶의 이유라고?

그렇지만 B는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고 싶었기에 그 생각을 얕은 곳으로 건져 올리지 않았다. 그 생각은 단지 아주 깊은 곳에 가라앉은 생각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B는 평범한 걸 싫어했었었다.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특이점 하나 없는 수수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땐 빛나는, 유명한 사람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믿었고.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아이들이라면 유치원 다닐 때 즈음 한 번쯤 발레리나를 꿈꿔봤던 것과 똑같은 이치다. 어쨌든, B도 평범하길 싫어하는 평범한 사람이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범한 게 제일이라는 어른들의 말을 이해한 어른으로 자라 버렸다.


B는 종말이 다가왔다는 말에도 별 감흥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바빠 보였다. 늘 시끄럽던 온라인 세상도 고요했다. 그래, 누구라고 종말이 7일 남았는데 사진이나 올리고 있겠어? B는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지저분한 방에 고요히 앉아있었다.


B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았다. 자신만의 생각에만 집중했다. B가 SNS에서 보는 것도 하늘사진뿐이었다. 다른 건 별로 관심이 없었다. 종말 한다는 소식을 알게 된 건, 울면서 전화한 친구 탓이었다. 엄마와는 연을 끊고 산지 꽤 지났다.


B는 하늘을 좋아했다. 하늘은 넓고 끝이 없었다. 그 넓은 하늘을 다 채우려면 좋아하는 걸 다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은 늘 바뀌어서 좋았다. B는 한결같은 사람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B도 한결같은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그래서 B가 좋다고 했다. 하지만 B는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뀌는 하늘이 좋았다. 하늘이 바뀌는 걸 볼 때면 어디선가 읽은 문구가 떠올랐다.

'변덕이 심한 건 정서가 불안정하다는 뜻이다.'

하늘은 뭐가 그리도 불안했을까? 인류의 종말 뒤는 자신들일까 봐?


B가 바라보는 세상은 일반일들과 조금 달랐다. 모든 것을 보면 뇌에서 자동적으로 그림으로 바꾸곤 했다. '아, 이걸 이 화법으로 표현하면 좋을 텐데.' 하고. 무언갈 보기만 해도 스케치를 해놓는 습관 덕에 책장은 스케치북을 쌓아두기 위해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심할 땐 옛 스케치북을 펼쳐보며 웃었다. 많이 발전한 게 느껴졌다. 늘 한결같은 그림체였지만.


B는 화가였다. 주로 캔버스에 수채화나 유화로 그림을 그렸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믿었고 그림에 집착했다. 아마, 교과서에 한 낙서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B는 대학교에도 그림을 전공했다. B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눈이 아주 높고 B의 그림체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칭찬할만했다. B의 그림은 분위기가 절반을 차지했다.


B의 그림은 아주 고요하고 물 같은 분위기를 주었다. 사람마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고, 자신만의 생각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그림들이었다. B가 원하는 그림이었다. 요즘의 모든 그림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다들 제멋대로 해석하고 평가해 놓은 뒤였다.

B의 그림에는 아무도 해석을 붙일 수 없었다. B의 그림을 보고 자기 혼자 생각만 할 수 있었다. B도 자신의 그림에 해석을 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B 스스로도 볼 때마다 해석이 달라지곤 했다.

B의 그림은 정말 고요했다. 절대로 소란스러운 것이 없었다. 주로 늘 풍경화만 그려서인지 보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 수가 없는 그림들이었다. B의 그림은 모네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것이 확실했다.


B의 방에는 캔버스와 붓들, 나이프, 물감통들이 아무렇게나 어질러져 있었다. 대충 스케치한 종이들과 찢은 캔버스, 언제나 캔버스를 찢기 위해 준비해 준 칼.

B는 언제든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의 중앙을 찢었다. 종이에 그린 경우라면 불에 태웠다. B의 지인들은 그걸 알고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놀랐다. 뭐랄까, 조금은 잔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망한 캔버스를 찢는 건 놀라운 쾌감을 가져다주었고, 종이를 태우는 건 수많은 영감을 가져다주었다. B에게는 전혀 잔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B는 붓을 잡고 뱅글뱅글 돌렸다. 붓 끝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이제 쓸모없어진 붓이었다. 그래도 살 땐 나름 비싸게 샀는데. 붓을 데굴데굴 굴렸다. 바닥에 둔 게 하도 많아서 얼마 굴러가지 못했다. 붓은 종말 하지 않을 터였다.


B는 캔버스를 꺼냈다. 아름다운 하늘을 그렸다. 종말 7일 전의 하늘은 꽤나 아름다웠다. 적당한 구름과 놀라우리만치 새파란 하늘. 그래, 인류의 종말인데 자연은 슬플 의무가 없지.

B의 붓은 유연하게 움직이며 투명하고 아름다운 하늘을 그렸다. 그러다 문득 B는 붓질을 뚝 멈추더니 신경질적으로 캔버스 중간을 칼로 찢었다. 오늘의 하늘은 이렇게 투명하지 않았다. 오늘의 하늘은 수채화보다 유화에 가까웠다.


서랍을 뒤져 예전에 쓰던 유화 물감 몇 개를 찾아냈다. 나무 느낌의 플라스틱 팔레트에 덜었다. 그러다 오늘은 오랜만에 나이프페인팅을 시도하기로 하고 나이프를 몇 가지 꺼냈다. 참, 전부터 생각했는데 식빵에 잼을 바를 때 쓰면 좋을 것 같단 말이야...

물감이 묻은 나이프가 캔버스를 부드럽게 그었다. 매끄럽고 깔끔한 느낌이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음, 좋아. 이게 나이프 페인팅의 묘미지.


B의 손길에 캔버스에 새파란 하늘이 탄생했다. 마치 우주의 탄생을 보는 것 같았다. 그림은 역시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무언가를 창작해 낸다-는 것은 언제나 짜릿한 쾌감을 선사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랜만에 B는 창문을 열었다. 늦겨울의 상쾌한 공기가 창문을 통해 집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얼마 만에 바깥공기인가 싶었다. 원래 예술가들은 보통 집에만 처박혀있는 집돌이 케이스가 많다고 알고 있으니, 그런 핑계로 B도 늘 집에서만 머물렀다. 물론 집에서만 있으니 영감을 얻긴 쉽지 않았지만. 하지만 B는 영감은 경험이 아닌 잠재적인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 나이프를 휘두르다 문득 팔이 아파서 나이프를 쨍그랑 소리가 나게 바닥에 떨어뜨렸다. 잘 지워지지 않는 유화 물감이 바닥에 묻는 게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그래, 30X50짜리 큰 캔버스를 다 채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 아직 3분의 1의 절반도 채우지 못했다. 나이프 페인팅의 핵심을 두 가지 색의 경계를 부드럽게 묘사하는 것인데, 두 가지 색은커녕 한 가지 색도 마무리 하지 못했다. 나이프 페인팅의 핵심은, 물감이 꽤나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이프를 떨어뜨리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연은 늘 아름다웠다. 잔잔하게 흘러갔다. 절대로 빠르게 흘러가는 법이 없었다. 늘 잔잔하고 여유롭게, 언제나 흘러갔다. 창 밖의 하늘을 가로막는 방충망이 싫어져서, 천천히 일어나 칼로 방충망의 중간을 갈랐다. 캔버스와 달라서인지 그런다고 하늘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결국 뻑뻑한 방충망을 겨우 밀어서 열어냈다. 방충망이 없어진 하늘은 무척이나 깨끗했다. 방충망을 열자 마치 B와 하늘이 연결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을 느끼던 B는 다시 나이프를 들었다. 이미 조금 굳은 뒤였다. 다시 나이프에 물감을 묻혔다. 천천히 그어나갔다. 물감의 부드러움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예술가란 원래 자신이 느끼는 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사람들이다. 그걸 표현하는 능력이 예술가의 가치이고.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든 글로 표한하든 음악으로 표현하든 뭘로 표현하든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었다. B도 그랬다. 자신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담았다. 일상 풍경, 하늘을 그린다고 해도 그 속엔 B의 느낌이 들어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읽었다.


어느새 B의 캔버스의 절반이 차올랐다. 이번 그림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그림이었다. 이것을 보면 B가 평온하고 잔잔한 상태라는 걸 읽을 수 있었다. B는 아마 오늘 하늘을 보며 부드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B의 그림에서 할 수 있는 해석의 최선이었다. B는 더 이상의 해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B는 멍한 표정으로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너무 깨끗한 하늘이라, 나이프를 살짝만 데도 더러워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B는 자기도 모르게 파란색이 묻힌 나이프의 끝을 구름에 대보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는 충동적으로 캔버스를 찢었다. 옆에 마침 칼이 있었던 탓이었다.

'이게 아니야. 하늘은 이렇게 지저분하지 않아.'

B는 새 나이프를 꺼내고 새 물감을 짰다. 방금까지 쓰던 나이프와 팔레트는 대충 바닥에 엎어두었다. 지난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큰 나이프를 집어 한 번에 쓱 그렸다. 훨씬 깔끔했다. 아주 좋아.

나이프에 반반 묻혀 경계를 그리고, 아랫부분을 칠하고, 새 나이프로 부드럽게 정리하고, 다시 하늘을 한 번 보았다가 흰 물감을 꺼내 들었다.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구름.


구름은 신비로운 것이었다. 또한 아름다웠고. 솜사탕 같기도 한데 맛은 없을 것이고, 위에 폭신 앉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앉으면 바로 푹 꺼질 것이었다. B는 문득 자신의 생각이 예술을 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B는 작은 붓을 들어 조금씩 톡톡 찍어나갔다. 구름의 몽실몽실한 느낌을 원했다. 솜사탕 같고, 누르면 폭 들어갈 것 같은 구름...


B는 구름을 빤히 보았다. 저게 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참 내, 과학시간에 배운 건 역시 말도 안 되는 게 많다니까. 누가 저기 위에 앉아봤대? 물이 어쩜 저렇게 하얘? 에이... 뭐, 그래. 과학자들이 알아냈겠지. 정말 물이라면... 스포이드로 한 번 쪽 빨아보고 싶네.


B는 다시 붓을 두드렸다. 아주 작고 몽글몽글한 구름이 하나 완성되었다. 캔버스가 올려져 있었던 가젤을 구석으로 몰아놓고, 탁자에 나이프와 캔버스를 올려두고 창틀에 걸터앉았다.

이게 그렇게 약하다지? 기대면 무너진다나 뭐라나..?

가끔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보고 싶지도 했다. 낙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떨어지는 그 순간 공기는 어떨까? 어떤 느낌일까? 그걸 느껴보고 싶었다. 위에서 점점 떨어지며 보는 땅과 하늘은 어떨까? 꽤나 아름답지 않을까? 문득 B는 이곳에서 떨어져 보아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을 충분히 관찰한 B는 다시 일어나 캔버스 앞에 섰다. 나쁘지 않은 그림이었다. 적어도 B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감은 매끄럽고 깔끔하게 발라졌고, 색과 색 사이의 경계도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이제 구름만 마저 그리면 되었다.


다시 창 밖을 힐끗 보았다. 커다랗고 흰 구름이 아래를 덮고 있었다. B는 크고 둥근 붓으로 아래쪽을 하얗게 채워나갔다. 드문드문 빈 공간이 더해져 더욱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참을 그려나가다 문득 B는 생각했다. '구름에 그림자가 필요한가?' B가 본 구름에는 주로 아래쪽에만 그림자가 있었다. B는 회색을 찍어 그리려다 멈칫했다. 그림자를 그리면 사실성은 더해지지만 B가 원하는 깨끗한 하늘을 그리지 못할 것 같았다. 티 없이 깨끗한 하늘을 위해 그림자가 필요할까?


B는 결국 회색이 찍혀있던 붓을 헹구고 다시 흰색을 묻혔다. 큰 구름을 완성하고 위에 조금씩 작은 구름을 더해나갔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름 아름다웠다.

B는 그림에 얇은 천을 조심스럽게 덮어두곤 한쪽 구석에 세워두었다. 오늘의 하늘이 완성되었다.


다음날 B는 웬일로 오전에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오늘은 조금 우중충했다. 비가 오려는 듯했다. 먹구름이 잔뜩 있었고, 하늘색도 하늘색보다 회색에 가까웠다. 오늘의 하늘은 그다지 예쁘지 않군.


하지만 그래도 B는 하늘을 그렸다. 오늘 하늘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주 거칠고 어둡게 그렸다. 먹구름이라 그런지 구름이 아주 아래쪽에 있었다. 오늘은 나이프 페인팅이 아니라 평범한 수채화였다. 비가 올 테니까, 물 느낌을 내기 위해.


오늘은 20X20의 작은 캔버스에 그렸다. 회색으로 배경을 채우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비가 투둑투둑 내렸다. 창 밖으로 손을 뻗어 물을 맞아보았다. 물방울이 B의 손바닥 위에서 통통 튕겼다. 이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B가 생각하는 예술이었다.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하는 것.


B는 그날 이후로도 하늘을 그렸다. 어느새 방구석에 6개의 캔버스가 세워졌다. 만족스러웠다. 비록 옆에 찢어진 캔버스가 꽤나 많이 쌓여있긴 하지만.

6일 차의 하늘을 끝맺었다. 그림에 매진해 살던 삶이 끝이 났다. 내일의 하늘은 볼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6일간의 하늘은, B가 살면서 본 하늘들 중 가장 아름다웠다.


B는 종말이 다가오자 삶의 이유를 찾아냈다. 종말을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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