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룸메이트
90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제품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특정 인물, 단체, 국가에 대한 표현은 작가의 개인적인 생각이 포함되어 있으며, 받아들이기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C의 종말
이 넓은 세상의, 지구라는 행성의, 인간이라는 종에게 마지막 일주일이 주어졌다.
하지만 C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서 종말을 맞기에는 너무 집은 아름답지 못했다. 낭만적이지도, 감성적이지도 않았다. 심지어 C네 집은 드라마에 나올 법한 예쁜 집도 아니었다.
C는 그나마 학교 기숙사가 더 드라마에 나올 법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낭만을 찾기 쉬웠다. 학교는 K-드라마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 요소니까.
그런 C의 생각과는 별개로 C의 폰이 쉴 새 없이 울렸다. C는 18년을 살면서 처음으로 영화처럼 잠금화면이 알림으로 가득 차고, 카톡 옆에 231 같은 숫자가 뜨는 걸 보았다. 물론 걸려오는 전화 탓에 그걸 바라볼 시간은 별로 없었다.
C는 종말이 찾아오면 SNS가 가장 시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SNS는 잠잠했다. 그래, 7일 남았는데 누가 SNS나 하고 있어? 버킷리스트나 채워야지. 버킷리스트가 종말의 순간에 게시글 올리는 게 아니라면 말이야. 폰의 소리를 끄고 전화는 와도 무시했다. 기숙사의 크지 않은 창문으로 퍽 예쁜 하늘이 보였다.
하도 전화를 안 받아서인지 어느새 전화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C는 폰을 들어 하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정말 감성적인 장면이었다. C는 늘 그랬듯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이거 봐. 하늘 진짜 예뻐.'
하지만 그 뒤로 쏟아지는 문자는 하나도 읽지 않았다. 읽으면 집으로 오라는 엄마의 명령을 무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몸을 반쯤 밖으로 뺐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쳤다. 늦겨울이지만 여전히 나무들은 앙상했고 바람은 차가웠다. C는 금방 창문을 닫았다.
C의 룸메이트 현화가 때마침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늘 그랬듯 태평한 걸 보니 종말에 관해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우, 추워. 왜 문 열고 있어? 하긴, C는 창문 여는 걸 좋아하지. 흠, 내 고통을 즐기는 건가..?"
딱히 아니라고 대꾸하진 않았다. 현화와는 내내 룸메이트였지만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C는 현화를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다.
현화가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폰을 들었다. 폰에는 분명 문자가 수십 통 와있을 것이었다. 그전에 C는 직접 알려주고 싶었다.
"현화, 그거 알아? 인류가 7일 뒤에 종말한대."
현화는 잠깐 동안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현화는 놀란 듯했지만 별로 티는 안 났다. 현화는 꽤 긴 시간 침묵을 지켰고,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집에 안 갔어, C?"
현화는 집에 갈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일본이나 미국, 중국에서 늘 이동하며 살았다. 한국에는 집이 따로 없었다. 미국에 집이 하나 있고, 일본에는 엄마의 본가만이 있었다.
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대는 C의 폰을 힐끗 보고는 살포시 웃었다.
"C는 집이 싫나 보네. 하긴, 전부터 그래 보이긴 했어."
현화의 말투는 조금 특이했다. 발음이나 어조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정말 놀라울 정도로 '하긴'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너'라고 하는 일 없이 늘 꼬박꼬박 이름을 불렀다.
C는 자신이 집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에 놀랐다. 집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때론 불편할 땐 있었지만. C는 놀라서 되물었다. 내가 집을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느냐고.
현화는 당연한 것처럼 말했다. 주말에 기숙사에서 나갈 때도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고, 집에 대한 얘기도 거의 안 했다고. 오해한 거라면 미안하다고 거듭 말했다.
현화가 정말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C는 자신의 진심은 집을 싫어했던 것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C는 자신의 진심은 지인에게 말을 할 때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는 민망해서 못 했던 말들이 친구에게는 할 수 있을 때도 있으니까.
"그럼 C는 왜 집에 안 갔어?"
대답이 고민되는 질문이었다. 글쎄, C는 낭만하나에 매달려 집에 가지 않은 걸까? 원래였다면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답했을지 몰라도, 방금 그 말을 들은 C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게, 나는 왜 집으로 가지 않았을까?
"맞아, 하긴 C는 낭만적인 걸 좋아하지. 종말 7일 전 룸메이트랑 단둘이 학교에 남아있는다니 아주 낭만적이고 감성적이잖아?"
현화가 씩 웃었다. C가 하고 싶었으나 못 했던 그 장난스러운 말을 현화는 아무렇지 않게 했다.
C와 현화는 기숙사에서 나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학생들 탓에 학교는 시끄러웠다. 창 밖으로 우르르 나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큰 검은색 트렁크를 끌고 나가는 히원 선배도 보였다.
"오, 한히원 선배도 이럴 땐 집에 가는구나."
히원 선배는 C가 아주 존경하는 선배였다. 꽤나 멋있었다. 새카만 긴 머리에, 카리스마 넘치나 속은 따듯한 성격에 타고난 공부머리. 히원 선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너는 끝까지 히원 선배를 한히원이라고 부르네."
말을 뱉고 나선 이게 비꼬는 것처럼 들릴까 봐 조금 불안했다. C가 히원 선배를 존경하고 좋아한다는 것을 현화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C의 걱정과는 달리 현화는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었다.
"C, 나도 모르고 있었어. 나한테는 히원 선배보다 한히원 선배가 더 익숙했어."
현화는 자기도 모르게 히원 선배에게 성을 붙여 말한 것에 미안해했다. 전할 수 없겠지만 히원 선배에게도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현화와 C는 창 밖으로 학생들이 귀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훌쩍훌쩍 울면서 캐리어를 끌고 가는 유미가 보였다. 툭하면 운다니까... 유미는 C보다 한 살 어린 일학년이었다. 유미는 히원 선배와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시크하고 시원시원한 성격과는 정반대였다. 조금 쩨쩨한 성격이었고 뒤끝이 강했다. 툭하면 울기도 했고 상처도 쉽게 받는 아이였다. 웬만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게 보였지만 C와는 영 맞지 않았다. 누구든지 다 받아주는 히원 선배도 유미만큼은 적당히 밀어냈다. 하지만 유미는 정말 밝은 아이였고, 쉽게 포기하지 않는 아이였다. 단지, 그 좋은 성향을 다른 곳에 썼어야 했을 뿐이었다.
한참을 창밖을 구경하다 문득 누군가 기숙사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C와 현화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떠들다 갑자기 뚝 조용히 했다. 하지만 안에 있느냐고 묻는 목소리는 해숙 씨였다. C는 냉큼 문을 열었다.
해숙 씨는 올해 52세로, 이번 연도까지만 하고 행복한 은퇴생활을 즐길 것이라고 말버릇처럼 말했다. 성은 허 씨에, 함께할 해 偕 자에 옥이름 숙 琡 자를 쓰는데, C는 단연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이름뜻이 예쁜 선생님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외교관을 꿈꿨으나 교육대학교에 붙었고 장학금으로 학비도 내지 않아도 되어 선생님이 되었다. 해숙 씨는 늘 그 일로 아쉬워했다. 여전히 과거로 돌아간다면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집에 안 가나요, 현화 그리고 C?"
늘 나긋나긋하던 해숙 씨의 목소리가 조금 빨라져 있었다. 해숙 씨는 가방 하나 챙겨 집으로 가는 듯 보였다.
해숙 씨의 질문에 현화가 살랑살랑 고개를 젓자, 현화의 짧은 단발머리가 같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현화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학교에서 맞는 종말이라니, 낭만적이지 않나요?"
현화의 말에 해숙 씨도 피식 웃었다. 그게 돌아가지 않는 이유냐면서. 현화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답했다. 해숙 씨는 이런 상황에 마저 해맑은 현화를 보며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알아서들 하라는 충고 아닌 충고를 던진 해숙 씨는 학교에서 나갔다.
현화는 아쉬운 표정으로 해숙 씨가 학교 정문을 빠져나가는 걸 창문으로 바라보았다.
"해숙 쌤은 결국 행복한 은퇴 생활을 즐기지 못하셨네."
힘이 빠진 듯한 현화의 목소리에 묘하게 다시 종말이라는 일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C는 나지막이 말했다.
"해숙 쌤은 내년이 되어도 계속하셨을 것 같은데."
C의 말에 현화는 '하긴, 해숙 쌤은 그 말을 우리가 일 학년일 때도 하셨었지.'라고 살풋 웃으며 대꾸했다.
C는 문득 자신들이 종말을 7일 남겨뒀다기에는 너무 차분하다고, 너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C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C의 차분함을. 현화의 차분함도 그랬다.
하지만 C는 이내 그게 차분함이 아니라 두려움을 가리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둘 다 서로를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최대한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은 너무 푸르렀고 날씨도 좋았고 이번 시험 결과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둘은 아직 너무 어렸다. 인생의 4분의 1도 살지 못했다. 하고 싶은 것도, 할 것도 많은 둘이었다. 이렇게 끝내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아쉬웠다. 솔직한 C의 감정은 아쉬움이었다. 아쉬웠고, 또 억울했고, 두려웠다. 어떤 종말이 찾아올지. 아플까? 아무 느낌 없을까?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없이 밋밋한 끝일까?
밋밋한 끝이 제일 아쉬울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계절을 통째로 날려버리겠다는데 무슨 이벤트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고통스럽지는 않은데, 아름다운 그런 마무리랄까? 아니, 아파도 좋아. 너무 아프지만 않다면야.
현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 기간 유지된 고요함 속에 둘 다 자기도 모르게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종말을 원해, C?"
그 난해하고도 깊고 어려운 질문에 C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내가 원하는 종말? 너무 아프진 않지만 조금 아프고 아름답고 화려한 이벤트의 종말? 그런 종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애초에, 아름다운 종말이라는 게 있나?
"나는... 깔끔한 마무리. 한순간 딱, 눈앞이 새카매지면서 끝나면 좋겠어. 아프지도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현화가 바라는 종말은 C와 정반대에 가까웠다. 그런 종말은 원하는구나, 현화는. 아름다운 것에 집착하지 않는구나.
인간들은 다소 아름다운 것, 예쁜 것에 집착했다. 자신의 외모든 뭐든. C도 마찬가지였다.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심지어 종말에조차도.
하지만 현화는 달랐다. 현화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달랐다.
C는 저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떤 걸로 차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고 싶었다. 저 머릿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었다. 아마, 저 머릿속은 아름다울 것이다. C가 생각하는 아름다움과는 조금 다를 것이고, C가 본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울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상상도 못 한 것들이 유영하듯 떠다니고 있을 것이고, 아마 그것들을 모조리 이해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 그곳에서 함께 유영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C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종말을 원해. 너무 아프지는 않지만 미칠 듯이 아름다운 종말 말이야."
C에 말에 현화가 빙긋 웃었다. 조금은 인간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하듯,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꼭 훔쳐오고 싶은 웃음을.
현화는 C에게 없는 것이 많았다. 시시 때때 나오는 사랑스러운 몸짓들, 반경 10m는 밝게 할 환한 웃음, 조곤조곤 부드럽고 임팩트 있는 말투... 까르르 웃는 웃음소리도.
하지만 막상 현화는 그런 사소한 사랑스러움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습관이라서인지, 그냥 본능인지. 아마, 현화도 인간답게 더 많은 걸 바라고 있겠지.
이후 며칠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틀 동안은 학교 구석구석 쏘다니고 교무실 컴퓨터로 장난을 쳤다. 배고플 땐 근처 편의점에 들러 무언가를 사 먹었다. 거의 무인매점 수준이었지만 알바 경력으로 완벽하게 결제까지 마치고 산 것이었기에 괜찮았다.
3일 차에는 해숙 씨가 돌아와 학교에서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학교에 먹을 것도 없을뿐더러 학부모님들이 너네가 전화를 안 받으니 자꾸 자기한테 전화를 한다고 하소연하며 나가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C는 나갈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가끔 불안했다. 현화는 부모님이 찾아오면 갈 것 같아서. 혼자 학교에서 맞이하는 종말은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전혀.
현화도 C도 해숙 씨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찾아온 부모님들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집에서 맞는 종말이라니? 이것만큼이나 드라마틱하지 못한 게 있나.
현화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고, 드라마를 보고, 울고, 웃고, 떠들었다. 사소한 것에도 울고 웃었다. 종말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현화와 둘만 기숙사 방에 있을 때보다, 집에 있는 게 훨씬 덜 불안했다. 현화보다, 가족들이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현화와 함께 할 때의, 순간순간 종말을 잊는 효과는 없었다. 한순간 떠오를 때 불안함이 사라지고, 내내 조금 불안했다. 정확히 7일일까? 7일 차의 언제일까?
방 3개짜리 집의 자신의 방 침대에 앉아,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오늘따라 빠르게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C는 깨달았다.
종말만 해도 충분히 드라마틱하다고. 자체 효과음에 반짝이는 효과도 날 테니까.